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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바리스타 개척자 안명규 , '바리스타, 커피 농장을 거닐다'
김민영 기자 | 승인 2013.10.05 10:26

정오 무렵, 학교 캠퍼스나 오피스 빌딩 근처는 종이컵 하나를 손에 든 사람들로 물결친다. 점심 메뉴가 얼큰한 김치찌개였든 크림소스 파스타였든 마지막 입가심은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 원두커피 한 잔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커피 수요가 급격히 늘고 소비자들의 입맛도 다양화, 고급화되고 있는데 이미 사반세기 전에 오늘의 커피 시대를 예감하고 준비해온 이가 있다. 대구에 자리한 <커피명가> 안명규 대표가 바로 그이다. 한국 바리스타 1세대로, 생활 속 커피문화 정착을 위해 열정적으로 살고 있는 그를 만나본다.
 

   
 
그가 보내준 주소만 들고 낯선 동네에 들어섰을 때 초행길인데도 그의 카페가 가까웠음을 직감했다. 간판은 아직 눈에 보이지 않지만. *중배전한 원두를 갈 때의 향기가 마중나와 우리 일행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카페에 들어서자 라 핀카La Finca라고 적힌 문구가 먼저 보였다. 라 핀카는 스페인어로 ‘농장’을 뜻한다. 말 그대로 탁 트인 공간에 잔디가 깔려 있고 새로운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수많은 커피나무 묘목들이 자리하고 있다. 한쪽에 지은 커다란 생두 창고와 커피 교육을 하는 아카데미 사랑채, 손님들이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는 카페까지 그곳은 그가 평생을 걸고 일궈온 커피 제국이었다.

우아한 농장, 생두창고에서 열리는 음악회
빈틈없고 말끔하게 보이는 외모와 달리 안명규 대표는 대화를 나눌수록 엉뚱한 과학자요, 정밀한 세공 기술을 가진 장인처럼 느껴졌다. ‘쓰리스타는 알아도 바리스타는 뭐야?’ 말하던 시절에 이미 그는 우수한 품질의 생두를 찾아내기 위해 세계 곳곳을 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고, 30여 개국의 원두 산지를 탐사해왔다. 1997년에는 직접 커피를 로스팅할 수 있는 기계를 제작하기도 했는데, 집을 저당잡힐 만큼 어려움을 겪었던 그의 첫 발명품은 지금 세월의 흔적이 전해지는 기념비적인 물건이 되었다. 
사실 경제적 어려움보다 더 큰 문제는 커피를 대하는 사람들의 오해와 고정관념으로 점철된 사고를 바꾸는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인식들과 싸우느라 그는 끊임없이 생각해야 했다. 커피를 막걸리 들이키듯 후루룩 마셔버리고 자리를 뜨는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느낀 그는 어떻게 하면 커피 한 잔 속에 담긴 맑은 기운을 사람들이 만끽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자연스레 커피 전도사가 되었다. 그리고 고안해낸 것이 음악회였다.
그날그날 기온과 바람, 습도에 따라 선곡을 달리하며 창고에 누워 있는 생두 포대들과 함께 음악을 듣던 그는 손님들에게도 음악을 들려줘야겠다 싶어 1990년부터 연주자들을 무대에 세운 음악회를 <커피명가>
본점에서 열었고 매회 평균 60~70명이 참석했다. 요즘은 올해 초에 지은 생두 창고에서도 음악회와 음악이 있는 영화 시사회를 열기도 했다. 생두 창고 안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어선지 그동안 1천여 명이 창고 음악회에 다녀갔다.
커피를 맛보는 미각과 후각뿐만 아니라 청각과 시각의 세계도 열어주어 오감을 느끼게 하려는 그의 정성에 사람들은 하나둘씩 라 핀카 농장의 생두 창고를 찾는 고정회원이 되었다. 창고의 높다란 천정 아래 가지런히 놓인 생두 포대들은 마치 박물관 지하 수장고 같은 느낌이다. 그곳은 외부 환경에 민감한 생두에게 알맞은 조도와 온도를 유지해주면서 때로는 음악이 넘치고, 때로는 영화의 한 장면이 연출되는 새로운 공간으로 탈바꿈된다.

   
 
도서관에서 한 잔의 커피가 이끈 바리스타 1세대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면, 그는 유난히 호기심이 많고 생각이 많던 소년이었다. 학교에서 공부를 썩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또래보다 심한 사춘기를 겪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보다 인생이 무엇인지 고민했고, 혼자 산을 오르거나 여기저기 다니며 상상의 나래를 펴길 좋아했다. 그는 여전히 딴 세상에 사는 청년으로 성장했고, 그런 그에게 인생을 바꿀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대학 시절 도서관을 집 문턱 넘듯 다니며 책을 읽던 그를 눈여겨본 한 사서가 어느 날 그를 사서실로 불렀다. 사서는 청년 안명규에게 커피 한 잔을 직접 내려주었고, 그가 받아든 원두커피의 검은 물방울이 신기하게 비쳤다. 다방에서 프림과 설탕을 넣어 먹던 연갈색 달콤한 커피와 달리, 그의 손에 든 커피는 색다른 느낌을 준 것이다.
그때 처음 만난 원두커피의 경험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를 커피의 세계에 계속 살게 했다. 일본 서적을 공부하며 커피 공부에 매진하기도 한 그는 바리스타 1세대로 전국에 2백여 곳에서 창업 컨설팅도 했다. <커피명가>에서 그가 만들어내는 커피 맛은 이미 최고로 정평이 나 있다. 2004년도부터 경북학교 평생교육원에서 바리스타 양성 교육과정을 맡아오고 있는 그를 향해 아내 박명숙 씨는 ‘남편은 이미 세계 최고의 바리스타’이며 ‘커피명가의 원두는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남편에 대한 그녀의 신뢰는 무한대였다.
1990년대 커피 사업 초창기 시절, 다방 종업원 취급을 받기도 한 그는 담배연기 자욱한 곳에서 마시는 다방문화의 이미지를 벗어나, 커피 한 잔을 놓고 꿈을 얘기하고 밝은 사고를 할 수 있는 문화공간이 되도록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한때 그가 모 커피 광고에서 인스턴트 커피를 ‘최고의 맛’이라고 품평했던 것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비난을 듣기도 했지만 그의 본심은 달랐다.
“커피 광고를 찍을 때, 제품의 질에 대한 의견을 내기보다, 커피 그 자체를 생활 속 문화로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바리스타라는 직업을 꼭 넣어달라고 요청했죠. 당시엔 ‘바리스타’라는 단어를 아는 한국인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죠. 바리스타라는 직업도 널리 알려야겠다고 생각했기에 세간의 따가운 시선은 사실 문제되지 않았던 겁니다.”
그는 자연이 전해주는 최고의 선물을 발견한 농부처럼 커피에 대한 이야기로 행복해했다. 또한 커피를 나누어 마시며 호기심 가득한 소년처럼 커피가 있는 공간에 있는 그는 마냥 신이 나 보였다. 신기하게도 그가 건네준 커피의 향기는 그날 온종일 내 정신을 맑게 해주었다.

   
 
커피 한 잔에 죽고 커피 한 잔에 산다
지금은 그가 대학을 다니던 30년 전과 달리 대학생들이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다니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제 사람들은 식후에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여유를 즐기게 되었다. 그가 생전에 원하던 생활 속 커피 문화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핸드드립까지 직접 배우는 이들부터 전문가 뺨칠 만큼 사람들의 기호 수준은 높아졌고, 커피 원산지에 대한 상식 또한 풍부해졌다. 2005년 이후부터 지금껏 바리스타 자격증을 딴 사람만 해도 5만 명이 넘는다. 커피의 불모지에서 시작해 지금의 질적, 양적 성장을 목격한 그는 어떤 감회를 느낄까 궁금했다. 
“커피 산업의 발전과 좋은 커피를 찾는 애호가들의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단순히 원두커피라는 보통명사로 불리던 커피가 나라 이름, 농장 이름 등이 붙으면서 각각 제 이름을 찾기 시작했죠. 하지만 이런 성장 속에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죠. 2012년 이후 등록된 커피 전문점만 해도 1만 3천여 개가 넘어요. 사람들이 나를 커피 전문가라며 배우려고 찾아오는데, 문제는 단기간 내에 무언가를 성취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들은 바리스타라는 새로운 직업과 근사해 보이는 커피 전문점을 동경할 뿐, 열매를 맺기 위해 씨 뿌리고 물 주고 햇볕을 기다리는 시간은 염두에 두지 않아요. 바리스타 경력이 20년이 넘는 저 역시 바리스타는 하기 힘든 일이라고 생각해요.”
안명규 대표는 자신을 작업자라고 부른다. 작업자는 자신이 만든 커피를 손님이 마실 때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행복한 상상을 그치지 않는다. 그 한 잔 속에 사람들의 슬픔과 괴로움을 툭 털기를 바란다. 대자연의 선물을 모두와 나누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치 그의 소명인 것처럼.


글 | 김민영 기자   사진 | 홍수정 기자  

김민영 기자  gedichte@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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