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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뮤지컬계의 모험가,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집행위원장 이유리
김민영 기자 | 승인 2013.09.03 16:30

한 분야에서 장인정신을 발휘하며 오랫동안 롱런하는 이들이 있다. 뚜렷한 목표, 일을 끝까지 이뤄내는 성실함,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정신력, 무엇보다 그 일을 사랑하는 마음가짐이 오히려 꿈꾸는 자를 인도하여 결국 그 꿈을 성취하게 만든다. 꿈이 막연해 목표설정을 하지 못하고, 자기 관리를 하지 못하는 이들은 그 길을 가다가 결국 중도에 하차한다. 철저한 자기 관리로 무無의 환경에서 유有의 가치를 창출해내는 능력이 탁월한, 뮤지컬 프로듀서이자 교육자인 이유리 대구국제뮤지컬 페스티벌(이하 딤프DIMF) 집행위원장의 치열한 호흡법을 소개한다.

지난 6월 15일부터 7월 8일까지 국내 최대 뮤지컬 축제인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이하 딤프DIMF)이 21억 원의 예산, 2개월 기획, 24일간 7개의 극장에서 3개의 해외공연을 포함한 22개의 공연, 6개의 부대행사, 2개의 대규모 전야제와 폐막 쇼 어워즈까지 성공적으로 끝났다. 하지만 행사를 처음 시작할 당시 성공을 예측할 수 없었다.

   
 
모험가1, 국내 최대 규모 대구뮤지컬페스티벌 개최
큰 행사를 치러야 하는 페스티벌을 두 손 걷어붙이고 나선 이유리 집행위원장의 임기는
2년.  24일간의 일정을 위해 기꺼이 대구 범어동에 이삿짐을 옮긴 그녀다. 그런 이유리를 보고
‘왜 그렇게 어려운 시기에 대구로 가느냐?’ 하고 말리는 지인들도 많았다. 이유리 집행위원장은
‘어려운 시기이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딤프DIMF를 하러 갔다’고 말한다. 막상 딤프를 진행하려고 뚜껑을 열어보니 부채負債가 있었고, 직원도 없어서 다시 뽑아야 하는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준비 2개월 만에 행사를 치른 것이다. 
국민 뮤지컬 배우 남경주는 1997년 ‘남경주 굿바이뮤지컬 콘서트’에서 이유리 집행위원장을 처음 만났다. 그녀에 관해 ‘즉흥적으로 일하는 법이 없는, 철저한 준비자’라고 말하는 남경주는 특히 대구 국제뮤지컬페스티벌을 진행했던 이유리 집행위원장의 카리스마를 이렇게 해석한다.
 “딤프에 온 폭넓은 인맥만 봐도 알 수 있죠. 배우, 뮤지컬 관계자들이 다들 마다하지 않고 와서 도와줄 만큼 그녀는 뛰어난 친화력을 갖고 있어요. 자신이 해온 일들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죠.”
딤프의 심사위원장 윤호진도‘에너지가 넘치고 추진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그녀를 평가한다.

모험가2, 뮤지컬 여성프로듀서 1호
1964년생인 이유리(50세)는 19살, 아버지의 사업 부도로 대학 1학년 때부터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래서 부산 MBC 방송계에 뛰어들어 아르바이트를 했다.
20대의 그녀-대학을 졸업하고 MBC FM 방송의 DJ가 된 그녀가 하고 싶었던 것은 연극. 1986년 연희단 거리패의 창단 멤버로 연극계의 대부 이윤택의 <밀양 연극촌>에서 합숙 시스템의 스파르타식 연습을 하며
<히바쿠샤>에 첫 출연했던 그녀는 방송과 연극, 낮과 밤을 오가며 밤마다 배우로 무대 위에 올랐다. 하지만 당장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그녀에겐 미래가 보장된 방송국 일이‘네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는 내면적 물음을 떠오르게 했고, 오히려 생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게 했던 것이다. 길거리를 다니면 사인도 해달라는 요청을 받을 만큼 알려진 그녀. 방송일과 극단의 기획 일을 병행하다 끊임없이‘삶과 예술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고뇌하다 문득 20대 말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방송국 PD 한 사람은 혼사에도 도움이 되는 방송일을 왜 그만두느냐고 안타까워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이끌리어 모험을 하게 된다.  
30대 그녀-1989년 국내 최초로 동숭아트센터 설립 때 기획사업의 책임을 맡았다. 한 언론 기자는 1년 후 기획부장이 된 이유리의 초고속 승진(?)에 대해 “뭘 믿고 저렇게 당당하지? 오너의 딸이거나 엄청난 배경의 남편이 있는 줄 알았다.”고 고백했다고. 전문 기획단체가 없어서 극장 대관을 하기 위해  대본 심사까지 했던 그녀는 공과 사가 철저했다. 서른 살 초반의 어린 나이의 그녀는 결벽증(?)도 있어서 쉽게 사람을 만나지 않았지만 일처리 만큼은 분명했기에, 그녀의 얼굴과 이름을 다르게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그 당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도대체 동숭아트홀 기획부장의 실체가 뭐야?”이다. 30대에는 공연으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고민 또 고민했다.
‘뮤지컬 프로듀서’라는 명칭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 뮤지컬 여성 프로듀서 1호가 된 이유리는 <눈물의 여왕> <태풍> <페퍼민트> <겨울연가>등 한국의 창작 뮤지컬 기획자로 척박한 환경을 개척한 선구자가 되었다. 당시 외국의 경우에도 라이센스 공연이 성황리였지만 대한민국 장래를 본 이유리는 쉽지만은 않은 창작 뮤지컬 공연 기획에 뛰어들었다. 가수 겸 뮤지컬 프로듀서인 유열은 그런 그녀를 ‘모험가’라 부른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는 ‘감성적인 로맨티스트’라고 표현한다.
“그녀는 닥칠 어려움과 상처를 계산하지 않죠. 안전한 길만 갈 것 같이 이성적으로 비쳐지고 합리적인 사람 같지만 오히려 도전가요.”

   
 
모험가3, 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에 도전
이유리 집행위원장의 별명은 ‘자갈밭에 아스팔트를 까는 여자’이다. 새로운 일을 ‘셋업’ 하는 것에 평생 사명감을 느끼며 살아온 그녀다. 2004년 청강문화산업대학에서 뮤지컬연기전공학과를 개설해달라는 요청도 그래서 수락했다.
기획 책임자, 기획 감독, 공연기획사 대표, 뮤지컬 프로듀서 등 그녀에게 붙은 타이틀을 벗어던지고 그녀가 교육자로 새로운 환경을 선택한 이유는 2가지이다. 학교 측에서 제시한 ‘문화 특성화 대학으로, 공연 산업을 내걸었던 것’이 그녀의 마음에 들었다. 당시 학교 주변에는 약국이 하나 없으며, 셔틀 버스조차 다니지 않을 만큼 산골짝에 있었다. 이유리는 고민끝에 연습과 훈련이 중요한 뮤지컬 수업의 특성을 살려 전원 기숙사 생활을 제안했다. 외국의 경우에도 뮤지컬 트레이닝을 위해 산속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학교 교수들조차 학생들을 향해서는 ‘절대 안 되고, 안 바뀐다’는 관념이 강했다. ‘남녀를 합숙시키면 문제가 생긴다’는 기우를 꺾고 그녀는 10년간 무사고로, 학생들에게 뮤지컬의 세계에 흠뻑 몰입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녀는 패배주의가 심한 학생들의 관념을 깨뜨리기 위해 지극한 사랑과 관심을 쏟았다. 매해마다 신입생들에게 ‘너희는 기적이다’라고 말하며, 마인드 세팅을 새롭게 해나갔다. 학과 전학생이 아침 9시 반부터 시작되는 구보를 시작으로 저녁 10시까지 풀로 수업했고, 식사도 제때 못해 고등학생처럼 도시락을 먹기도 한다. 공연이 끝난 10시부터 새벽 1시까지 개인 연습을 하면 한눈 팔 사이 없이 피곤에 지친 학생들 모두가 곯아떨어지기 마련이다.
교육자가 천직이라는 이유리는 떡잎부터 알아보는 꿰뚫는 눈을 가져 주변 사람들을 다소 섬뜩(?)하게 만드는 혜안도 있었다.  뮤지컬 연출가 김규종은 2008년 작품 <하이스쿨 뮤지컬>로 이유리 집행위원장을 처음 만났다. 이미 그를 알고 있던 이유리는 2005년 여러 칼럼에서 그에 대한 가능성을 칭찬하기 시작했고 그 사실을 김규종은 후에 알게 된다. 뮤지컬을 연출하며 세간의 관심도 받았던 그지만 똑같은 퀄리티로 작품을 만들지 못한 적이 많았다고 고백한다.
“뮤지컬이 소모적인 소비형태 산업이라 눈에 띌 때는 그 사람을 찾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그녀는 한결같이 믿고, 기다리고, 가능성을 지켜보죠. 그런 점이 감동을 줍니다.”
뮤지컬 배우 고영빈도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정확하게 이야기해주고, 그 사람의 진가를 발휘할 수 있도록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준다.”고 말한다. “남들이 보고 말하는 뻔한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고, 스스로 잠재된 재능을 발굴해내 주시죠. 정체되지 않고 항상 꾸준히 공부하고 배움을 나누기를 좋아합니다. 제 인생의 세손가락 안에 드는 분이죠.”
이유리가 청강문화산업 교수로 재직 중일 때 특히 잊지 못하는 학생이 있었다. <모범생들>의 김성일 배우와의 에피소드. 그녀의 제자인 김성일은  멋진 외모와 철저한 자기 관리로 훌륭한 뮤지컬 배우가 될 수 있는 자질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같은 학년의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할 만큼 자기 세계가 강한 학생이었다. 결국 학교를 휴학하고 복학하는 과정에 이유리는 스승으로서 그를 유심히 살펴 그가 날개를 펼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었다. 새롭게 복학했을 때 그녀는 후배들과 함께 지내며 공연을 준비하게 된 김성일에게 6개월간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시켰다. 그가 순수하게 하는 이야기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잘난 척한다’고 비쳐져 남들에게 질투와 시기의 대상이 됐기 때문이었다. 스승 이유리의 이야기를 들은 김성일이 하루는 그녀에게 달려와 “교수님!”하고 외치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같은 학년의 친구들이 말조차 걸지 않던 그에게 처음으로
 ‘술 한잔 하자’는 제의를 했기 때문이다. 이유리는 제자들이 서로 어울리고 소통할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었고, 기다리는 법도 알게 해 주었다. 청강문화산업대학에서 이유리 교수가 키운 학생 중, 연극 <모범생들>에 출연 중인 김성일, 뮤지컬 <인당수 사랑가>의 배우 김희어라, 뮤지컬 <지저스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우지원이 있다.
 

모험가4, 불구덩이라도 들어간다
음악감독 장소영은 그녀에 대해 “정한 일에 대해 밀어붙이는 힘이 강하다”라고 말한다. 그녀는 하지만 “친분이 있다고 혜택을 주지 않고 이유리는 공과 사가 분명하다”고. 여성 특유의 섬세함으로 뮤지컬에 관한 어떤 회의와 논쟁에서도 “기분 나쁘지 않게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소통의 대왕”이라고도 표현한다.
외국의 뮤지컬은 텍스트부터 개발해서 성공적인 퍼포먼스 공연이 되기까지 10년이 걸린다. 한국은 1년 정도다. 급히 급조하듯 만들어져서 완성도가 약해도 상품이 시장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유리는‘창작뮤지컬이야말로 제대로 도전하면 외국의 라이센스 공연보다 훨씬 높은 수익을 창출할 수 있어 그 가치가 뛰어난 작업’이라고 말한다.
남은 세월동안 창작 뮤지컬을 활성화시키겠다는 가치관이 뚜렷한 그녀는 자신의 내면에서 들리는 원초적인 소리에 이끌려 살아왔다. 그곳이 설령 불구덩이라고 해도 뛰어들 태세였다. 그녀는 한국의 제작자들이 창작 뮤지컬을 꾸준히 만들 수 있는 터를 마련하기 위해,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간다.

 

글 | 김민영 기자   사진 | 홍수정 기자

김민영 기자  gedichte@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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