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대접 받은 플라스틱 컵을 보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몇 명이나 될까? 쉽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의외로 많지 않을 것이다. 당차게“아프리카 대학 교수!”라고 자기 꿈을 밝히는 김형섭 씨. 자신이 마음에 품은 꿈의 씨앗에 싹이 돋아 과목果木이 될 미래를 그리며, 오늘도 그는 공부에 몰두하고 있다.

 
 

김형섭
전문대 생으로 꿈이 없던 그가 아프리카 탄자니아로 해외봉사를 다녀온 후, 아프리카 교수의 꿈을 갖고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해서 한양대학교 금속재료공학과에 편입했다. 박사과정 1년 차로,발전해 있을 아프리카의 모습을 생각하며 즐겁게 공부하고 있다.
 

거대한 기계들과 온갖 공구·화학제품들이 가득한 금속재료공학과 실험실. 여기서 김형섭 씨는 금속세라믹복합재료와 태양전지를 연구하고 있다. 금속세라믹복합재료는 우주선 부품 이외에 생체재료에도 사용되기 때문에 개발도상국 사람들이 값싼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고 태양전지 또한 대체에너지로서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공부하는 이유가 동부 아프리카 탄자니아에 가서 대학교수가 되기 위해서라고 한다. 나아가 선진국과 개도국의 기술 교류를 위해 국제기구에서 기술 자문으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싶다는 그다. 
“제가 이런 꿈을 말하면 의외로 친구들이 부러워해요. 아직 꿈을 이루지 않았지만 여러 가지에 도전하며 열정을 가진 것도 신기해하더라고요.”

아프리카 탄자니아 해외봉사
그는 어떻게 남다른 꿈을 품게 됐을까? 그가 꿈의 씨앗을 품은 것은 2006년. 전문대 1학년인 그는 전공 수업시간에 강의실 맨 앞에 앉아서 교수님의 강의에 집중했다. 오로지 4년제 대학에 편입하기 위해서였다. 졸업하기 전 ‘한번은 어학연수를 다녀와야겠다’고 마음먹고 미국행을 생각했지만 우연히 아프리카로 해외봉사를 다녀온 단원들과의 만남에서‘젊은 날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 고생 한 번 해보자’고 생각하고 계획을 바꾸었다.
2007년 2월, 큰 포부를 가지고 탄자니아에 첫발을 내딛었을 때 ‘아뿔싸! 이곳에서 어떻게 살지?’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살인적인 더위와 부족한 음식, 비위생적인 환경, 그리고 끔찍한 벌레들! 그는 2주도 안 돼 한국의 집을 무척이나 그리워했다. 두 달이 지나자‘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하고 조금씩 적응이 됐다.
 태권도 유단자인 그는 아프리카 학생들을 위해 태권도 아카데미를 개설했다. 아카데미는 첫날부터 인기가 있었다. 동양무술을 배우고자 기웃거리는 수줍은 학생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면서 정도 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따뜻함에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한번은 무전배낭여행을 갔을 때 가난한 사람들이 동양인인 자신을 경계하지 않고 자기 집에 재워주고 밥을 챙겨주었다. 부족함 없는 집안에서 외동아들로 이기심만 가득했던 그는 가장 싫어했던 벌레들과도 친숙해졌다. 가난해도 가진 것을 나누고 살 줄 아는 탄자니아 사람들 덕에 6개월째가 되자 고향이 전혀 그립지 않았다. 

 
 

플라스틱 컵에 담은 뜨거운 차 한 잔
하루는 탄자니아 어느 가정에서 밀크티 한 잔을 대접받았다. 플라스틱 컵에 뜨거운 차를 담아 내오는 것을 보며, 환경공학을 전공한 그는 환경오염물질이 컵 안 가득 쏟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외에도 펌프에서 나오는 녹물을 마시거나 빨래를 하고 합성세제를 제대로 헹구지 않는 모습, 비닐과 각종 플라스틱을 아무렇지도 않게 소각시키는 모습을 보며 아프리카인들이 환경호르몬에 대해 굉장히 무지하단 걸 알았어요. 제게 사랑을 베풀어진 그곳 사람들의 수명이 짧아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하고 큰 충격을 받았죠. 그리고 결심했어요. 탄자니아의 교육부터 바꿔서 무엇이 위험한지 알려주고 싶었어요. 제대로 공부해서 박사학위까지 딴 다음 탄자니아로 돌아와야겠다고 다짐했어요.”

백지 답안지를 내고
귀국해서 곧바로 복학한 그는 편입준비에 돌입했다. 그가 지원한 금속재료공학과는 영어뿐만 아니라 수학까지 공부해야 돼서 공부양이 많았다. 수능에서 실패한 경험도 있어 예비합격 없이 합격과 불합격으로만 결정되는 시험결과에 대한 압박감을 느꼈다. 그 과정을 견뎌내고 그렇게 가고 싶었던 한양대에 합격통보를 받았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하지만 기쁨도 잠시, 개강 후 영어 원서로 된 교과서를 들고 3학년 전공수업에 들어갔을 때 그는 암담한 심정에 빠졌다. “수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서 첫 학기 중간고사에서 생애 처음으로 백지 답안지를 내고 나왔어요. 결과는 F 학점이었죠. 하지만 ‘아프리카에서도 살다 온 놈이 고작 이런 어려움으로 포기할 수는 없다’는 오기가 발동했죠. 졸업할 때까지 같은 과목을 계속 들어서 B+ 이상으로 성적을 올렸어요.”  

한국서 사귄 탄자니아 친구 힐롱가
4학년 1학기 때는 박사과정 중인 탄자니아 유학생 힐롱가를 알게 됐고, 오랜만에 스와힐리어로 대화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당시 넬슨만델라과학기술대학교가 탄자니아에 개교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한양대학교와 교류하고 있었다. 그는 바쁜 학업 중에도 힐롱가와 함께 교류과정에 필요한 서류 작성을 도우면서 꿈을 다시 한 번 각인시키는 계기를 맞았다.
“힐롱가가 박사학위를 받고 탄자니아에 개교한 그 대학교의 교수로 갔어요. 현재 탄자니아 출신 석사과정 학생이 3명 있는데 모두 그 대학 교수로 가기 위해 공부하고 있어요. 제가 탄자니아 교수를 꿈꿨는데 그 꿈이 이루어질 수 있는 정확한 루트를 찾은 거죠!”
대개 편입생은 수업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 졸업하기까지 3년이 걸린다. 하지만 꿈을 향한 열정으로 충만했던 그는 2년 만에 학사를 졸업하고 석사과정에 들어갔다.

 
 

석사활동 = 봉사활동
“석사 공부는 학사 때와 다르게 정말 재미있었어요. 처음에는 영어논문 한두 장 쓰기도 정말 힘들었던데, 이제는 초안을 쓸 수 있게 되고 공부에 몰두하다 보면 어느새 새벽이 밝아오는 것을 보면서 ‘해냈다’는 사실에 그렇게 뿌듯하고 기쁠 수가 없어요. ‘이것이 내 적성에 맞구나!’ 하는 짜릿함이 있어요.” 
석사과정을 밟는 동안 에리카공학봉사단으로 네팔에도 두 번 다녀왔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해발 1700m 고산지대에 태양전지판과 전봇대를 설치해 주는 봉사활동이었다. 네팔 정부는 자신들도 속수무책이던 발전장비를 한국학생들이 와서 설치해 준 사실에 무척 기뻐했다.
두 번째 갔을 때는 태양전지뿐만 아니라 풍력, 수력전지까지 설치해주었고 한국의 전통 온돌도 깔아주면서 아궁이의 효율적인 사용방법도 알렸다.
내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도심 곳곳에 쓰레기가 즐비했지만 과학캠프를 열어서 사람들에게 과학을 가르치는 봉사활동도 했다. 그는 꼭 아프리카로 해외봉사 갔던 시절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고 그때 하고 싶었던 일들을 네팔에서나마 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꿈을 가지고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

이제 그는 박사과정 1년 차다. 그가 다니는 한양대학교 대학원 교수님들은 ‘먼저 하고 싶은 것을 해라. 그러면 돈은 따라온다’라고 누누이 말하지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학생들은 거의 없다고 한다. 석박사 과정을 공부하는 이들 대부분은 대기업에 선임연구원으로 스카우트되어 안정되고 여유로운 삶을 누리길 원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아프리카 탄자니아로 가서 대학교수가 되겠다는 분명한 꿈이 있고, 오늘도 그 꿈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가고 있어 행복하다고 한다. 그리고 정확한 목표가 있기에 힘든 공부도 오히려 즐겁다. 이제 그는 지난날의 실패가 오히려 유쾌하게 느껴진다. 그 실패를 통해 자신의 꿈을 찾았기 때문이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사는 그의 모습이 더없이 행복해 보인다. 
 

글 | 전진영 기자  사진 | 배효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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