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에 기록한 탄자니아 일 년

노트 127쪽, 기록 168일.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해외봉사를 했던 이찬경 씨가 2012년 2월 5일부터 12월 25일까지 기록했던 일기장의 페이지와 그 날짜의 수다. 큰 행사를 치르거나 말라리아에 걸렸던 때를 제외하고 꼬박 일기를 썼다. 일기장에는 순간 느낀 아프리카의 생활과 감정들을 재치있게 글과 그림으로  표현됐다. 스물한 살의 청년이 담아놓은 아프리카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취재  | 전진영 기자   디자인 | 김진복 기자

 
 

“탄자니아 국경을 지났다. 탄자니아 풍경은 대단하다. 지평선까지 모두 초록색으로 나무와 풀들이 광활한 대지를 뒤덮고 있었다.”
-2012년 2월 5일 일기, 설레던 탄자니아의 첫날


이찬경 씨가 기대했던 아프리카는 드넓은 초원에서 원주민들과 대자연을 만끽하며 사는 삶이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한 탄자니아의 숙소 건물부터 그의 기대는 산산조각 났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고 냄새나고 쥐가 다니는 회색 부실공사 건물은 매우 좁고 더웠다고 회상한다. 게다가 탄자니아 일상 언어인 스와힐리어를 배우기 위해 탄자니아 대학교로 가서 대학생들에게 직접 물어보라는 봉사센터 지부장의 미션이 떨어졌을 때는 꼭 이렇게 언어를 배워야 할까 하는 불만이 생겼다. 영어도 익숙하지 않은 백인인(아프리카는 동양인도 백인) 그가 흑인 대학생에게 먼저 말 걸기란 자존심이 쉽게 용납하지 않았지만 어렵게 말을 걸었던 순간의 떨림을 지금도 기억한다. 하지만 의외로 아프리카 대학생들이 자세하게 문법과 단어들을 가르쳐주고 친구가 되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이후 탄자니아 시내에 갔을 때는 “피부가 정말 새카만 장애인들을 많이 봤어요. 새로 짓는 건물이 무척 많았고, 자동차는 일본 도요타가 가장 많았어요. 한국 차도 몇 대 보이더라고요. 버스 안에서 아이폰을 사용하는 사람 한 명 봤는데 휴대폰은 대부분 노키아를 사용했어요. 공기는 서울보다 안 좋은 것 같은데 에어컨과 환풍기는 LG가 많았어요.”라고 자신의 상상과 180도 다른 아프리카를 경험했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경험할 수 없는 일이다. 그저 카메라 하나 꺼내서 사진을 찍으려고 했을 뿐인데 아이들이 마구 뛰고 소리를 지르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한국에서는 월드컵에서 우승해야지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2012년 3월 28일 일기, 어린이 캠프를 진행하다

어린이 캠프 홍보 차, 학교와 거리로 가서 “맘보? 하바리 제누?
(안녕? 어떻게 지내?)”라고 아이들에게 말을 걸자 사방에서 100명의 아이들이 새카만 콩처럼 튀듯이 달려왔다. 100쌍의 까맣고 동그란 눈의 아이들이 보는 데서 초청했고 다음날 60명가량 모였다. 레크레이션 담당자인 그는 재료비가 들지 않는 게임으로만 캠프를 준비하다 보니 고민이 상당했다고. 대다수의 신발이 없는 아이들 때문에 신발 대신 돌을 던져서 동그라미 안에 넣기, 같은 팀원의 등에 있는 바구니 안으로 농구공을 한 번 튀겨서 넣기, 볼펜을 묶은 끈을 허리에 묶어서 엉덩이 밑에 있는 페트병에 볼펜 넣기 등 기발하고 재미있는 게임들을 고안해냈냈으며, 한 캠프 당 스무 개 이상의 게임들을 진행했다고 한다. 그가 바쁜 하루 일정 중에 겨우 시간을 내서 만든 게임으로, 어린 아이들이 기뻐하는 모습에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 위) 탄자니아 음베지 비치 근처 숲에서 동료들과 오랜만에 즐거운 한때.아래) 한 초등학교 앞에 그려진 지도에서 탄자니아를 발견했다.
▲ 위) 탄자니아 음베지 비치 근처 숲에서 동료들과 오랜만에 즐거운 한때.아래) 한 초등학교 앞에 그려진 지도에서 탄자니아를 발견했다.

“아침에 보통 4시 30분에 눈을 뜬다. 하지만 더 자고 6시 30분에 일어났는데, 이제는 바꿔봐야겠다. 잘 생각해보면 1년 중 잠을 자는 시간이 약 4개월이 된다. ‘탄자니아에서 4개월 동안 잠을 잤어요’라고 할 수는 없다!”
-2012년 5월 31일 일기

무척 부지런했지만 불평이 많았던 시간5월부터는 지역 봉사센터 바가라에서 혼자 지내면서 계속해서 다양한 어린이, 청소년캠프를 열었고 행사가 없을 때는 한국어 클래스를 진행했다. 그곳에서 한 흑인 부부와 그들의 아이들과 지냈는데, 봉사센터 운영을 하는 부부를 위해 그가 모든 집안일을 맡게 됐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날들이 많아서 일찍 잠들면 다음날 새벽에 제일 먼저 일어났다. 기상 후 마당을 쓸고, 톱밥으로 불을 피우고, 차 마실 물을 끓이고,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아침 식사 후에는 꼬마 블레스를 왕복 50분 걸려서 학교에 데려다주고 와서 설거지를 했다. 그리고 샤워하고 언어 공부하고 점심식사를 한 다음 밖으로 클래스 홍보를 나갔고 오후에는 한국어 클래스를 진행하고 저녁을 먹고 설거지하고 자유 시간을 보낸 다음 취침했다. 한국에서는 절대 살 수 없는 부지런한 하루였지만 끼니마다 짜파티 3장밖에 먹지 못하고 지내는 것은 그에게 한계였다. 때로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오해를 사기도 하면서‘내가 왜 이곳에 왔을까? 집안일 한다고 나에게 얻어지는 것이 무엇일까? 도망가고 싶다’고 일기장에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때 봉사센터 지부장이 했던 말이 그를 지탱해줬다고 한다.
“희생이 뭔지 알아? 희생은 자신의 실리를 포기하고 손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사는 것이 봉사며 희생이야.”

 
 

“도로를 걷고 있는데 맑은 하늘에 우리 두 사람의 걸음 소리가 가장 크게 들렸다. 간간히 나타나는 자동차들도 우리를 내팽개쳐두고 쌩쌩 지나가고 몇시간이 흘렀을까? 어떤 트럭 한 대가 우리 앞에 멈추더니 우리를 태워서 목적지 도두마까지 태워주었다.”
-2012년 7월 3일 일기, 무전여행을 가다

무거운 일기장을 가지고 갈 수 없어서 일기장의 빈 페이지를 찢어가지고 떠났던 무전여행. 1,200km 떨어진 도두마까지 그의 일행은 예상외로 하루 만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처음 만나서 사귄 친구 파울로가 자신의 집에서 지낼 수 있도록 했고 미션을 진행하는 그들을 위해 식사와 교통비를 해결하라며 1만 실링(한화 8천원)을 제공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파울로의 직업은 경비인데, 그의 3일치 일당이 1만 실링이라고 했다. 그런데 미션을 마치고 돌아가는 두 사람을 위해 파울로가 옆집에서까지 돈을 빌려서 두 사람의 차비 3만 실링을 마련해주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가난하게 살기 때문에 오로지 자신들 생계 이어나가는 것만 바쁘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은 전혀 없다고 생각했던 고정관념이 바뀌었고, 다시 한 번 희생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마음에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이 됐다. 그때 기록한 일기들을 일기장에 붙여 넣었다.
“얼마 만에 일기를 쓰는지 잘 모르겠다. 일기에서 9월 한 달은 하나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 이유는 말라리아 때문이다.” -2012년 10월 11일 일기, 2달간 말라리아로 비몽사몽
8월 28일에 영어캠프를 하던 중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일주일 후에야 말라리아에 걸린 것을 알았다. 약을 먹었지만 쉽사리 낫질 않고 점점 심해지더니 앞이 보이지 않았다. 자주 손과 발에도 마비증세가 찾아왔다. 몸 안의 혈액이 부족해서 나타나는 증세로, 아프리카에서 수혈을 받는 것은 위험했기 때문에 병원 처방보다 피가 생성되는 음식을 먹기로 결정했다. 낮은 괜찮지만 밤만 되면 오르는 열과 통증으로 약 두 달 동안 얼굴과 입술, 온 몸에 핏기 하나도 없이, 앞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지냈다. 이때 그가 진행하던 클래스에 참석했던 친구들이 피를 만들어 준다는 꽃과 과일, 음료수 등을 갖고 찾아왔다. 봉사센터에서도 그를 위해 귀한 미역국을 끓여줬다. 그동안 열악한 환경과 음식으로 고생하고 수많은 노가다와 행사, 클래스로 지친 그의 심신이 생기를 되찾게 된 계기된 때였다. 10월 22일에는 모든 말라리아 약을 다 복용했고 이후에는 눈도 조금씩 보였다.

 
 

“왁자지껄 거리던 아이들이 교실에 들어온 나를 보자마자 제자리에 돌아가 앉는다. 그리고 모두 다시 일어나 나에게 한 목소리로 인사한다. 그것은 깜짝 놀랄 정도로 큰 소리였다.”
-2012년 11월 6일 일기, 초등학교 수학선생님이 되다

말라리아에서 회복된 그가 이삭 프라이머리 스쿨의 수학선생님이 되어 오전 4시간씩 두 반을 가르쳤다. 문제를 풀 때 무조건 손을 들고 발표하려는 학생들이 무척 귀여웠다. 손을 들고 발표했는데 틀리면 주변의 학생들의 마구 놀렸다. 다른 학생이 손 들고“The answer is 9!”하고 답을 맞추면 “Oh, it’s good! give your clap.”하고 반 전체가 손뼉 쳐주고, “What is our answer?”하고 그가 물으면 “Our  answer is 9!”하고 반 전체가 합창했다. 여전히 그는 배고프고 몸은 피곤했지만 아프리카 햇빛처럼 쨍한 행복을 느꼈다.
모든 봉사일정을  마친 그가 지난 일 년 동안 어디든지 들고 다니며 썼던 일기장은 이제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보물이 됐다. <안네의 일기>가 한 소녀의 일기였지만 나치의 탄압과 유태인 학살 실정을 그대로 담아내어 세계 명작이 된 것처럼, 그의 일기장은 읽는 이로 하여금 마치 아프리카에 다녀온 것처럼 현지인의 문화와 모습들, 자신의 감정들이 생생하게 느끼도록 기록했던 수작이다.

“아프리카는 저에게 쓴 약이었어요. 봉사가 쉽지만은 않은 것을 경험했지만, 그런 시간 덕분에 제가 더욱 기쁘게 봉사활동하고 아프리카 사람들의 순수한 마음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거든요.”
그는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에 수놓인 기록들은 앞으로 그에게 어떤 어려움도 견디게 할 자양분이 될 것이다.

저작권자 © 데일리투머로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