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를 향해 무엇이든 경험하고 즐긴다

대학생활 동안 우리는 꿈꾸는 것이 많다. 해외여행, 유명인들과의 만남,봉사활동, 다양한 국제경험, 인턴 생활 등.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봉사하고 돌아온 후 정신없이 자신의 목표를 향해 뛰고 있는 김용희 씨는 대학시절 하고 싶은 것은 거의 다 해봤다고 한다.
그의 흥미진진한 6년간 대학생활 스토리를 소개한다.

글 | 전진영 기자   인물사진 | 홍수정 기자   
디자인 | 김현정 기자   장소제공 | Cafe BEANUS

 
 

건장한 체구에 까맣게 그을린 김용희 씨를 만났을 때 그가 어느 나라에서 봉사하고 왔는지 맞히는 것이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과 인접한 부르키나파소. 2008년 스물한 살이었던 그가 아프리카 가나에서 에어컨 버스를 타고 강한 태양과 모래바람을 맞으며 건조한 흙바닥 위를 달려서 도착한 나라였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2월부터 5월까지 가장 더운 시기에는 모기조차도 살아남지 못할 정도로 뜨겁고, 바닥도 벽도 한증막처럼 끓는 것 같아 기대어 잘 곳이라곤 없었다고 한다.

“제가 지금도 덩치가 크지만 그때는 110kg에 육박했어요. 그런데 1년 동안 말라리아 여섯 번, 장티푸스 네다섯 번 걸리고 나니까 체중계가 67kg을 가리키더라고요. 열심히 일해도 계속 아프니까 주변 사람과 상황들에 불평이 생겼어요. 그런 제 마음이 센터 지부장님께 들켜서 호되게 혼나면서 제 만족을 위해서만 살았던 제 자신을 반성했고, 정말 부르키나파소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했어요.”


큰 구멍 안에서 느낀 안타까움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부르키나파소의 열악함이었다. 바다가 없는 내륙국가라 기본적으로 발전할 만한 인프라가 심히 부족했다. 시골의 어느 마을에 갔을 때는 아이들이 커다랗게 뚫린 구멍 안에 들어가서 놀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알고 보니 그것이 프랑스 식민지 치하에 프랑스인들이 금을 채굴해간 자리였어요. 부존자원이 부족한 나라에 그나마 많던 금도 이제는 거의 없어요. 아이들이 그곳 모래들을 체로 쳐서 사금을 찾더라고요. 저한테 손톱 끝만한 사금 서너 조각을 자랑하는 것을 보면서 정말 가슴이 아팠어요. 그때부터 저개발 국가들이 발전할 수 있는 근간을 만들어 주기로 제 미래를 정했죠.” 

국제학을 전공한 그가 공부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백인들이 아프리카 호수의 어민들에게 배와 낚시기구, 어획기술을 전수해 주고 좋은 물고기들을 잡게 해서 돈을 벌고는, 물고기 씨가 마르자 떠나버리고 호수의 물고기를 잡고 살던 사람들은 삶의 기반을 잃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백인들끼리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했고 아프리카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기술발전 기반을 전혀 만들어주지 않았다는 사실들을 직접 확인한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 2011년 인도의 월드캠프에서 사회자로 섰고 그때 경험한 인도 대학생들의 순수한 열정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 2011년 인도의 월드캠프에서 사회자로 섰고 그때 경험한 인도 대학생들의 순수한 열정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조직을 운영하는 재미를 맛보다

고등학생 때 5개월 동안 교환학생으로 간 미국에서 영어를 익혔던 그는 불어를 익히고자 부르키나파소를 선택했지만, 불어뿐만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함께 얻고 귀국했다.
봉사단원들끼리 준비한 귀국발표회에서 서부 아프리카 공연 기획을 하다가 얼떨결에 주말마다 있는 발표회의 사회도 맡았다. 평일에는 ‘컬쳐Culture’라는, 대학생들끼리 준비하는 ‘서울랜드 세계문화박람회’ 기획팀에도 합류했다. 그 넓은 공간에서 하고 싶은 것은 많지만 당장 무엇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고 막막했던 때를 그는 오히려 즐기면서 하나씩 구상하고 실현해나갔다. 그렇게 귀국발표회의 공연진행과 행사의 사회, 대형규모의 박람회 행사진행을 맡아 조직을 운영하면서 박람회나 컨벤션의 기본 형태를 경험했고 이런 분야가 자신의 적성임을 직감했다.

대학생들끼리 직접 진행한 포럼

이때부터 ‘세계국립대학총장 문화예술교육 심포지엄’의 VIP 통역, ‘제1,2차 한-카리브 고위급포럼’의 장관전담 수행통역 등 여러 국제회의에 통역을 자원하며 경력을 쌓았고 2011년에는 대학생들끼리 직접 기획, 계획, 진행하는 ‘제1회 대학생리더스포럼’ 운영진에 합류했다.

컨퍼런스나 포럼이 어떻게 치러지는지도 제대로 모르던 대학생들이라 자신들이 열고자하는 대회 형식이 무엇인지 규정짓는 회의부터 가져야 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준비임원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고 체계적인 자료도 점차 갖추어지면서 결과적으로 200명 대학생들이 포럼에 참석했다. 대학생들끼리 ‘현대사회와 청소년 문제’에 대한 깊은 토론과 그 해결방안을 도출하는 과정이 꽤나 인상적이었고, 비슷한 시기에 진행된 ‘2011년 세계 청소년부 장관 포럼’에 참석하고 아프리카에서 온 청소년부 장관들과 청소년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장관들과 대화를 통해 전세계 청소년 문제에는 교육, 취업, 질병, 마약 등 다양한 하위문제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마음’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다음 해에 김용희 씨는 규모가 더 커진 ‘제2회 대학생리더스 포럼’을 준비했고, ‘2012년 세계 청소년부 장관 포럼’의 대학생 의전 팀의 매뉴얼을 짜고 기획했다.

“장관님들을 공항에서부터 수행할 때 장관님들 대부분이 자국에 대한 걱정이 많으시고 한국을 보면서 ‘우리나라는 언제 이렇게 되겠냐?’ 하는 감정을 내비치시더라고요. 의전을 하면서 장관님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한국의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우고 얻어 가시게 하기 위해 뒤에서 드러나지 않게 교통편과 식사, 숙박 모든 사항을 선발대로 먼저 가서 준비하고 진행했어요. 밤새 잠 못자고 운전해서 가고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터져서 정신없이 뛰어다니기도 했지만 아프리카 발전을 위해 작은 일이나마 하고 있다는 것에 기쁘고 감사했어요.”

 

트리플 A형의 도전 비결

그리고 2011년에 대학생 2,000여 명이 참석했던 인도 월드캠프와 3,000여 명이 참석했던 한국 월드캠프의 영어 사회자로도 발탁됐다. 자신만 비추는 무대 조명 아래서 모든 청중의 눈이 자신에게 쏠려 있을 때, 때로 다음 공연 시작이 지연되거나 당겨져 임기응변으로 대처해야 할 때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다리도 덜덜 떨렸다고.

“혈액형이 트리플 A형이라고 할 정도로 소심한 제가 이런 큰 행사들을 치고 나갈 수 있는 것은 부르키나파소에서 일주일 무전여행을 하고 얻은 경험 때문이에요. 300km 이상 종일 걷고 히치하이킹해서 쿠두구라는 마을에 도착해 정말 많은 미션들을 완료하고 돌아온 적이 있어요. 그런 열악한 곳에서 돈 한푼 없이도 해냈는데 풍족한 한국에서 무엇이든 못할까 싶어요. 처음에는 막막하지만 사람들과 의논하고 하나하나씩 이루어나가서 결국은 성황리에 행사를 마칠 것을 믿었을 때, 현재 부족한 것과 실수에 초연해지고 오히려 더 즐겁게 추진력이 생겨요. 실수해도 그 다음에 고치고 발전해 나가야 더 좋은 성과를 보거든요.”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 마음의 힘은 앞으로 이루어질 미래를 준비하고 또 목표한 자리에 앉기 위해 갖은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강인함도 발휘한다. 김용희 씨는 부르키나파소에서 약소국가들의 발전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꿈을 가졌다. 그 목표를 향한 그의 강인한 마음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다양한 일들을 추진하도록 했고 누구나 쉽게 할 수 없었던 국제경험과 국제적인 인맥도 쌓았다.

▲ 왼쪽) 가난하고 배고프게 사는 부르키나파소의 아이들이지만 그들의 밝은 미소는 그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였다. 오른쪽) 부르키나파소에서 가나 월드캠프를 도우러 갔을 때, 정병국 국회의원의 수행통역을 맡았다. 이후 정병국 의원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시절 열었던 출판기념 북콘서트에 참석했을 때 반갑게 그를 알아봐주고 인사를 나눴다.
▲ 왼쪽) 가난하고 배고프게 사는 부르키나파소의 아이들이지만 그들의 밝은 미소는 그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였다. 오른쪽) 부르키나파소에서 가나 월드캠프를 도우러 갔을 때, 정병국 국회의원의 수행통역을 맡았다. 이후 정병국 의원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시절 열었던 출판기념 북콘서트에 참석했을 때 반갑게 그를 알아봐주고 인사를 나눴다.


잊지 못한 경험을 준 인도와 아이티

그는 무엇보다 저개발국가를 다녀오는 것이 즐겁다고 한다. 월드캠프 영어사회자로 인도에 갔을 때,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아 푹푹 찌는 체육관 안에서 2,000여 명의 인도 학생들은 불평 한마디 없이 앉아 그 크고 맑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 바로 반응하고 대답하는 학생들의 목소리를 무대에서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호응해주는 관중은 처음이었다. 폐막식에서 마지막 멘트를 “여러분, 정말 즐거운 일주일이었습니다. 지금은 작별인사를 할 시간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내년에 다시 보길 바랍니다.”라고 마무리지었다. 이때 페이스북을 통해 많은 인도 친구들이 생겼고 그들의 안부인사와 “언제 인도 올 거야?” 하는 연락은 지금까지도 계속 된다고.

2012년 겨울방학에는 필리핀 봉사활동을 다녀왔고 2학기 중에는 의료봉사단의 통역 봉사로 아이티에 갔다. 솔직히 아프리카나 다른 후진국을 다녀왔지만 아이티처럼 불쌍하게 사는 사람들을 본적이 없었다고. 지진 후 몇 년이 지났지만 복구되지 않은 집들과 도로 등 심각한 환경 속에서 아이티 난민들은 전염병으로 고통하고 있었다. 한국의 유엔 평화유지군들을 비롯해서 여러 나라의 구호활동들이 계속 되고 있다고 하지만 과연 그들의 손길이 가장 필요한 곳에 닿고 있는지, 국제 구호의 한계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 갓 해외봉사를 다녀와서 귀국발표회 사회를 볼 때의 모습. 스물두살 그때는 지금보다 말랐지만 무엇이든 하고 싶어하는 열정은 더 컸다
▲ 갓 해외봉사를 다녀와서 귀국발표회 사회를 볼 때의 모습. 스물두살 그때는 지금보다 말랐지만 무엇이든 하고 싶어하는 열정은 더 컸다

 

아프리카를 향한 투자

아프리카는 차관 없이는 발전이 불가한 나라라고 한다. 선진국들로부터 차관을 계속 받기 위해서는 급하게 도로를 깔고, 공항을 짓는 등 가시적인 건설을 많이 한다. 그러나 그가 다녀온 부르키나파소와 가나는 도로 곳곳이 패여 운전하기가 위험했다고. 도로를 만드는 기초 공사 없이 무조건 아스팔트만 깔아서 도로상황을 더 악화시킨 것이다. 아프리카는 돈이 아닌 기술과 교육이 시급하며, 제대로 된 기술자와 전문가의 자문이 있어야 올바른 개발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저희 아버지예요. 올해 60세이신 아버지는 작년부터 아프리카 투자회사 ‘아프리카 인터내셔널’을 설립하고 20대 못지 않은 열정으로 직접 아프리카 국가들을 다니면서 일하셔요. 단순한 금전적인 투자를 떠나서 기술학교를 설립하고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십니다. 아버지처럼 일하고 싶어서 저도 통역, 봉사, 조직관리, 컨벤션기획 등 다양한 경력을 쌓고 있어요.”

때문에 올해 2월에는 한국남부발전소 해외사업부의 인턴직에 합격했으며, 6월 말부터 몽골에 가서 개발 사업 업무를 보조할 예정이다. 아울러 국가발전의 근간이 되는 발전소에 대한 기본들도 배울 것이라고 한다.


가장 두려워하는 것


그가 6년 전, 대학에 처음 입학할 때 세웠던 목표는 두 가지라고. 첫째는 외국어대에 입학하니까 한국어를 포함한 다섯 개의 언어를 마스터할 것. 둘째는 대학생으로 할 수 있는 것을 뭐든지 다 해보는 것. 첫째 목표는 아직 한국어, 영어, 불어 세 가지만 할 수 있기 때문에 몽골에 가서 한 가지 언어를 더 배울까 생각한다. 그리고 둘째 목표는 아주 잘 실행하고 있고 졸업이 늦어지긴 했지만 후회는 없다고 한다. 인턴을 마치면 남은 1년 반의 학기 동안에도 꾸준한 대외활동을 이어나갈 것이며, 졸업 후 국가 기반 발전에 도움이 되는 기술과 정보를 익힐 수 있는 회사에 취직하려고 한다. 그리고 몇 년 후에는 국제기구에 들어가서 저개발국들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기술부족과 사회 인프라 구축을 위해 직접 뛸 것을 꿈꾼다.

현재 그가 두려워하는 단 한 가지는, ‘취직하여 돈을 벌면서부터 누리는 경제적 안락함으로 대학시절 초심을 잃지 않을까’ 하는 것. 그런 고민을 하는 그야말로 진정한 글로벌 리더가 되는 출발점에 서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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