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송도의 연세대 국제캠퍼스에는 유엔의 지속가능발전 사업을 지원하기 위한 세계 최초 교육훈련 및 연구개발기관인 UN지속가능발전센터United Nations Office for Sustainable Development가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서 근무한 지 만 1년이 돼가는 김일애 씨는 선교사 부모님을 따라 아프리카로 건너가서 그곳 사람들과 똑같이 가난한 삶을 살고 피부로 가까이 느꼈던 경험들 때문에 지금의 일이 더 가치 있고 즐겁다고 말한다. 이제는 웃으면서 말할 수 있다는 그녀의 인생 스토리를 자세히 물었다.
글 | 전진영 기자   인물사진 | 배효지 기자    디자인 | 김현정 기자

 


 
 

현재 근무하고 있는 UN지속가능발전센터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주세요.
저희 기관은 유엔 사무국Secretariat 산하의 UN경제사회국DESA 소속으로, 전 세계 개발도상국들을 대상으로 환경 및 지속가능발전 분야에 대한 교육훈련 및 연구개발을 담당합니다. 반기문 사무총장님이 두 번째 임기가 시작할 때 가장 중요한 이슈로 강조하신 것이 ‘지속가능한 발전’이었습니다. 한국이 단 몇 십년 만에 신흥선진국으로 발전한 데다 친환경적으로 발전한 사례가 많아서 개도국에게 좋은 샘플이 되고 있어요. 그래서 한국 정부와 유엔이 협의해서 연세대 국제캠퍼스에서 출범했습니다. 사실 개도국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지도자들과 실무자들을 훈련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지식공유 및 역량강화knowledge sharing and capacity building라고 하는데요, 개도국 지도자들과 선진국 지도자들도 초대해서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지식격차 해소 및 이행역량 강화를 공유합니다. 따라서 대학이라는 기관 안의 시설들이 강의와 세미나, 토론에 적합하죠. 개도국 지도자들은 자국으로 돌아가서 배운 것들을 정치로 이행시킵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발전을 책임지는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겁니다.

어렸을 때부터 유엔에서 일하고 싶었던 꿈을 키웠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꿈을 갖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초등학교 4학년 때, 선교사인 부모님을 따라 온 가족이 아프리카 케냐로 갔습니다. 18년 동안 아프리카 사람들과 똑같은 집에서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은 물을 마시고 자라면서 의문이 굉장히 많았어요. ‘나는 저 까만 피부의 아이랑 똑같은 여자아이인데 왜 저 여자아이는 먹을 것도 없이 가난하게 살까? ’ 고등학교 때 TV 뉴스를 통해서 다양한 국제기구가 아프리카에 굉장히 많은 자원을 공급해주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아프리카 정치가 부패한 것은 물론, 유엔의 중간 역할을 하는 아프리카의 기구들까지 부패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내용을 봤어요. 제 주변에 몇백 원짜리 말라리아 약 하나 사지 못해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유엔과 현지인, 선진국과 후진국들을 연결해주는 중간다리 역할을 한다면 이 사람들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가장 큰 기구가 유엔이었고 그때부터 유엔에서 일하는 꿈을 키웠어요.

▲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의 한 초등학교에서 주말마다 한글을 가르칠 때.
▲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의 한 초등학교에서 주말마다 한글을 가르칠 때.

아프리카에서의 18년 동안 생활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겁니다. 아프리카의 비참한 삶을 어떻게 경험했나요?
선교활동이라는 자체가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부모님은 많은 돈을 가지고 좋은 집에 맛있는 음식 먹으면서 살길 원치 않으셔서 우리 가족은 아프리카 사람들이랑 똑같이 살았어요. 처음에는 부모님이 언어를 잘 모르셔서 여러 번 사기를 당하시는 바람에 케냐 수도에서 사는 4년 동안 1년에 이사를 두세 번 다닐 정도로 고생의 연속이었어요. 케냐의 시골 미고리라는 곳에 갔을 때는 말라리아나 장티푸스, 아메바 등 다양한 풍토병에 시달렸는데, 말라리아에 걸려서 거의 죽을 뻔한 적도 있었어요. 그곳에서 사춘기를 보내면서 왜 부모님은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삶을 포기하고 아프리카까지 와서 고생하며 사는지 불만이었죠. 학교에서는 외국인이라고, 백인인데 자동차나 자전거 없이 다닌다고, 거지선교사 가족이라며 무시당했어요. 집에서는 전기가 없으니까 새벽 4~5시에 일어나서 숯을 피워서 밥을 하고 오빠와 동생의 도시락을 쌌고 7시까지 학교에 뛰어갔어요. 저녁 6시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저녁을 준비하고 설거지, 저녁 예배가 끝나면 10시가 됐어요. 그때부터 촛불을 켜고 앉아서 12시, 1시까지 공부했어요. 학비가 없어서 학교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비자 문제 때문에 학교를 더 이상 다닐 수가 없어서, 총을 든 경찰들이 우리 교실에 들어와서 저를 끌고 나간 적도 있어요.
그런데 이런 좌절 속에서도 유엔에 취업하고 싶은 제 꿈이 더 애틋해지는 거예요. 아프리카 사람들이 겪는 아픔들을 저는 너무나 잘 알고 경험하면서 이 사실들을 세계에 알리고 또 세계가 이 사람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서 꼭 도와주길 바랐어요. 

▲ 지난해 반기문 사무총장이 한국을 방문하여 유엔 직원들과 미팅을 가진 후.
▲ 지난해 반기문 사무총장이 한국을 방문하여 유엔 직원들과 미팅을 가진 후.

아프리카의 삶이 유엔에 입사하는 과정에서 어떤 도움을 주었습니까?
우여곡절 끝에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대학교를 졸업하고 장학생이 되어 영국으로 가서 석사 공부를 했어요. 그리고 아프리카로 돌아와서 부모님의 선교활동을 도와드리면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유엔협회에서 러브콜을 받았죠. 그곳에서 1년 동안 프로그램 매니저로 일했어요. 유엔협회는 유엔과 같이 설립됐는데 현지 사람들이 유엔의 유익한 정책을 바르게 알고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단체거든요. 그리고 제가 영어와 아프리카 남동부쪽 언어인 스와힐리어를 자유자재로 통역하기 때문에 한국의 주요 정부부처에서 인사가 오면 한국 대사관에서 통역이나 사회자로 저를 불러줬어요. 한 번은 한국 환경부와 탄자니아 부통령실 간의 회의에서 통역을 맡았는데 성공적으로 회의가 끝났어요. 이후 탄자니아 정부가 한국으로 가서 환경부와 회의를 가질 때도 통역으로 제 이름이 추천됐고 그곳에서 통역하던 저는 바로 환경부에 채용됐어요. 환경부에서 몇 개월 동안 영어에 능통하고 국제기구도 이해하는 인재를 찾다가 저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런데 환경부에서 지시하는 일 중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에 관한 분야를 유엔과 같이 진행하게 됐습니다. 인천 송도에 UN지속가능발전센터를 출범시키는 과정에도 참여했고요. 해당 분야가 이제까지 제가 꼭 하고 싶었던 일이었기 때문에 직원 모집공고가 떴을 때 바로 지원했어요. 입사시험에서 면접관들로부터 ‘지원자격을 충족시키고도 남음Over qualified’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사무직으로 입사했습니다. 저는 ‘꼭 유엔에 취직해야지!’ 하고 노력한 것보다, 그저 제 앞에 있는 어려움들을 감사하게 여기고 그곳에서 일하며 희망을 가졌던 것뿐이었습니다. 덕분에 돈으로 감히 사지도 못하는 경험들을 했고 스와힐리어를 가장 능통하게 통역하는 사람이 됐으며 외국인으로서 아프리카 사람과 문화를 내 가족처럼 이해하게 됐어요. 이것이 유엔에 취업한 저의 가장 큰 무기가 아닐까요?

실제로 아프리카 경험을 업무에 어떻게 활용합니까?
저희 센터는 유엔 총회 등에서 결정된 지속가능발전 관련 이행의제와 관련된 교육훈련 및 연구개발 프로그램을 수행함으로써 환경보존과 지속가능발전에 관한 지식역량을 유엔 회원국 전체에 확산하는 임무를 갖고 있는데요. 이를 위해 역량강화 능력개발 워크숍이나 세미나를 열면 항상 제가 살았던 케냐와 탄자니아의 지도자들이 참석합니다. 저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당신 나라에는 도시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정책을 이렇게 한 번 바꿔보시면 어떨까요?” 하고 말을 걸면 놀라워합니다. 저는 그들이 어렸을 때와 똑같이 춤추고 딱딱한 옥수수와 콩을 먹고 자랐기 때문에 아프리카 실생활에 대한 추측이 아닌 정확한 사례를 가지고 제안하기 때문이지요.

▲ 지난 3월에 인천 하야트호텔에서 70개국의 지도자와 실무자들이 참석한 워크숍의 사회를 맡았다.
▲ 지난 3월에 인천 하야트호텔에서 70개국의 지도자와 실무자들이 참석한 워크숍의 사회를 맡았다.
유엔에서 근무한다고 해서 화려한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겉으로 멋을 추구하기보다, 몇 배로 과중되는 업무에 대해서 책임감 있게 일을 처리할 때가 많고 돈 씀씀이도 더 검소하죠. 국제 공무원으로서 전 세계 살림살이를 살아야 하기 때문에 항상 바빠요. 또한 최소 인원으로 최대한의 역량을 내야하기 때문에 직원들이 멀티 테스크로 일합니다. 유엔이 새 사람을 고용할 때도 이 사람을 고용했을 때 어떻게 다양한 영역에 윈-윈효과를 낼 수 있는지를 평가하고 채용하기 때문에 취업하기가 더 힘든 것 같아요. 저는 행정보좌와 예산, 인력 관리를 담당하는데요, 유엔예산의 1센트도 허투루 쓸 수가 없어요. 그래서 행사가 열리는 며칠 전부터 밤을 새면서 비행기 티케팅과 숙박 예약, 식사 접대 등 모든 예산과 스케줄을 가장 합리적으로 짜다 보면 온몸이 지칩니다. 하지만 아프리카에서 흑인뿐만 아니라 백인, 무슬림, 아랍인 등 다양한 식사문화와 생활방식을 겪었기 때문에 좀 더 고위급 지도자들에게 알맞은 대접을 하고 있어요. 많은 이들이 메일로 혹은  다음 회의에서 만났을 때 행사가 정말 좋았다고 칭찬을 해주십니다. 보통 70개국 이상의 지도자들이 참석한 주제별 회의가 며칠 씩 걸리거나 큰 포럼은 2주 이상 진행되기 때문에 그들을 제대로 접대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거든요. 그분들이 이곳에서 자국의 상황에 이득이 될 수 있는 정책 실무를 제대로 배워가야지만 새롭고 발전된 정치가 그 나라에 이식되기 때문입니다. 저희 센터가 중간자 역할로 참 중요하고 유익한 일을 하고 있죠.

아프리카 경험 이외에도 본인의 업무에서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는 남다른 비결은 무엇입니까?
‘이제 됐다’라는 생각이 들면 그때부터 여유를 즐기려는 제 모습을 봤어요. 한국에 오기 전에 제가 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어요. 머그잔 안에 마시다 만 커피를 그대로 두면 아무리 맛있는 주스를 담아서 마시고 싶어도 못 마시잖아요. 그때부터 저는 제 마음을 비우는 시간을 가졌어요. ‘이번 회의를 성공적으로 마쳤으니까 이제 이런 식으로 하자’가 아니라 ‘그렇다면 다음 회의는 또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했어요. 언제든지 상황이 바뀔 수 있기 때문에, 항상 초심자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비웁니다. 제가 나름 잘 했던 방법들을 믿지 않아요. 그렇게 비운 마음으로 정부 고위관리들과 직원들을 대하다 보면 제가 가진 진실성이 그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느낍니다.

김일애 씨는 개도국과 선진국을 잇는 중간자 역할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 아프리카의 척박한 환경에서 자랐던 그녀가 때로 쉴 틈 없는 업무에 지칠 때도 있지만 힘들지 않다. 그녀의 인생 스승인 부모님에게로부터 항상 따뜻한 조언과 격려가 담긴 문자 메시지를 받고 있으며, 아프리카를 향해 헌신적으로 사랑했던 마음도 이어받아 끊임없는 열정과 긍정으로 일한다. 단순히 아프리카 사람들의 복지 증진만이 아닌, 그들의 귀중한 생명만큼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그녀는 꾸준한 자기계발에도 힘쓰며 내일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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