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일보 대표 겸 인천 사회복지협의회 회장 한창원

 
 
 
 
행복한 인생을 사는 법을 일찌감치 터득한 한창원 회장.
     
 

그는 20대에는 야학 교사로 시간을 보냈다.
     
 

30, 40대에는 아동양육시설과 지적장애아동 보호시설 봉사에서
     
 

제 2의 기쁨을 찾았다. 인천 사회복지협의회 회장이 된 지금의 그는
50대임에도 청춘보다 더 활기차다. 봄 들판을 가득채운 야생초처럼
살가운 그가 주변과 더불어 사는 삶을 5월 청춘에게 소개한다.
     
 
     
 

어린 시절 빚을 남기고 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가난 속에 남겨진 가족들. 2남 1녀의 소년 한창원은 어

     
 
려운 가정 형편으로 중학교에 가지 못했다. 그는 야학에서 중고등학교 공부를 했다. 밤마다 인천 문학산은 높아 산을 넘어 집으로 오가는 길이 꽤 멀었다. 야학 교사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산 정상까지 소년을 바래다주곤 했다. 그는 세상에서 훌륭한 분은 야학 교사처럼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분을 진정한 스승으로 느꼈고, 자신도 꼭 야학교사가 되리라 다짐했다.

20대에 야학 교사가 되다
1983년 봄날, 소년이 성장하여 인천대학교 경영학과에 4년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청년 한창원은 당시 인천에서 가장 가난하기로 소문난 부평에서 청소년들을 위해 입시 야학을 처음 시작했다. 내성적이지만 규범이 강하고 열정적인 한창원. 그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야학으로 공부하던 학생들이 졸기라도 하면 엄격하게 혼을 냈다. 어느 날은 아이들이 하나둘씩 야학에 오지 않아서 그들을 찾아다니며 붙잡아 놓고 공부를 가르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공부시간에 자는 아이들이 이해가 안 됐어요. 힘들게 와서 왜 자느냐고 야단을 쳤죠. 한두 명씩 안 나와서 잡으러 가면서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유머 전집을 사서 읽기 시작했죠. 졸린 아이들에게 유머를 말해주면서 잠도 깨웠죠. 당시에 유행했던 유머는 ‘세상에서 가장 잘 자는 사람은 누구지?’라는 질문 같은 것이에요. 답은 ‘이미자’였어요. 당시 가수 이미자 선생님이 인기가 있어서 아이들도 재미있어했죠. 공부에 관심을 둘 수 있도록 빙고 게임도 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아이들에게 한 가지라도 더 가르쳐주려고 했어요.”
FM이었던 야학선생님은 개그맨 뺨칠 만큼 유머러스해졌고, 내성적이던 그의 성품이 밝고 활달한 성격으로 바뀌었다. 야학을 직접 운영하며 보람을 느낀 한창원 회장은 그때 함께했던 야학 선후배들과 오랫동안 친형제처럼 지낸다. 야학교실이 열악해서 연탄불 하나도 귀했다. 연탄 불씨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 사수했던 그 시절이 그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30대에는 고아원의 야학을 찾아갔다   
1990년대 들어와서 의무교육이 실시되자 형편이 어려워서 공부를 못하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그는 야학교실의 문을 닫고 아동양육시설 ‘향진원’의 인우야학과 인연을 맺고, 외부의 후원도 없이 대학 후배들과 함께 직접 야학을 운영했다. 향진원에서는 학원에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월요일, 목요일 밤에 공부를 가르쳤다.
대학생 때부터 시작한 야학은 어느덧 그에게 청량제 역할을 해주었다. 직장생활이 힘들 때도 향진원으로 갈 정도였다. 아이들과 있는 동안 스트레스도 풀리고 사는 맛도 났다. 외국계 회사에서 먼 곳으로 전근하게 된 날 고심 끝에 회사를 그만두기까지 했다.
야학에 각별한 애정을 가진 그는 야학을 통해 배움이 부족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삶이었다고 회상한다.

야학에서 고아원으로 가르치러 다니다 
기호일보 사원이 된 한창원 회장은 야학을 하기 위해 아침에 일찍 출근했고, 오후 5시가 되면 어김없이 야학 장소로 달려가곤 했다. 그는 아이들을 만나면서 즐거움까지 선물 받았다. 자신처럼 어려운 아이들을 돕고 그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이 삶의 원동력이자 보람이었기 때문이다.
“지적장애아동 보호시설 예림원에서 외출 프로그램을 하면서 한 아이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었어요. 그 모습을 목격한 한 지인이 자녀가 매우 아파서 안됐다며 미안해하더군요. 오히려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흐뭇했죠. 프로그램이 성공적으로 진행됐다는 생각을 하면서요.”
그는 예림원에 있는 아이들과 사회로의 외출을 꿈꿨고, 변변치 않은 봉사였지만 보람된 순간도 많았다. 사람들은 지적장애인들에 대해 편견이 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아이들, 손재주가 좋은 아이들을 많이 만났고 아이들을 칭찬하느라 시간이 모자랄 정도였다. 하지만 사회는 여전히 약자에 대한 보호시설이 미흡한 실정이다.
결혼까지 포기할 생각을 한 한창원 회장은 1980년대에는 동두천의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봉사를 하려고 생각했다. ‘너의 행복을 위해 너 하나 보고 산 나는 뭐냐?’고 만류하시던 어머니의 말씀에 38살 뒤늦은 나이에 결혼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자신에게 맞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어떤 것보다 불우한 아이들을 가르치고 돌아보는 게 즐겁고 행복했어요.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동안 해온 봉사가 좋은 부메랑이 되어서 나에게 돌아왔죠.”
봉사의 가치도 점수의 하나로 생각하는 시대가 된 것과 달리 봉사란 그에게 생활이요 삶이다.
“길을 지나다 문득 스마트폰에 눈이 꽂혀 화면만 보는 아이들을 볼 때가 있는데 참으로 안타까워요. 요즘 아이들에게 가족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아빠, 엄마, 형, 강아지가 전부라고 말해요.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이모, 고모는 이제 가족에 포함되지 않죠.”
조카들까지 손수 키워냈던 그로서는 요즘 해체된 가족을 보면 이 시대가 이기주의, 개인주의로 흘러가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고.

언론사 사장으로, 후원회장으로
한 회장은 2008년에 기호일보 사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기호일보 역시 지역의 아픔을 잘 담아내는 성숙한 신문으로 성장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지적장애아동들이 만든 상품도 무료로 홍보하는 등 지역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아이들을 위해 봉사하며 기쁨으로 산 그도 한번은 깊은 충격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향진원에서 퇴소한 한 아이가 빵집에서 적은 임금을 받고 일을 하다가 몇만 원의 돈을 훔친 사건이 발생했다.
“훔친 것은 너무 잘못했어요. 하지만 아이들이 적은 월급으로 방을 얻거나 생활하기에는 너무 역부족인 거예요. 견딜 수 없이 힘드니까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죠.”  
그는 그 사건으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이들에게 집이 있었다면 이렇게 방황했을까?’
그 길로 한 회장은 아이들을 위해 후원을 결성했다. 퇴소한 아이들이 자립할 때까지 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서 방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시를 쓰는 시인이 되어 
2013년 한창원 기호일보 사장은 인천 사회복지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됐다. 20년 넘게 봉사했지만 해야 할 일이 더욱 많아졌다. 그래서 아침잠이 많은 그도 5시면 어김없이 눈을 뜬다. 인터뷰하는 날도 아침부터 <전국 장애인 문학 공모전>에 축사를 하러 다녀왔단다.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자작시인 <부스럼>을 낭독했다.

부스럼

머릿속에 피어난
노오란 고름 꽃이
오늘도 아이를 눈물 짓게 했다.

바닷물 한 줌 퍼다가
어미는 아이의 머리를 슬픔으로 감겼다.

고름 속에 머물던 바닷물은
어미의 눈물이 되어 흐르고
아이의 절규는 단칸방 어둠속으로 숨어 버렸다.

페니실린 한 방울에
아픔을 잃은 그날
어미의 머리에 비녀가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
아이는 행복한 모습으로 어미의 꿈을 꾸었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릴 적 가난했던 아이는 부스럼이 많이 났다. 바닷가 근처에서 살았지만, 소금물도 귀한 시절, 어미는 아이를 바닷물로 머리 감겼다. 너무 따가운 나머지 머리를 감지 않으려고 도망다녔다는 아이의 이야기는 곧 한창원 회장의 어린 시절 이야기다. 한 회장은 어릴 적부터 지금껏 시를 써온 시인이기도 하다. 어려움을 시로 승화시키며 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시간을 살았다.
그날 하루에만 두 곳에 다니며 축사를 했는데 두 번째 행사인 후견인 세미나에서는 <전국 장애인 문학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40대 장애인 청년의 시를 낭독할만큼 시를 사랑한다. 지적장애아동들과 손글씨로 쓴 시를 단행본으로 만든 문집 또한 그에게는 소중한 자산이다. 한 회장이 펼쳐보이는 문집에는 그의 시도 담겨 있었다. 문집에는 지적장애아동들의 활동과 그날그날의 상황, 아이들의 변화 과정이 소식지에 담겨 정리되어 있었다.

사회봉사상으로 대통령 표창 수상
지난 2008년 그는 사회봉사 보건복지부상,  2010년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한 회장이 지향하는 삶이 사회적으로도 모범이 되어, 국가에서도 그에게 상을 수여했던 것. 그의 청렴한 삶이 세상에 알려졌다.
지금껏 세상 사람들이 봉사에 대해 편견을 갖고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는 동안 한 회장은 향진원과 예림원에서 봉사를 몸소 실천하며 살아온 인물이다. 그가 살아온 인생의 보람을 전해 들으면서 캠퍼스 청춘들에게 한 회장처럼 살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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