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여성병원 김소은 부원장

 
 
의약품 판매 데이터IMS에 따르면 응급피임약의 판매량이 급증해 2008년부터 2012년까지 5년 사이 52%가 늘었다고 한다. 20대 구매율이 가장 높은 가운데, 응급약을 일반 피임약으로 오인해 무분별한 성관계 후 복용하려는 경향이 보인다며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서울여성병원 김소은 부원장에게 성에 무지한 요즘 청소년들의 실태와 올바른 성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작년 ‘2012 세계 피임의 날’을 맞아 11개의 국제 NGO 단체가 아시아 여성을 대상으로 성경험에 대해 조사했는데, 그 결과 한국여성 100명의 첫 성경험 연령은 18~23세로 평균 21.5세인 것으로 나타났다. 요즘은 중학생들의 성경험도 부쩍 늘고 있는 추세라는데, 산부인과 경력 18년차인 김소은 부원장에게 요즘 젊은이들의 성의식 변화추세에 대해 물었다.
“점점 성병환자가 굉장히 많아지고 있어요. 문란한 성관계 때문이죠. 환자의 연령대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까지인데, 고등학생들도 상당수가 있어요. 한번은 18살 여학생이 진료하러 왔는데, 첫 경험을 언제 했는지 묻자 3년 전이라고 하는 거에요. 처음에는 너무 놀랐죠. 하지만 이제는 이런 일이 다반사라 놀라지도 않아요.”
그는 진료를 하다보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성의식 때문에  안타까울 때가 많다고 한다.

방치된 호기심이 나라 미래 망친다
이렇듯 미성년 시기에 성경험을 하는 원인은 신체 성장 속도가 빨라진 데다가 초중등학생 때부터 접하는 음란물 때문이라고 한다. 아이들의 호기심이 절제력을 이기지 못하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진료실에서  매번 이런 현실을 확인할 때면 우리나라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다고. 요즘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것도 한편으론 음란물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한다며, 특히 일찍부터 유해영상물과 게임에 빠지는 남학생들은 산만하고 집중도가 떨어지기에 학업에도 지장이 클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각 분야 인재들의 성비율에도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견해다.

임신 5개월까지 본인도 엄마도 모르는 현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문제는 부모와 자녀 간의 무관심이다. 그는 ‘요즘 사람들은 자녀가 누구를 사귀는지도 모르고, 무슨 생각을 하고 다니는지 전혀 모른다’는 현실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심지어 딸이 임신 5개월이 될 때까지 모르는 엄마도 있어요. 생리를 안 해서 진료를 받으러 왔다가 임신 사실을 알고는 엄마가 미치려고 해요. 이런 일이 딸에게 생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두지 않은 채 평소에 아이에게 관심이 없었던 엄마가 오히려 저는 놀랍더라고요.”
 자녀가 사귀는 사람이 있다면 나이를  불문하고 부모는 당연히 성관계 가능성까지 염두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부모 입장에서 속타는 심정을 토했다.

 
 

이른 나이 원치 않는 임신은 불행 초래
그가 더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마음의 준비도 안 된 10대, 20대 초반에 임신을 해서 아이를 낳은 경우다. 임신이 되면 보통 남성들은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기에 특히 여성에게 치명적이라고.
“10대 20대는 한창 공부하고 인생을 설계하고 자신의 꿈을 향해 도전하고 인생의 쓴맛도 맛보며 마음이 만들어지는 시기에요. 그래야 책임감도 생기고 엄마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어린 나이에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되면  아이에게도 불행이고 본인에게도 불행입니다. 2011년부터 낙태가 불법이라 요즘은 실력없는 의사나 무면허인 사람에게 불법시술을 받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학생들은 전혀 모르죠. 자궁은 아주 예민하기에 상처를 입으면 불임이 될 수 있어요.”

원나잇은 금물, 신중하게 사귀라
“요즘은 대학에 입학하면 신입생 스스로 성경험을 하는 것을 당연시해요. 보통 클럽 같은 곳이 함부로 아무하고나 재미삼아 저지르는 원나잇의 성관계가 난무하게 되는 곳이죠.” 
그런 문란한 성관계는 성병 감염 확률이 아주 높기에 남자나 여자 모두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자기 발전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3,4학년의 경우 결혼을 전제로 상대를 신중하게 대하며 사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봐요. 그래야 문란한 성관계를 지양하고 밝고 건강한 20대를 보내고 행복한 가정을 형성할 수 있어요.”

268마리의 회충을 제거한 아버지
그는 외과 의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의대에 진학했다. 특히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수술한 환자 이야기가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어느날 아침 몸이 아주 마르고 배만 빵빵하게 나온 한 할아버지가 거의 죽어가는 얼굴로 다급하게 병원에 오셨다. 수술을 하니 회충이 무려 268마리가 나왔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회충을 일일이 핀셋으로 잡아 양동이에 담으셨다. 수술을 마친  할아버지는 생기를 회복하고 건강하게 퇴원했다고 한다. 이런 일화를 들으면 끔찍한 사건의 하나로 여겼을 법한데, 그에게는 죽을 뻔한 사람이 의사의 손길로 생명을 얻는 경이로운 사건으로 강하게 뇌리에 남은 것이다.

초심을 잃고 힘들었던 의사생활
하지만 생명의 고귀함에 매료되어 지원했던 의대생활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유급제도가 있어서 서로 경쟁과 적대관계 속에서 정신병에 걸릴 것처럼 공부만 해야 했다. 전문의가 된 후 의사생활도 마찬가지였다. 의사의 소명은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병원 경영을 위한 장사꾼이나 다름없는 모습에 회의에 빠졌다. 의사라는 것이 때론 부끄러워서 떳떳하게 자신이 의사라는 것을 말하지 못한 적도 있다고 심정을 고백했다.

▲ 2010년 말라위 빈민촌 의료봉사 현장에서 진료하는 모습.
▲ 2010년 말라위 빈민촌 의료봉사 현장에서 진료하는 모습.

의사가 비로소 자랑스러워지다
하지만 그에게 커다란 전환점이 있었다. 바로 2008년 처음으로 갔던 아프리카 의료봉사다. 가나의 한 운동장에서 처음으로 진료를 보던 그날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아침부터 밀려오는 수백 명의 검은 피부의 사람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듯 강하게 나를 필요로 하는 눈빛에 놀랐다. 한국에서는 결코 느껴보지 못했던 의사로서의 존재감이었다. 의사라는 것이 그때 비로소 감사하고 자랑스러웠다고 한다. 중학교 2학년 때 느꼈던 고귀한 의사의 직분을 아프리카 가나에서 비로소 만나게 된 것이다.

부족하기 때문에 매년 가게 된다
“에이즈에 걸린 줄 알고 두려움 속에 살았던 부인이 검사 결과 에이즈가 아니라고 나왔어요. 그 자리에서 춤을 추고 펄펄 뛰면서 얼마나 기뻐하던지 몰라요. 토고에서는 영양실조로 죽어가던 아이가 극적으로 살아난 일도 있어요. 또 케냐 빈민촌에서는 기생충에 감염된 아이들이 왔는데, 그때 마침 약이 다 떨어진 거예요. 너무 안타까웠어요. 그들을 생각하면 다시 가지 않을 수 없죠. 항상 부족한 것이 많아서 더 잘해주고 싶어 가게 돼요.” 의료봉사에서 만난 환자들을 떠올리며 올해도 갈 준비를 해야한다는 그의 얼굴에는 금세 행복이 피어올랐다.

병원 열흘 비우는 손실도 감내하며
지난 4월 <중앙일보>에 대학병원 의사들의 열악한 진료 환경을 ‘30초 진료’와 ‘모니터 진료’로 표현한 기사가 났다. 아프리카 의료봉사에서는 보통 의사 한 명이 하루  평균 300여 명, 나흘 간 1천 명 이상을 진료한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숫자다. 하지만 의사나 환자 모두 불만보다 안타까움이 앞선다. 의사를 평생 한번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꿈이기 때문이고, 의사는 환자의 그런 마음을 전달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마다 열흘간 병원을 비우는 손실을 감내하면서도 그가 아프리카에 가는 이유는 명백하다.

성교육은 1대 1로 해야 한다
그는 의료봉사 이후 강의에도 초청받아 성교육 상담을  자주 하고 있다.  “강연을 하다보면 대학생들조차도 자궁이 어떻게 생겼고, 특징이 무엇인지, 배란이 무언지 전혀 몰라요. 다수를 향한 성교육은 한계가 있어요. 개인 상담 교사가 1대1 상담을 해줘야 해요. 그래야 학생들이 실질적으로 자신의 몸에 대해 소중히 생각하고 애정을 갖게 돼요.” 이미 음란물을 접한 학생들은 그게 성의 전부인 양 다 안다고 생각하기에 관심있게 듣는 학생이 거의 없는 것이 현 성교육의 문제점이라고 말한다.

진료를 통해 알게 되는 학생들 중에는 학업과 직장, 직장과 결혼 사이에서 갈등하며 개인 상담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면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는 말에 평범한 의사와 환자 관계를 넘어 온기가 느껴졌다.
아프리카에서 발견한 의사로서의 사명감이 한국의 진료에도 그대로 묻어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먼 지역에서도 병원을 찾는 환자가 있는 것이리라. 진료를 마친 시간대임에도 인터뷰 도중 상담을 요청하는 전화가 울렸다. 진료실 벽에 걸려있는 의료봉사 사진이 매일 그의 마음을 의사의 초심으로 상기시켜 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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