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국립무용단 단원 4년차인 김병조 씨.
그가 국립무용단 단원이 된 것은 그의 춤 실력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잘하려는 마음을 비웠을 때 사람들은 그에게
‘잘한다’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비움’의 마인드가
무엇인지 그의 연습실로 찾아가 물었다.

지난 4월 10일부터 5일간 공연되어 많은 화제를 일으킨 국립무용단의 ‘단壇’. 강단, 연단, 제단 등의 ‘단’을 뜻하는데 무용에서의 단은 인간의 신분, 종교, 권력을 상징한다. 과연 사람의 몸짓이 맞을까 의심이 들 만큼 부드러움과 강함, 절제와 활기 등 주제에 맞추어 감정을 잘 표현해낸 이들은 무언가 하나라도 타고 났을 것 같다. 선천적으로 뛰어난 음악성이나 예술성? 아니면, 성실함?
무용수 중 국립무용단 4년차 김병조 씨는 자신에게 뛰어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국립무용단 단원이 되었고, 교수라는 꿈을 향해 전력질주하고 있다. 그 꿈을 향해 가는 가장 쉽고 빠른 길이 겸손함이라는 것을 그는 대학생 때 미국에서 해외봉사를 하면서 배웠다.     

마음이 발레를 원하다
학창시절, 그는 공부를 잘 못했고, 그렇다고 어느 하나 잘하는 분야도 없었다. 아들을 대학에 보내고 싶으셨던 부모님은 당시 딸이 발레를 했기에 그도 무작정 발레 학원에 보냈다. 그러나 예민한 사춘기 소년으로서는 다리에 딱 붙는 발레 의상 하나 입는 것조차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민망한 의상도, 남자가 그런 걸 왜 하냐는 친구들의 놀림도 창피했다. 그가 발레를 그만두려고 마음을 접을 때였다. 갑자기 그의 귓가에 음악소리가 들렸고, 눈앞에는 자신이 발레하는 모습이 아른거렸다. 순간, 그는 자신의 마음이 발레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죽기 살기 식의 스파르타식 연습
할 수 있는 건 발레뿐이라는 결론을 낸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정식으로 발레를 했다. 예술 고등학교에 진학하기에는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실업계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발레 학원을 다녔다. 예술 고등학교의 무용과 학생들은 등교 때부터 시작해 하교 때까지 연습을 했다. 그렇기에 그는 예술학교 학생들에 비해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더 죽기 살기로 맞으면서 배웠다. 하루도 쉬지 않고 학교 수업이 끝나면 학원에 갔고, 하루 5~6시간 연습을 했다.
“발레는 1분 보여주는 것으로 대학입학 시험을 쳐요. 그 1분을 위해서 3년을 준비합니다. 그 1분에 얼마나 집약을 하겠습니까. 1분 춤추고 나면 숨이 너무 차서 물을 못 마실 정도예요. 한번은 뛰다가 구토를 했어요. 이제 선생님이 안 시키실 줄 알았는데, 눈 하나 깜짝 안 하시고 다시 해보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구토하고 힘이 다 빠진 상태에서 춤을 췄을 때, 제일 잘했다고 말씀하셨어요.”
잘하려는 마음에 몸에 힘이 들어가면 오히려 실수를 하게 된다. 그 일을 통해 그는 힘을 다 빼고 몸이 흐르는 대로 춤을 추면 춤이 자연스러워진다는 것을 배웠다. 무섭지만 제대로 된 춤을 가르치시는 선생님을 만났기에 그는 근성이 생겼고, 제대로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무용과 중에서는 입시 점수가 가장 높은 세종대학교 무용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1학년을 마친 후,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던 그는 휴학을 하고 최연소로 국립 발레단에 들어가 1년간 활동한다.

한국무용이 이어준 숙명적인 만남
그 후, 그는 군대를 다녀와서 극심한 슬럼프를 겪는다. 후배보다 실력도 뒤처졌고, 군대에 있는 동안 발레와 상관없는 근육이 생겨서 체형도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낙담하고 좌절해있을 때였다. 옆 교실인 한국무용실에서 굉장히 신나는 음악과 함께 울림이 들렸다.
“한국무용실은 활기차고 재미있어 보였어요. 관심이 생겼고, 종종 몰래 가서 연습하는 것을 구경했어요. 결국 한국무용으로 전공을 바꾸었죠.”
한국무용이 그의 숙명이었을까. 한국무용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또 다른 만남들이 이어진다. 부모님의 권유로 그는 국제청소년연합이 주최하는 호주 글로벌 캠프에 가게 된다. 호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는 한 대안학교 교장선생님의 사모님을 만난다. 그분과의 만남으로 대안학교 학생들과도 인연을 맺게 돼, 훗날 그들에게 무용을 가르치게 된다. 또한, 호주 글로벌 캠프에 이어서 5개월 뒤, 한국에서도 캠프가 열려 그곳에 참가하게 된다. 캠프에서 해외봉사를 다녀온 학생들과의 만남은 그를 예술의 거리 브로드웨이가 있는 미국 뉴욕으로 해외봉사를 지원하게 한다.

 
 

미국에서의 1년이 없었다면 나는 없었다
무용과는 남학생이 여학생에 비해 굉장히 소수이다. 남학생이 가장 많은 세종대학교도 그 비율이 1:9. 남녀가 듀엣 춤을 춰야하니 여학생들은 파트너 쟁탈전이 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남학생들에게 맛있는 것도 사주고 굉장히 잘해준다. 여학생들이 떠받들어주는 데다 무대에도 서니, 남학생들은 왕자병에 걸리게 된다.
김병조 씨도 왕자 대접 받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2006년 미국에 간 그는 180도 다른 생활을 해야 했다. 봉사도 해야 하고, 청소도 해야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듣기도 했다.
“미국 사람들은 상당히 개인적이고, 바쁘게 살아요. 뉴욕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면 ‘뭐야?’ 이런 식으로 많이 봐요. 영어도 잘 못하는 아시아인이 말을 거니까 무시하는 거죠.”
한글학교와 컴퓨터학교를 만들어 선생님도 되어 보고, 건물 보수공사도 하고, 댄스를 만들어서 여러 행사에 선보이기도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뜻 깊었던 때는 키 크고 콧대 높은 미국인에게 무시를 당해 본 순간이 아닐까. 김병조 씨 입장에서 보면 자신은 예술가이고, 같이 활동하는 단원들은 그냥 일반인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다 무시했는데, 막상 자신이 무시를 당하니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단원들은 무시를 받아도 넓은 마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 것을 보고 그는 자신을 깊이 반성하게 된다.
‘내가 잘난 사람이 아니구나. 저 친구들이 나보다 훨씬 낫구나.’ 
잘난 예술가 김병조 씨가 꼬깃꼬깃 구겨져 미국이라는 꽃밭에서 겸손하고 사랑받는 사람으로 다시 피어
났다.
“넓은 미국에서 무전여행을 하려면 히치하이킹을 해야 돼요. 미국에서는 생판 모르는 사람은 잘 태워주지 않아요. 게다가 당시에 총기 사건 같은 위험한 사건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저희에게 차도 태워주고, 용돈을 주신 적도 있어요. 굉장히 감사하고 행복한 추억이 많아요.” 
  
모든 것을 비웠기에 들어갈 수 있었던 국립무용단
예술인은 공통적으로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야 하는 창작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하고 예민하다. 김병조 씨 또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다른 사람들과 말도 잘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미국에서 사람들과 부딪쳐보고, 무시당해도 다가가 이야기를 걸어보면서 상대방을 한번 더 생각하는 여유가 생겼다. 왕자병도 다 나았다.
한국에 돌아온 후, 후배 해외봉사 단원들의 귀국발표회 준비를 돕고 있을 때였다. 3주간 합숙을 하고 있었는데, 그 기간 중에 국립무용단 오디션이 있었다.
국립무용단은 문화관광부 산하 무용단체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무용단이다. 소속 단원들은 공무원으로서 대우받고 춤출 수 있다. 그러니 들어오려고 하는 사람은 많고, 기존에 있었던 사람은 잘 나가려고 하지 않는다. 국립무용단은 짧게는 2~3년, 길게는 5년만에 단원을 뽑는다. 들어올 수 있는 문은 굉장히 좁은데 비해 경쟁률은 굉장히 높다.
“남들은 국립무용단에 들어가기 위해 3~4년 뼈 빠지게 준비해서 오디션을 봐요. 저는 귀국 발표회를 돕다가 잠시 오디션만 보고 돌아왔죠. 기대도 안 했어요.”
발표날도 잊어버리고 있던 어느 날, 합격을 통보하는 연락이 왔다. 함께 합숙 중이던 모든 학생들이 함께 기뻐서 축하해줬다고 한다.
무대에서 실수하면 안 되기에 완벽을 추구하는 무용수. 그러나 그는 미국에 다녀오면서 자신이 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수를 하더라도 관객이 잘 봐주면 좋은 공연이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무용에는 자유로움과 편안함이 서려있다. 심사위원이 그런 그의 마인드와 춤의 진가를 알아본 것이리라.

 
 

사랑받는 무용수

     
 

미국에서 돌아온 그는 1년을 더 휴학하고 2007년 한 해 댄스팀 라이처스스타즈 멤버로도 활동했다. 라이처스스타즈는 공연도 하지만, 무대에 서지 않을 때는 무대 설치, 스피커 쌓기, 의상 나르기 등 스태프 활동도 한다. 스태프를 해보았기에 그는 누구보다도 스태프의 노고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국립무용단 단원이 된 지금도 자연스럽게 스태프들의 노고를 알아주고 감사해 한다. 물론 그들도 무용수 김병조를 좋아한다.
     
 

사실 무용수들은 무대 위에서 최고가 아니면 안 되기에, 화려해보이지만 내면으로는 겸비하지 못하며 외로움을 탄다. 그러나 봉사하며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겸손함을 배운 그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을 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최고의 무용수가 아닌, 국립무용단에 들어간 자체가 감사한 무용수라는 마음으로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으며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그는 국립무용단 단원으로서뿐 아니라, 대학원 학생으로, 세종대학교 특강 강사로, 링컨하우스부천스쿨 무용 교사로, 아들 쌍둥이의 아빠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삶에서 희열과 행복을 느낀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무엇보다 중요하게 갖추어야할 마인드인 겸손함! 그 사실을 가르치는 교수가 될 그 날이 날마다 가까이 오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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