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으로 1년간 해외봉사 다녀온 이다혜

▲ 이화여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3학년 이다혜
▲ 이화여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3학년 이다혜
정확하게 일 년 만이다. 본지 2012년 2월호 인터뷰에서 해외봉사 워크샵을 마치고 진정한 봉사 마인드를 배우고 떠난다고 소개했던 이다혜 씨를 1년 뒤인 2월에 다시 만났다.
대만에서 해외봉사를 마치고 귀국한 그녀는 한층 더 성숙했다. 1년간 해외봉사는 분명 그녀에게 생활과 생각의 변화를 주었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그녀의 무엇이 변화되었는 자세히 소개한다.

그녀의 이름은 이다혜, 이화여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3학년에 다니던 그녀는 게임중독자였다. 집에서는 아무 말 없이 지내고 학교 친구들에게도 자신의 고민을 말할 수 없었던 그녀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요즘 대학생 자녀를 둔 부모의 고심은 바로 바쁜 일상과 가족간에 사라진 대화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녀를 오랜만에 봤는데 180도 달라진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특히 그녀의 얼굴에서 생기있게 변한 눈빛을 마주하자 그녀는 과거와 달리 서스럼없이 이야기도 곧잘 한다. 그녀의 두번째 달라진 모습이다.

습관적으로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이다혜는 직업군인인 아버지와 병원에서 근무하시는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서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자랐다. 하지만 부모님의 다툼으로 민감해진 초등학교 시절, 그녀는 싸우는 부모님이 미워서 밤마다 울었고, 언니는 혼만 내는 두려운 존재로 각인되면서 집안에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게 됐다. 나처럼 불행하고 슬픈 아이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10대를 보냈다.
철이 들면서 가끔 부모님이 힘들어하시는 마음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런 것에 대해서도 대화가 없었다. 오히려 ‘왜 그러느냐?’고 술을 마시고 물어보는 아버지 앞에 속마음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조용히 피할 뿐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게임, 처음에는 단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시작됐다. 그런데 점점 가상 속 게임에 빠져들었다. 클릭 한 번으로 단번에 사람을 죽이는 그런 게임인데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시원한 통쾌함이 있었다. 방학 때가 되면 하루 종일 혼자서 게임만 했다.
부모님이 퇴근해 돌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공부하는 척, 밥 먹은 척을 해서 게임 한 흔적을 완벽히 감췄다. 하루 종일 일하고 돌아오시는 부모님을 보면서 자책했지만 게임의 유혹을 끊을 수 없었다. 학교 다닐 때는 야간자율학습 때문에 게임 할 시간이 없어서 하지 못했고 학교를 일찍 마치는 시험기간에만 PC방에서 게임을 했다.
그래도 반에서는 1등, 전교에서는 10등 안팎으로 성적을 유지해서 부모님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그녀는 국군간호사관학교에 시험을 쳤지만 낙방이었다. 국군간호사관학교만 준비하던 그녀의 목표가 사라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 방황하다가 대학에 진학했다.

▲ 대만의 화창한 12월 어느날, 1년 동안 함께 활동했던 해외봉사단 동기들과 대만 지부장님 부부, 대만 원주민들,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추억으로 남길 사진을 찍었다.
▲ 대만의 화창한 12월 어느날, 1년 동안 함께 활동했던 해외봉사단 동기들과 대만 지부장님 부부, 대만 원주민들,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추억으로 남길 사진을 찍었다.
각오하고 다짐하기를 반복했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한 이다혜는 고등학교 때와 달리 스스로 수업을 정하고 공부해야 하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수업이 재미없는 것은 물론이고 친구도 잘 사귀지 못해서 학교를 가지 않는 날이 많았다. ‘다음 학기에는 잘해야지’ 하는 각오로 새 학기를 시작해도 또 후회했다. 방학만 되면 공부하려고 샀던 중국어 문제집도 쌓여가기만 할 뿐이었다. 학원을 다니면 삼 일을 겨우 다니다가 다시 환불받곤 했다. 어학연수로 중국에 다녀오기도 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매일 그렇게 후회하고 다짐하기를 반복했다. 자퇴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한 학기 휴학했을 때는 운전면허 학원과 아르바이트를 다니고 토익공부도 하면서 새로운 각오를 다짐했고, 다시 학교로 복학했다. 그러나 학교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데 한 번은 컴퓨터를 하다가 갑자기 뇌혈관이 수축돼 온 몸에 마비가 와서 쓰러지는 사건이 생겼다. 몸 한 쪽을 못 쓰게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이제껏 살아온 자신의 삶이 후회됐다. 할머니도 갑자기 돌아가셔서 인생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그녀는 대만으로, 언니는 아프리카 가나로 해외봉사를 떠나다
2011년 10월 그녀는 학교에서 포스터를 보고 해외봉사단을 지원한다. 1년 간의 긴 시간 동안 한국을 떠나 살 수 있다는 것에 큰 매력을 느낀 그녀는 대만을 지원했다. 학교 동아리, 대외활동 한 번 하지 않았던 그녀가 워크숍에서 자신의 속내를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고 놀랐다. 어느새 친구들과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좋았고, 자신이 얼마나 잘못된 마음을 품고 살았는지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워크숍에서 그녀를 인터뷰했을 때 한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마음은 원래 대화할 때 흐르도록 만들어져 있는데, 지금까지 마음의 문을 닫고 내 생각에 갇혀 살다보니 외롭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주변에 도움을 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책하면서 살았습니다. 내 생각과 다른 것은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아버지의 마음도 무시하고 살았어요. 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몰랐어요.”
특히 마인드 강연이 좋아서 언니에게도 해외봉사를 추천했고, 그녀는 대만으로 언니는 아프리카 가나로 굿뉴스코 해외봉사를 떠났다.

대만에서 시작
대만은 경제 수준이 한국만큼 발전돼 있고 날씨가 더운 나라에 속한다. 겨울은 한국의 가을 날씨와 비슷한데 패딩 점퍼와 장갑, 어그 부츠까지 신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인구의 98%가 이전부터 살아온 대만인과 1949년 국민당 정부와 이주해 온 대륙인들을 비롯한 중국 한족이다. 그리고 대만 섬의 원주민이 2%를 차지하는데 이들은 한족보다 더 큰 눈과 다른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으며, 대부분 외부에서 들어온 종족들에게 탄압을 받아 산으로 쫓겨났다. 그래서 평지에 사는 한족들에 비해 산에서 사는 원주민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가난하게 살아간다.
이다혜를 포함한 다섯 명의 단원들은 1년 동안 대만의 원주민들을 찾아다니면서 많은 활동을 했다. 처음 갔을 때는 중국어에 서툴기 때문에 한글반을 열어서 한국춤과 김치 담그는 법도 가르쳤다. 다른 지역에서는 공사 일손 돕기, 행사 도우미, 어린이 캠프 진행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춤과 노래를 좋아하는 원주민들을 위해서 여러 가지 공연도 많이 했다. 소년원에 방문해서는 운동회를 열어서 아이들과 열어주기도 하고 공연도 하고 마인드 교육도 했다.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산을 돌아다닐 때는 3,000m가 넘는 곳을 오르기도 했다.

원주민 친구, 메이팅!

▲ 원주민 후이린(좌)과 메이팅(우)은 나와 함께 살면서 가장 친하고 좋은 인생 선생님이 돼 주었다.
▲ 원주민 후이린(좌)과 메이팅(우)은 나와 함께 살면서 가장 친하고 좋은 인생 선생님이 돼 주었다.
메이팅은 이다혜가 가장 좋아하는 원주민 친구의 이름이다. 메이팅의 어머니는 술을 자주 마셨고 사람들과 싸우는 일이 잦아서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메이팅 세 자매를 고아원에 보내버렸고 메이팅은 언니 두 명에게 매일 엄한 교육을 받고 심하게 맞으면서 자랐다. 그래서 메이팅도 가족들을 미워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메이팅이 이다혜에게 “그래도 너는 너를 사랑하고 너를 위해서 항상 일을 하고 계시는 부모님이 계셔서 행복한 거야.”라고 말했다. 이다혜는 뒤통수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고 한다. 항상 부모님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부모님 때문에 이렇게 편하게 살아왔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모님 없이 고아로 살아가는 메이팅은 그녀가 스스로 불행하다고 살아왔던 잘못된 생각들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6월에 부모님이 4박 5일간 딸을 만나러 대만으로 오셨다. ‘왜 부모님이 오실까, 차라리 안 오셨으면 좋겠다’ 생각했지만 막상 부모님을 오랜만에 만났을 때 무척 신기하고 기뻤다. 자신이 봉사활동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드리면서 기뻐하는 부모님을 봤다. 대만 거리에 유명한 쩐주나이차(밀크티)를 마시고 야시장을 구경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딸이 낯선 나라에서 어떻게 살지 걱정되고 궁금해서 오셨던 부모님은 그렇게 딸과 만족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가셨다.

연극 <병신 어머니>
대만 사람들을 위해서 한국의 다양한 공연을 많이 선보였는데, 그 중에서도 <병신 어머니>라는 연극은 이다혜에게 가장 특별했던 경험이다. 그녀가 주인공 어머니를 맡은 것이다. 요즘 이렇게 희생하는 어머니가 있을까 싶어 처음에는 감정이입이 잘 되지 않았단다.
“한쪽 다리를 저는 어머니가 시장에서 나물을 팔고 있는데 아들 민식이는 그런 어머니를 여자 친구가 알까봐 조마조마 해요. 대학졸업식에 찾아온 어머니를 보고 ‘아줌마, 여기 왜 왔어요?’ 하고 무시하고 결혼식도 못 오게 하고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아요. 하지만 암에 걸린 어머니는 의사 아들이 개인병원을 열 수 있도록 돈을 마련하고 죽어요. 의사 아들이 어머니 병을 고쳐줄 수 있었는데도 말이죠.”
한두 번씩 연극을 하면서 한국에 계신 어머니가 생각났고 자신의 마음도 아파서 진심으로 눈물이 나왔다. 어머니가 혼자 무대에 남겨져 죽어가면서 아들을 찾을 때 관객 모두 숨죽여 눈물을 흘렸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아들 민식이가 오열할 때는 그녀 자신도 연기였지만 함께 울었다고 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는 또 없을 것 같아서였다. 이 연극을 통해 그녀는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 가까이 더듬어 볼 수 있었다. 희생없이는 아이를 키울 수 없다는 사실을! 그녀가 처음으로 부모님의 희생을 알게 되면서 행복을 깨달았다.

대만이 좋아서 눈물 흘렸다
대만에서 돌아올 때는 대만을 떠나기 싫어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한국에 와서는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부쩍 많아졌다. 아프리카를 다녀온 언니도 그녀에게 잘 대해주지 못한 점을 사과했다. 그녀는 이제 식사하면서 아버지와 대화한다. 그 마음을 어머니에게 다시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그녀는 부모님의 가장 사랑스러운 딸이 되었으며, 그렇게 고생하며 공부하던 중국어도 통번역 공부를 하고 중국관련 해외무역도 배우려고 한다. 그녀는 지난 1년간의 해외봉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어디에 있더라도 항상 내 가슴 속에 있을 대만의 친구들! 내가 행복한 사람이란 것을 알려줘서 고마워요. 사람의 맛을 알고 느끼게 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이제 나는 정말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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