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민, 가나 해외봉사 단원

지금 아니면 언제?

나는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대학에 입학했다. 화상으로 수업을 듣고, 사회적 거리두기로 학교에 가는 것도, 외출도 자유롭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대학 문화를 즐길 틈도, 친구를 사귀기도 어려웠다. 대학에 다니기 위해 20년간 살아온 고향을 떠나 경기도로 왔지만, 마음을 터놓을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무척이나 외로웠다. 점점 우울감에 빠져드는 나를 보며 엄마는 해외봉사를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하셨다. 하지만 정작 나는 가고 싶은 마음 반, 걱정하는 마음 반이었다. ‘해외봉사 기간이 1년이던데, 그 시간에 적응할 수 있을까?’, ‘음식은 잘 맞을까?’, ‘풍토병이 무섭다는데....’ 이런 걱정이 앞섰다. 나는 이 고민을 4년 전 잠비아로 해외 봉사를 다녀온 어느 선배 단원에게 물었고, 그분의 답변은 내 걱정을 한 방에 날려주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너의 인생에서 해외에 나가 봉사를 하고, 언어를 배울 수 있겠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지금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지금이기에 할 수 있는 값진 경험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아프리카 가나로 떠나게 되었다.

커다란 벽이 존재하던 곳

아프리카 대륙 서쪽, 적도 부근에 위치한 가나는 햇볕이 무척 뜨겁다. 일 년 중 두 달의 우기를 제외하곤 모든 날이 더웠다. 가나에서 처음 부딪힌 벽이 바로 날씨였다. 가나는 뜨겁고 습했기에, 밖에 조금만 서 있어도 피부가 빨갛게 그을리고 숨이 차올랐다. 물론 한국의 여름도 꽤 덥고 습하지만, 에어컨과 높은 빌딩이 있어서 더위를 피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가나에서의 삶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두 번째 벽은 바로 음식이었다. 가나 현지 음식 중에는 ‘반쿠’라는 음식이 있다. 반쿠는 카사바와 옥수숫가루를 반죽해서 만든 발효 음식이다. 내가 처음 접한 반쿠는 비주얼부터 냄새까지 최악이었다. 현지인들은 반쿠를 손으로 맛있게 먹는데, 나는 한 입을 겨우 먹고 더 이상 먹질 못했다. 그리고 가장 큰 벽은 바로 언어였다. 초등학교부터 배워온 영어지만 실전은 달랐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어떻게 영어로 바꿔야 할지 몰라서, 현지인과 대화할 때면 머리가 하얘졌다. 거기에 나의 심각한 한국식 영어 발음은 현지인들과의 거리를 더욱 벌려놓는 듯했다. 대망의 마지막 벽은 바로 내 ‘몸’이었다. 우리 집 특징 중 하나가 바로 ‘몸치’라는 것인데, 가나에서 유달리 춤출 일이 많았다. 한국 문화 댄스부터 시작해 K-pop까지 댄스를 보여줄 일도, 가르칠 일도 많았다. 지금껏 한 번도 댄스를 해본 적도 없었고, 한없이 뻣뻣한 나는 댄스 연습을 한다는 것 자체가 곤욕이었다. 동작 하나를 외우는 것도 더디고, 그마저도 로봇 같았다. 다행히 같이 간 다른 친구들의 도움과 현지인들의 응원으로 포기하지 않고 춤을 계속 출 수 있었다. 이렇게 현지인들과 함께 댄스를 배우고 웃고 떠들며 공연을 준비하면서, 단단하고 높은 벽이 점점 허물어지고 있었다.

함께 해외봉사를 떠난 친구들과 공연 준비를 하면서 찍은 사진이다. 몸치였던 내가 춤을 즐기기까지 많은 격려를 해준 친구들이 고맙다.(사진 맨 오른쪽) 사진@이주민 제공
함께 해외봉사를 떠난 친구들과 공연 준비를 하면서 찍은 사진이다. 몸치였던 내가 춤을 즐기기까지 많은 격려를 해준 친구들이 고맙다.(사진 맨 오른쪽) 사진@이주민 제공

따듯한 사람들을 만나다

가나에 적응해 가고 있을 무렵, 무전여행을 떠났다. 현지인 청년 한 명과 나는 한 팀을 이뤄서 1주일 동안 ‘수에두루’라는 지역으로 가야 했는데, 시작과 동시에 막막함이 몰려왔다. 차를 타야 하는데 돈은 없고, 아무도 우리를 차에 태워주지 않았다. 몇 시간 동안 뜨거운 햇볕 아래를 걸어야 했고 버스 터미널에 도착해 무료로 버스를 태워줄 수 있냐고 물었더니, 모두가 거절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걷고 기다리고, 걷고 기다리며 어렵게 수에두루에 도착했다. 고생만 잔뜩 한 것 같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끼니마다 밥도 잘 챙겨 먹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서툰 나의 영어 실력에도 사람들은 내 말을 귀담아들어 주었다. 신기했다. 차를 타야 한다는 생각에 그것만 신경 쓸 때는 고생스럽기만 했는데, 얻은 것들을 생각해보니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다. 

나는 그 여행을 통해 경찰관, 가나의 고등학생들, 할머니, 할아버지, 아이들 등 여러 사람을 만나 친구가 되었다. 1주일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처음 만난 사람과 웃고 떠들고, 삶의 어려움을 나누는 이 시간이 너무 행복했다. 그리고 나와 현지인 친구를 재워준 분들은 다들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편히 잘 수 있게 집을 내주고, 밥을 챙겨주셨다. 수에두루라는 지역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사용하고, 하루에도 여러 번 전기가 끊기는 곳이었는데, 어려운 살림 가운데 조금이라도 더 주고 싶고, 더 주지 못해 아쉬워하는 그들의 모습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내 마음 한쪽에 자리 잡았다.

언제나 환히 웃어주던 그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달간 ‘아킴오다’라는 지역을 가게 되었다. 그곳 역시 수도 시설이 없어서 하루에 한 번씩 우물에서 물을 길어 와야 했고, 학비가 없어서 학교에 다니지 못하거나, 동생을 돌봐야 하는 이유로 학업을 포기한 학생들이 많은 곳이었다. 그런데도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아무 조건 없이 나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끼니마다 따뜻한 밥을 주고, 따뜻한 방을 제공해주고, 혹시나 아플까 봐 깨끗한 물을 마시게 했다. 한 달간 같이 지내면서 내가 본 그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부족한 것을 나누고, 작은 것에 감사해했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얼굴에는 항상 환한 미소가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을 보며 내 모습이 비쳤다. 한국에서의 나는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기는커녕, 가지지 못한 것에 불평하며 살았다. 가나의 지부장님은 자주 우리에게 “너희는 한국에서 태어난 것만으로도 저들이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입고, 살아간다. 너희가 잘나서가 아니라 너희 부모님이 한국인이고, 이곳에서 너희가 백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아프리카 사람들은 너희를 좋아하고 아껴준다. 그러나 너희들은 그런 것들을 모르고 살아갈 때가 많다. 그걸 안다면 너희는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아프리카에 지내는 동안 그 말씀을 온몸으로 느끼며 지냈다.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혜택을 누리고 사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말이다. 

아킴오다 지역에서 한 달을 지내고 다시 가나 수도로 돌아가는 날, 함께 지낸 분들은 내게 “덕분에 너무 행복하고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라며 아프리카 전통의상을 선물로 주셨다. 아무것도 해드린 게 없는데, 너무 큰 선물을 받은 나는 감사함과 죄송함에 눈물이 났다. 하나라도 더 주고 싶은 그분들의 마음을 절실히 느끼며 돌아왔다.

가나에서는 평생 한번도 해보지 못한 경험도 많이 했지만 소중한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초등학교 학생들과도 만나고(사진 왼쪽), 대학생 친구들과 지부장님과 여행도 떠났다.(사진 오른쪽) 사진@이주민 제공
가나에서는 평생 한번도 해보지 못한 경험도 많이 했지만 소중한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초등학교 학생들과도 만나고(사진 왼쪽), 대학생 친구들과 지부장님과 여행도 떠났다.(사진 오른쪽) 사진@이주민 제공

벽을 허물다

가나에 있으면서 한 달에 한 번씩 캠프를 열었다. 한류 열풍은 아프리카도 예외가 아니었다. 싸이의 강남 스타일, BTS, 드라마 ‘오징어 게임’ 등을 통해 한국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코리아 캠프를 준비하며 K-POP, 한글 클래스, 오징어 게임을 활용한 레크리에이션, 태권도 클래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부채춤, 태권무, 문화 댄스 등 다채로운 공연도 준비했다.

우리는 매달 열리는 행사를 알리기 위해 전단지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홍보했다.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온다면서 전화번호를 적어주었지만, 처음 캠프가 열린 날, 단 한 명만이 참석했다. 그 순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올까?’ 하며 기대한 내 모습이 우스워 보이고, 힘이 빠졌다. ‘저 한 사람을 위해 우리가 공연해야 하나? 차라리 한 명도 오지 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부장님께서는 2000명이 앉아 있다고 생각하고 공연하라고 하셨다. 그렇게 한 명을 위한 공연을 했다. 캠프를 마치고 난 뒤, 우리는 다음 캠프를 준비하며 부족한 부분들을 보완해나갔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학생이 캠프에 참석했고, ‘한국 학생들이 준비한 캠프가 무척 좋다.’라는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 나중엔 새로운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이 왔다. 코리아 캠프를 준비하면서 프로그램 기획부터 공연, 진행을 다 같이 맡았다. 준비하는 동안 힘든 시간도 있었지만, 캠프에 온 새로운 사람들이 우리가 진행하는 다양한 클래스, 마인드 게임, 레크리에이션, 아카데미, 그리고 지부장님의 마인드 강연까지 참여하면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내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캠프가 끝나고 나면 참석한 학생들이 방긋 웃으며 “너무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었고 고맙다.”라는 말을 전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 내 마음에도 ‘와줘서 고맙다.’는 마음이 커졌다.

독립광장에 있는 독립문 앞에서 친구 프랑크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영국으로부터 1957년에 독립한 가나의 독립문에는 가나의 표어인 자유와 정의가 새겨져 있다. 사진@이주민 제공
독립광장에 있는 독립문 앞에서 친구 프랑크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영국으로부터 1957년에 독립한 가나의 독립문에는 가나의 표어인 자유와 정의가 새겨져 있다. 사진@이주민 제공

된다라는 생각으로

일 년간 아프리카에서 지내면서 어렵고 힘들 때도 있었지만, ‘왜 그런 사소한 일들에 힘들어했을까?’ 할 정도로 여겨지는 것들도 많다. 입에도 못 댔던 현지 음식 ‘반쿠’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나 음식 중 하나가 되었고, 뜨거워서 적응하기 어려웠던 날씨도 지내다 보니 어느새 적응해 있었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입도 벙긋 못했던 내가 나중에는 현지인 친구들과 영어로 대화하며 웃고 떠들고 있었다. 내가 생각할 땐 어렵고, 힘든 일들이 가나에서 지내는 동안 다 해결되었다. 거기에 언제나 행복한 가나 사람들에게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그렇게 나는 가나에서 한국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일들, 갖지 못할 마인드를 배우고 돌아왔다.

종종 지부장님이 해주신 말씀이 생각난다. ‘여러분들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여러분들이 어렵다고 생각하면 어렵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해외 봉사하러 가기 전에 작은 일도 뛰어넘지 못할 때가 많았다. ‘하필 내가 대학에 갈 때 코로나가 터져서, 친구들을 못 사귀어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라며 나의 환경을 비관하고 고립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그런데 가나를 다녀온 지금 그런 일들을 생각해보니,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늘도 나는 ‘안된다는 생각’, ‘어렵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아무것도 아니다.’, ‘된다’라는 생각으로 사소하지만 어려워 보이는 일들을 넘으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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