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교사 박지은

지금은 1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고등학생 때를 돌아보면 나의 아침은 언제나 전쟁 같았다. 엄마는 매일 내게 “밥 먹고 가거라!” 하셨고, 나는 그때마다 “시간이 없다고!”라며 되받아쳤다. 왜 그렇게 시간이 없었냐면, 눈뜨고 집 밖을 나설 때까지 화장과 머리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거울을 보며 외모를 가꾸느라 매일 아침 두 시간을 화장대에 앉아 있었다. 책가방에는 책과 필기구를 대신한 화장품과 작은 베개를 넣었다. 이 말은, 학교에서 공부하기보단 친구들과 외모와 관련된 이야기, 화장품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을 다 보내고 나머지 시간엔 책상에 엎드려 자기 바쁜 학생이었다.

이런 내가 대학생이 되었다. 고등학생 때보다 더 자유로워진 나는 더욱 외모 가꾸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가 가장 중요했기에, 용돈을 받으면 화장품과 옷을 사는 데 몽땅 털어 넣었다. 남들에게 예쁘다는 평가를 받고 싶었지만, 정작 나를 가장 잘 아는 엄마는 ‘너는 깡통이야. 속이 텅 빈 깡통!’이라고 하셨다. 엄마가 나에 대해 뭘 아냐고 무시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말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어느 순간 내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난 정말 빈 깡통 같아, 내 속엔 무엇이 들어 있는 거지?’ 난생처음 ‘나는 왜 사는 걸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었다. 

빈 깡통을 어떻게 채울까?

대학생이 되고 보니, 주변 친구들은 다들 대외활동을 하느라 바빴다. 방학이면 관심 있는 분야에 지원해 스펙을 쌓고, 어떤 친구는 어학연수를 떠나기도 하고, 누군가는 멀리 해외로 봉사활동을 떠나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무엇이 하고 싶지?’ 하며 고민했으나, 내 머릿속에는 물음표만 가득했다. 그러다 문득, ‘나도 해외봉사 가볼까? 내가 프랑스어를 전공하고 있으니까,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나라에 가면 내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 막연한 생각을 했다. 막연한 기대를 안고 해외봉사 워크숍을 찾게 된 나는 처음으로 ‘가봉’이란 나라를 알게 되었다. 중앙아프리카에 위치한 이곳은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해외봉사활동이 처음 시작되는 나라였다. 마치 나를 위해 준비된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가봉의 ‘첫’ 해외봉사단원이 되는 영예를 얻었다. 화장대에 앉아 얼굴만 들여다보던 내가 가봉을 어떻게 들여다볼지 나조차도 상상이 가지 않았지만,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가봉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나만 보던 내가 ‘남’을 볼 때

공항에 도착해서 가봉지부로 이동하는 차를 탔다. 한국에서 온 해외봉사단을 데리러 온 현지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차에 올라탔는데, 내 좌우에 앉은 그들의 팔이, 나의 팔과 대비를 이루었다. 유난히 하얗게 보이는 내 피부를 보며 ‘내가 이들과 섞여서 잘 지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가봉에 온 지 아직 한 달이 채 안되었을 때, 가봉 이토ITO 국립대학교 총장님의 호의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코리안 캠프를 열 수 있었다. 프랑스어도 서툴고, 그 나라의 관습이나 문화도 아직 잘 모르지만 무작정 시작했다. 나는 태권도나 댄스를 잘하는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할 줄 아는 게 많지 않았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게 한국어라서, 한글 수업을 담당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가르친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긴장감이 돌았지만,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좋아할까?’ 진지하게 고민하며 수업을 준비했다.

가봉의 대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있는 박지은 씨. 그녀는 이 시간을 통해 한글 가르치는 기쁨을 처음으로 느꼈다. 지금까지 한국어 교사를 계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사진 본인 제공.
가봉의 대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있는 박지은 씨. 그녀는 이 시간을 통해 한글 가르치는 기쁨을 처음으로 느꼈다. 지금까지 한국어 교사를 계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사진 본인 제공.

코리안 캠프를 다 마치고 난 뒤, 지부장님은 우리를 불러 모았다. “아카데미 프로그램에 대한 수강생들의 반응이 좋았다. 가봉의 학교를 모두 찾아다니며 해보자.”라고 하셨다. 그것을 계기로 우리는 직접 학교를 방문했고, 학교 책임자들을 만났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학생들에게 수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프랑스어도 잘 못하는 우리가 더듬거리며 하는 이야기를 유심히 들어주더니, 학생들을 가르쳐보라고 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한 사립초등학교에서 한국어 선생님으로 일하게 되었다. 수업 때 실수해도 웃어주는 아이들의 예쁜 미소는 나를 웃게 했고, 수업이 끝나면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며 나를 꼭 안아주는 아이들을 보면서 행복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한 자라도 놓칠까 봐 필기하는 학생들을 보며 밤새워 수업 준비를 하는 게 전혀 힘들지 않았다.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던 어느 날, 검게 그을린 내 피부를 보았다. 어느새 나는 모자를 쓰는 것도, 화장을 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내 겉모습을 꾸미는 것보다 가봉 사람들에게 가르쳐줄 수업 준비를 하는 게 더 즐거웠다.

가르치는 즐거움, 줄 수 있다는 기쁨

학생들을 가르치며 내가 가장 크게 느낀 것 중의 하나는 ‘수업을 시작하면 1시간이 1분처럼 지나간다.’라는 것이다. 그때 느꼈다. 돈을 많이 벌지 못하더라도 이런 일을 하며 살아야겠다고 말이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에 관심이 커져 영화 ‘말모이’를 보았다. 우리말과 글자를 지키기 위해 희생과 고문을 당하는 옛 선조들의 모습을 보며, 어렵게 지켜진 우리말을 널리 알리는 데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다.

2년 동안 가봉에서 해외봉사를 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무작정 교육청에 전화를 걸어 “한국어를 가르치고 싶다.”라고 말했다. 한국어 교육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조차 잘 모르던 나의 모습에 직원은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지만, 하나씩 안내를 해주었다. 그렇게 나는 프랑스어와 한국어교육을 복수 전공하며 대학에 다녔고, 졸업과 동시에 교육부에서 주최하는 파견 사업에 참여해 태국 고등학교에서 2년간 한국어를 가르칠 기회도 얻었다.

교육부에서 주최하는 파견 사업으로 태국에 간 박지은 씨는 2년간 태국 고등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지은 씨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사진 본인 제공.
교육부에서 주최하는 파견 사업으로 태국에 간 박지은 씨는 2년간 태국 고등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지은 씨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사진 본인 제공.

좋은 교사는 배움을 즐거움으로 만든다

태국에 가기 전부터 학생들과 함께 할 한국 문화 수업을 위해 여러 준비물을 챙겼다. 그곳에서 매시간 수업과 게임을 병행했고, 매달 한국어 퀴즈를 진행하고, 학생들을 위해 준비해간 선물을 주었다. 다양한 활동과 대회에 참여하며 보고서를 15장씩 쓸 정도로 바쁘게 지냈다.

그런데 한번은 수업 시간에 한 학생이 계속 휴대폰을 만졌다. 수업 시간에 한 번도 화를 내본 적이 없었지만, 그 순간 너무 화가 나 “휴대폰 내려놔”라고 소리쳤다. 학생은 “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 휴대폰을 만지기 시작했다.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겨우 추스르고 수업을 계속했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날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학생들을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이 학생은 왜 몰라주는 걸까?’ 싶었다. ‘담당 선생님께 이야기해야 하나? 아니면 수업에 못 들어오게 해야 하나?’ 여러 생각 끝에, ‘오히려 그 학생을 칭찬해주자!’ 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다음 시간부터 그 학생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그냥 대답해도 “발음이 정말 좋구나.”, “글씨를 잘 쓰네!”라고 말을 건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학생의 태도는 아주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내가 담당한 수업의 마지막 날, 그 학생은 나에게 “감사합니다.”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순간 많은 생각이 들었다. 잘하고 싶다는 마음에, 열심히 가르치는 것이 학생들을 위한 길이란 생각에 더 열심히 했다. 모두가 열심히 내 수업을 따라와 주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그럴수록 학생들은 지쳐가는 걸 놓치고 있었다.

그날 후로 힘을 빼보았다. 그러자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작은 숙제 하나에도 정성을 쏟는 아이들, 친구가 발표 중 실수해도 괜찮다고 함께 격려해주는 아이들, 서툰 한국어 실력이지만 일기에 자신의 어려운 이야기를 해주는 아이들, 대회에서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버스 안에서 한국 음악을 즐기며 춤을 추는 아이들이 보였다. 학생들의 모습 속에서 내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교육철학이 떠올랐다. ‘좋은 교사는 배움을 즐거움으로 만든다. A loving teacher makes learning a joy.’ 나는 배움을 즐거움으로 만들었는지 돌아보며, 여태껏 학생들이 나를 가르쳐준 것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글, 더 멀리 퍼트리기 위해

나는 현재 한국어 교육기관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다. 태국, 베트남, 파키스탄, 이탈리아, 인도,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우즈베키스탄 등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가르치는데, 한 번에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을 만나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그만큼 멀리 한국어를 전파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일을 할 때마다 보람차다.

최근에, 파키스탄에서 온 학생이 한국인 친구의 아버지를 만나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었다며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왔다. 그리고 가봉에서 2년 동안 지내다 보니, 프랑스에서 온 사람에게는 프랑스어로 수업을 한다. 태국에서도 2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이 있어서 태국 학생들에게 태국어로 수업하고 있다. 이런 나를 볼 때면, 예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 신기할 따름이다. 언어를 배우면 훨씬 더 많은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배워서 지금까지 태국어, 불어, 영어 등 언어를 꾸준히 공부하며 지내고 있다.

앞으로 어떤 학생들을 만나게 될지, 나는 학생들에게 무엇을 배울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가봉으로 떠나기 전보다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는 것을 안다.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 고민하며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바라볼 때보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을지 고민하고, 해줄 때 훨씬 행복하다. 나밖에 볼 줄 몰랐던 시각의 중심을 ‘타인’으로 옮겨 준 가봉, 여전히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두 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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