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꾸는 매거진 ‘투머로우’를 읽고 독후감을 쓰는 행사가 전국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 10월 23일에는 더체인지마인드 인성교육원이 주최하고, 옹달샘도서관에서 주관한 투머로우 독후감 공모전 시상식이 있었다. 

공모전은 투머로우 8,9월호에서 자유롭게 기사를 골라 읽고 2,000자 내외로 느낀 점을 쓰는 것이었다. 접수된 독후감들은 주제 파악 및 이해도, 삶에 찾아온 변화와 감동, 내용 전개 및 참신성, 문장 및 어휘의 정확성을 기준으로 심사를 거쳤다. 천등문학회장 이진호 박사, 대산문학작가회 안재헌 부회장, 한국블로그기자단 박경섭 대표, 문인협회 문은주, 뉴스엔넷 신문사 노곤채 대표가 심사를 해주었다. 

심사위원들은 투머로우 잡지가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가치와 공감대를 형성해주고 있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잡지를 읽길 바란다고 했다. 이번엔 1등과 2등 수상작을 소개한다. 

아버지 마음, 꺼내놓고 다시 받아들이기

1등 이정윤

투머로우 9월호에 실린 ‘삶을 바꾸는 의미부여’ 칼럼을 읽다가 ‘꽃밭에서’라는 동요가 6.25 전쟁 직후에 나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전쟁으로 아빠는 아이 곁에 없지만 ‘슬퍼하지 말고 꽃같이 살자’라며 아이의 마음에 희망과 행복을 심어주었다는 글을 읽으면서 아버지가 떠올랐다. 

투머로우 9월호에 실린 칼럼을 읽다가 아버지의 마음을 떠올리게 되었다.
투머로우 9월호에 실린 칼럼을 읽다가 아버지의 마음을 떠올리게 되었다.

어릴 적 아버지는 그야말로 ‘무서운 분’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나를 목욕탕에 데리고 가서 찰진 때도 말끔하게 밀어주시고 거기서 파는 사각 팩 ‘초코 우유’를 사 주셨지만, 나는 항상 따뜻한 아버지의 사랑에 목말라 있었다. 내성적인 나는 엄하신 아버지를 감당하기 어려웠고 때로는 두려워 떨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친구의 빚보증을 잘못 서서 집이 경매에 넘어간 것을 알았을 때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시장에서 밤낮 쉬지 않고 장사하면서 가정을 돌보는 어머니와 다르게, 아버지는 무책임해 보였기 때문이다. 내 가정보다 남을 더 중하게 여긴다고 속단한 나는 아버지를 향해 마음을 굳게 닫았다. 그 뒤로 아버지는 사업 실패와 연이은 교통사고로 여러 해 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고, 나중엔 운전기사, 병원 경비원, 주차관리원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가족을 위해 희생하셨다. 그럼에도 내 좁은 마음속에 아버지는 늘 ‘이기적인’ 분이었다. 

세월이 흘러 가장이 된 나는 절대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세상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사랑스런 두 아이들과 함께 나는 한없이 행복한 30대를 보냈다. 하지만 뇌출혈로 어머니가 쓰러지시자, 그 행복도 산산조각이 났다. 다행히 어머니는 의식을 되찾으셨으나 매년 큰 수술을 받아야 했고 의식불명의 시기가 반복되었다. 아버지는 몸이 불편해진 어머니를 극진히 간호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어느 때보다 두 분이 오붓하게 지내셨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추석 즈음, 아버지가 뜬금없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직장에서 건강검진을 했는데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하는구나. 일 마치고 다녀올게.” 그리고 며칠 후 전화를 주셨다. 

“아범아, 병원에 갔더니 간암이라고 하더구나.” 

아내와 나는 말을 꺼내면 그동안의 고통과 어려움이 모두 세상 밖으로 터져 나올 것 같아 침묵하며 병원 수속을 밟았다. 몇 번의 진료와 면담 그리고 치료 후에, 담당의사로부터 간암 말기지만 효과가 있는 약에 대해 듣게 되었다. 보험 적용을 받을 수 없어 일주일에 약값만 수백만 원이라는 말과 함께. 

아버지는 우리 부부에게 그동안 수고했다며 “괜찮다.”고 하셨다. 나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는 잘 알고 계셨다. 아들의 표정에서 묻어나는 마음을 이미 읽으신 것이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제서야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를 마음으로 만났다.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말기 환자인 아버지는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월의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장례 일정에 함께 동행하셨다. 어머니를 혼자 보낼 수 없다시면서…. 그 후에 아버지는 요양 병원에 입원하셨고, 침상에 누워계시면서 우리를 담담히 맞아주셨다. 그리고는 무엇이 그렇게 급하셨는지 아버지는 3개월 뒤에 어머니 곁으로 훌쩍 떠나가셨다.

나이가 들어도 부모님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랑의 방식과 깊이를 헤아린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더라도, 도무지 찾을 길이 없을 것 같아도, 아버지의 마음은 항상 그렇게 존재했음을 세월이 지난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아빠가 생각나면 꽃을 봐. 우리 꽃 같이 살자.’라는 글귀가 내 마음에 말할 수 없는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마치 아버지가 하늘나라에서 “괜찮아. 수고했어. 그리고 항상 나는 너를 사랑했단다. 그 말을 다하지 못해서 아쉬웠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대단한 인생을 살지는 못하셨어도 내게 아버지는 어느 누구보다도 훌륭한 그늘이었고 든든한 담이었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 나는 아쉬움과 한이 늘 남아 있었는데, ‘꺼내놓고 다시 받아들이라’는 필자의 말을 통해 그때는 알 수 없었던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한창 학창 시절을 보내고 있는 아이들이 자는 모습을 한 번씩 들여다본다. 아이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는 채근하기도 하고 그로 인해 서로 마음이 부대끼기도 한다. 아이들이 내 마음을 알아주면 좋겠다. 하지만 당장은 아니어도 괜찮다. 그래도 재촉하거나 조급해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의 사랑은 너무 넓고 깊어서 쉽게 찾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아버지 사랑합니다. 그리고 많이 그립습니다.

< 수상 소감 >

투머로우 독후감 공모전에 참가하면서,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미처 다다를 수 없던 아버지를 마음에서 만나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마음이 서로 연결되어 흐르면 슬픔이 행복으로 바뀔 수 있고,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다는 가르침을 깊이 새기는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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