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호부터 투머로우에 매달 글을 쓰고 있다. 고민 없이 편안하게 쓸 때가 있는가 하면, 내 속의 바닥까지 긁고 쓸어 담아야 겨우 쓸 때도 있었다. 교정을 봐 주는 우리 직원이 초고草稿를 읽고 활짝 웃으면 ‘통과’되지만, 말이 없거나 필요 이상으로 말이 길 때면 내용이 마음에 안든다는 뜻이어서, 나는 썼던 글을 버리고 다시 첫 문장부터 써 내려간다. 첫 관문을 지났다고 끝이 아니다. 다음에는 투머로우 편집팀이라는 두 번째 관문이 기다리고 있다.

7월호 글을 준비할 때였다. 우크라이나 대학생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온 세상 이슈였던 ‘난민’에 대하여 글을 썼다. 글을 다듬어서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자 하나가 왔다. “변호사님, 이번 글을 그대로 싣기엔 무리한 감이 있습니다. 방향 정립이 다시 되어야 한다고 감히 저는 말씀드립니다. 저녁에 다시 한 번 글을 보시면서 독자 입장에서 생각을 해주세요.” 투머로우 편집팀에서 나에게 보낸 문자다.

이상하다. 글을 쓰는 사람이 자기 글에 대해서 이런 지적을 받으면 불쾌해야 하는데, 나는 미소를 짓고 즐겁고 고마운 마음이 되어 바로 편집팀에 전화를 했다. 아무리 쉽게 쓴다고 했어도 법적인 관점이 강하기 때문에 독자들이 읽기에 낯설고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굳이 글의 성격을 따지자면 학술지에 어울릴 만했었다. ‘나도 전문직에 걸맞는 글을 잘 쓸 수 있어요.’라며 은근히 과시하려는 생각이 속에 있었는데, 편집팀에서 눈치를 챈 것이다. 통화를 했을 때, 나에게 이런 설명을 해주었다. 

“변호사님, 저희 투머로우는 가장 따뜻한 마음을 글에 담아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잡지입니다.” 그리고, 통화를 마치기 전에 한 마디를 더 했다. “이번에 써주신 원고는 <월간 법조>에 들어갈 법한 글입니다.” 내가 아무리 만족스러워도 독자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면 그 글은 멈춰야 하는데, 편집팀에서 그것을 도와준 것이다. 

글을 내 맘대로 쓰면, 다른 사람이 읽을 수 없다. 내 맘대로 쓴 글은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내 감정과 주관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객관적일 수 없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공감을 얻기는커녕, 나 자신에게도 이롭지 않다. 그때의 도움 덕분에 나는 좁은 식견에서 벗어나 다시 ‘사람’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글을 계속 쓸 수 있었고, 독자들도 나를 가족이나 아이들 이야기를 따뜻하게 글로 표현하는 사람으로 기억해 주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따뜻한 마음을 글로 드러내려면, 내 마음이 따뜻해야 한다. 감사하게도 나에게는 따뜻한 이야기가 많다. 내 인생 전체가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지난날들의 일들이 내 마음에는 따뜻한 것으로 남아 있다. 나는 다시 한 아내의 남편, 세 아이들의 아빠로 돌아가 내 가슴에 담겨 있는 ‘따뜻함’을 글로 풀어냈고, 글을 쓰는 나는 더 따뜻해지고 있다. 

하지만 ‘좋은 일 = 따뜻함’은 절대 아니다. 우리 가족도 힘든 일을 만날 때가 있다. 아니, 아주 많다. 그럴 때 나는 흥분하고 힘들어하고 억울해하는 대신(아니면 그렇게 하다가도), 조용히 눈을 감아 본다. ‘지금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게 정말 우리에게 좋지 않은 일일까?’ 나에게 좋은 일만 생기라는 법은 없다. 나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나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길 수 있으니, 어려움이 생긴 그 자체를 놓고 신음하는 것보다 어려움을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중요하다. 받아들이는 자세에 따라서 나와 우리 가족들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안다. 나는 ‘어려움’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아빠와 남편으로서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내가 할 일은 우리가 ‘어려움’ 속에 매몰되지 않고, 모두가 터널을 무사히 통과하는 것이고, 그때까지 어둠이 자리 잡지 않도록 가족들의 마음의 방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스위치를 켜서 불을 밝히는 것이다. 아이들이 실수나 잘못을 해도 나는 아빠이기 때문에 아이들을 내 품으로 끌어안는다. 끌어안은 상태에서 아이를 가르치고, 그동안 아이 마음에 잘못 그려져 있던 그림을 지우고 새로운 그림을 그려 넣는 일을 한 후, 기다린다. 아내가 때로 힘들어하면, 아내가 나한테 그러하듯이, 지금 아내가 경황이 없어 챙기지 못하는 것들을 말없이 내가 돌아보며 도와준다. 

그리고 혼자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할 수 있어서 옆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한 번씩 상기시켜 준다. 

이제 남은 건 내 방이다. 다른 가족들의 방을 돌아다닌 후 내 방에 들어오면 이상하게 불을 켜고 싶지 않다. 방문을 꼭 닫고 혼자 있고 싶다. 밝은 것보다 어두운 게 더 좋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나도 슬슬 지쳐가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그냥 운동화를 신고 밖에 나가서 헉헉거리며 뛰거나, 한두 시간 동안 산책을 한 다음 조용히 방에 들어와서 기도한다. 그러면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도 내 마음에서의 ‘문제’는 갈수록 작아진다. 삶에서 생기는 어려움보다 더 큰 위험은 마음이 어두워지는 것이고, 마음이 어두워지면 모든 것을 잃는다. 어려운 시간이 있어도 우리는 웃음을 잃지 않았고, 우리에겐 항상 ‘어려움 = 따뜻함’이 되었다. 

‘다시 쓸 것!’이라는 무언의 거절을 지금도 한 번씩 받는다. 그럴 때에는 간단하다. 다시 쓰면 된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뿐이지, 집을 다시 지으라는 것도 아닌데 특별히 힘들 것이 없다. 다시 써야 할 때는 반드시 다시 써야 한다. 아무리 심혈을 기울였더라도, 아무리 표현이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것을 쓰레기통으로 던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살면서 ‘다시 할 것!’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그렇게 하면 된다. 마음의 그림도 다시 그리면 된다.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잘못 쌓은 탑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12월을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달이라고 하지만, 12월은 ‘다시 쓰는’ 달이다. 12월은 마지막이 아니다. 11월과 다음 해 1월 사이에 있는 달이고, 다시 쓰는 시점은 얼마든지 우리가 정할 수 있다. 만일 여러분들이 이번 12월에 ‘다시 쓰기’를 한다면, 이달은 우리에게 첫 달이 될 것이다. 첫 달을 한 달 일찍 시작해 보자. 이렇게 쓰고 보니까 다음 달 1월호 글의 주제가 조금 걱정되기는 한다. 

글 박문택 변호사  

저작권자 © 데일리투머로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