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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인도에서 보낸 2350일
고은비 기자 | 승인 2022.11.21 09:58

인도에서 돌아온 지 벌써 두 달이 지났다. 몸은 한국에 와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인도에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곤 한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서울 도심을 다닐 때면 사람을 콩나물시루처럼 빽빽이 태우고 차 문은 절대 닫지 않는 인도 기차가, 철판을 덕지덕지 붙인 인도의 고물 버스가 떠오른다. 그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인도의 냄새와 분위기도 느껴지는 듯하다.

나는 16살에 인도 뭄바이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6년간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대학은 한국에서 가기로 정해 다시 인도 생활을 정리했다. 인도는 내게 ‘영어’와 ‘학교 졸업장’만 남겨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인도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고,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얻은 보물 같은 추억들을 지금부터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처음 보는 나에게 왜 이렇게 친절할까?’

어릴 적부터 나는 유난히 내성적이었다.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었고, 식당에서 메뉴를 주문하는 작은 일도 나에게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무엇을 하든 ‘내가 잘못하면 어떻게 하지? 나를 한심하게 보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들이 먼저 앞섰다. 답답한 내가 싫었고, 간절히 변하고 싶었을 때 친구가 인도로 유학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인도’라는 나라가 낯설었지만, 새로운 환경으로 떠나고 싶었기에 나도 유학을 결심했다. 다행히 부모님도 허락해주셨다.

그렇게 떠난 인도의 첫인상은 무척 강렬했다. 거리에서 심심치 않게 마주치는 ‘쥐’와 ‘소’. 어딜 가나 붐비는 사람들. 새벽이면 거리에서 수건 하나 걸치고 샤워하는 동네 아저씨들…. 색다른 광경에 신이 나기도 했지만 90%에 달하는 습도, 강한 향신료를 사용한 음식은 나를 힘겹게 했다. ‘여기서 잘 지낼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들 즈음이었다.

하굣길 버스 안에서 깜박 졸다가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치고 말았다. 그날 차비만 달랑 챙겨온 터라, 다시 돌아갈 방법이 없어 무척 난감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다가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는 아저씨에게 손을 들어 조심스레 도움을 요청했다. 아저씨는 얼른 뒤에 타라며, 뒷자리를 내주셨다. 내려야 했던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준 아저씨는 덥진 않았냐며 음료수까지 사주고 가셨다. 흙 도로에 검은 매연을 뿜어내는 낡은 오토바이를 탄 아저씨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처음 보는 나에게 왜 이렇게 친절할까?’

처음엔 그런 인도 사람들이 의아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느긋한 성격에, 장난기 많고, 또 누구에게나 오픈 마인드로 다가가는 그들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얻기 위해서’ 혹은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든 이유 없이 정답게 대하는 사람들 틈에 지내면서, 경직되어 있던 내 마음도 모두 풀어지고 말았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어느새 유학 생활의 즐거움이 되어 있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았던, 함께하는 즐거움은 더운 날씨와 향신료 강한 음식으로 인한 고충을 잊기에 충분했다.

위)짜파티와 치킨커리. 아래)요거트에 향신료를 넣어 만든 길거리 간식, 더히뿌리.

나도 몰랐던 ‘나’

유학 생활을 하면서 학교와 집을 오가며 공부만 하진 않았다. 엄마는 낯선 ‘인도’라는 땅으로 혼자 떠나는 내가 걱정스러우셨는지, 그곳의 지인에게 나를 잘 살펴달라는 부탁을 하셨다. 그분은 뭄바이에서 봉사단체를 운영하는 한국인이었고, 나는 그분을 ‘선생님’이라 불렀다. 시간이 날 때면 선생님을 따라 인도 이곳저곳을 다녔다. 오지의 빈민촌에 가보기도 하고, 뭄바이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높은 빌딩에도 가 보았다. 봉사를 위해 공연을 기획하기도 하고, 홍보 포스터를 만들기도 하고, 현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학교 다니는 것 외엔 해본 일이 없던 내게 ‘생전 처음’인 일들이 많았다. 예전 같았으면 매 순간이 고역이었을 텐데, 사람들과 만나고 대하는 일에 부담이 없어진 덕분에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이 싫지 않았다.

그래도 가장 부담스러웠던 일을 꼽으라면, 통역이었다. 처음 인도에 왔을 때 내 영어 실력은 형편없었다. 나름대로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내 수준이 다른 유학생들에 비해 현저히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좌절할 때도 많았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런 내 실력을 알면서도, 계속 통역을 시키셨다. 내가 못한다고 안한다고 하든 말든, 언제나 그 자리에 나를 두셨다.

어설픈 통역을 들을 인도 사람들에게 너무나 미안했던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선생님을 비롯해 현지인들을 찾아다니며 영어에 대해 묻고 또 물었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내다 보니 어느 순간 통역하는 실력이 불쑥 좋아졌다. 이를 계기로 번외의 일이었던 ‘봉사’가 내 삶에 ‘도전’이라는 단어를 심어주었다. 영어가 아닌 힌디어만 쓰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힌디어도 공부했고, 코로나 시기에는 영상 편집 프로그램, 심지어 메타버스 프로그램까지 알음알음 배웠다. 나는 스스로를 ‘잘못하면 어쩌지?’라고 걱정만 하는, 소심한 사람이라고 단정 지었었는데 인도는 내가 몰랐던 나의 모습을 하나씩 꺼내 주었다. (지금의 나는 확실히 ‘호기심’이 많은 대학생이다.)

1. 뭄바이의 랜드마크인 ‘게이트웨이 오브 인디아’ 앞에서.
2. 한국의 추석 기간 동안, 인도에서 문화교류 행사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작은 것에도 무척 즐거워하는 인도 사람들 덕분에 유쾌한 명절을 보냈다.

엄마가 내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

인도 사람들은 특히 가족을 중시해서, 삶이 가족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인도 친구들과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어쩌다 친구 부모님을 만나 뵐 때면, 멀리 계신 엄마 생각이 났다. 늦둥이임에도 나를 엄하게 키우셨던 엄마, 그리 여유롭지 않은 형편에도 나를 기꺼이 인도로 유학을 보내준 엄마….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나는 마음을 다잡곤 했다.

어느 날 한국에서 급한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해 위급하시다고 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버지가 깨어나지 못하시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되지? 엄마는 얼마나 놀라셨을까?’ 아버지가 의식이 없는 동안 나는 인도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며칠 후 아버지가 깨어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당장 한국에 돌아가 뭐라도 해야 하나… ’ 복잡한 생각이 스쳤다. 내 눈에 보이는 모든 상황은 절망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엄마로부터 전화가 왔다. “인철아, 엄마 아빠 잘 지내고 있단다. 의사 선생님이 그러시더라. 정말 심각한 사고였는데, 생명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 감사하다고. 그리고 매일 병원에 문병 와 주시고, 여러모로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아. 지금까지 엄마 인생에 어려움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때마다 소망을 주시는 분들이 곁에 계셨어. 엄마가 인철이를 인도로 보낼 때, 그곳 환경이 한국보다 열악하지만 마음이 순수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좋은 것들을 배우길 바랐단다. 여기 걱정하지 말고, 네 할 일이나 계속해라.” 엄마 목소리에 내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신 말이 내 귓전에 맴돌았다. ‘나는 계획을 잘 세워서 열심히 공부하고,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엄마는 내가 이곳에서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행복하기를 바라셨구나….’ 나는 ‘엄마’에게서 늘 강인하고 때론 무뚝뚝한 어른의 모습을 떠올렸는데, 그날 처음으로 엄마라는 한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었는지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그 길을 걸어오며, 아들인 내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고 싶어 하셨던 엄마의 사랑이 내 마음에 오래오래 남았다.

과거의 나는, ‘황인철’이라는 작은 세계 속에서 보고 느끼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인도는 그 너머에 있는 것들, 처음 느껴보는 것들을 하나둘 내게 선물해주었다. 타인과 마음을 나누는 기쁨을,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즐거움을,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리고 느끼는 법을 그리고 꿈도 말이다.

인도 시골 마을의 한적한 오후의 풍경은 언제 봐도 좋다. 우연히 들어선 마을에서 찍은 사진.

6년간 유학 생활을 하며, 학업 성적이 오르고 시험에 통과할 때도 좋았지만, 봉사활동을 하며 희망을 전할 때,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볼 때의 즐거움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지금, 나는 한국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있다. 틈틈이 인도에서 배웠던 영상과 디자인 분야 공부도 하면서, 한국에서도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10년 후, 지금 공부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둘 모여 어떤 모양을 만들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인도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처럼, 홀로 고립된 사람들에게 새로운 변화를 선물하는 일을 해보고 싶다. 오늘도, 그런 나의 꿈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가고 있다.

고은비 기자  press49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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