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나는 사랑스러운 둘째 딸을 낳았다. 내가 몸조리하는 동안, 친정엄마에게 첫째 아들을 부탁드렸다. 얼마 후,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지영아! 다른 애들은 야채, 고기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데, 예성이는 왜 이렇게 밥을 안 먹냐? 애가 너무 말랐어. 키도 작고. 네가 식습관을 잘못 잡은 것 아니야? 어릴 때 고기 이유식을 잘 안 만들어줘서 그런 거지? 예성이 보다가 내가 진이 빠지겠다….” 한참 동안 같은 내용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순간, 울컥하는 마음이 일었다. ‘나도 몸이 안 좋은데, 엄마는 꼭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해야 하나?’ 결국,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건성으로 대답하곤, 퉁명스럽게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내가 몸이 부서지더라도 첫째를 다시 데리고 와야겠어.” 그러자 남편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여보, 어머님 마음을 왜 그렇게 몰라? 한 번 더 생각해봐. 어머님이 왜 그런 이야기를 하시겠어? 사랑하는 손자가 못 먹는 게 속상해서 그러시는 거잖아.”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

남편의 말처럼, 엄마의 마음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엄마가 손자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지. 나도 어릴 적에 도통 잘 먹질 않아서 엄마가 애를 먹었는데, 손주도 마르고 체구도 작으니까 무척 속상하셨겠구나….’ 그제야 엄마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다.

그 후로는, 엄마가 내게 “예성이가 밥을 안 먹어서 너무 힘들다!”라고 하실 때면 그 말이 “지영아, 엄마가 너무 속상해. 예성이가 걱정이 돼서 밥 먹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잘 안 된다.”라고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니 자연스레 대답도 달라졌다.

“엄마, 그렇지? 예성이가 잘 못 먹어. 엄마가 잘 돌봐줘서 고마워요.”

한 달 뒤, 아이가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얼마나 잘 챙겨 먹였는지 아이가 살이 찌고, 건강해 보였다. 밥도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이 먹어 깜짝 놀랐다. 그리고 아이의 작은 가방 안에 어린이 영양제가 세 통이나 들어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손주가 좋아하는 반찬 만드는 데 온 마음을 쏟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아이와 씨름하며 밥을 먹이려 했을 엄마의 모습이, 유산균이며 칼슘이며 좋은 영양제를 챙겨 먹였을 엄마 모습이 그려졌다.

며칠 후,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예성이 간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너무 보고 싶다.” 역시, 엄마는 손주를 많이 사랑하고 있었다.

직장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가장 풀기 어려운 것이 사람들과의 ‘관계 문제’라고 한다. 우리가 살며 만나는 사람들의 성향은 다양하다. 음식에도 ‘겉바속촉(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겉촉속촉(겉도 촉촉하고 속도 촉촉한)’ ‘겉바속바(겉도 바삭하고 속도 바삭한)’ 등 다양한 특징을 가진 음식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자기감정을 여과 없이 표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정을 잘 억제하지만, 좀처럼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도 있다. 같은 직장 내에서도, 가족 안서도 구성원의 모습은 모두 다양하다. 성향이 같으면 서로를 이해하기 쉽지만, 성향이 다르면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더더욱 어렵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우리 삶 속에 ‘마음의 통역기’가 필요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겉으로 들리는 ‘말’만 듣지 않고, 한 번 더 깊이 생각해서 말 너머에 있는 ‘마음’을 들을 수 있는 통역기가 필요하다고 말이다.

하지만 솔직히, 요즘 나의 마음 통역기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을 때가 많다. 앞서 말한 것처럼 엄마의 마음뿐만 아니라, 남편의 마음도 잘 헤아리지 못할 때가 많다. 하지만 나처럼 통역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도 방법은 있다. 상대방에게 “나는 네 마음을 잘 모르겠어. 어떤 마음으로 그랬는지 알려줄 수 있어?”라고 직접 마음을 물어볼 수 있다. 또 다른 방법은 우리 남편처럼 마음을 들여다볼 줄 아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는 것이다. 이외에도 말로 하는 대화가 어렵다면 편지를 쓰거나, 선물을 전하는 방법도 좋다.

마음은 살아있는 것이기에 한 가지 ‘법칙’으로 모든 것이 다 통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신, 가장 중요한 건 ‘이것’이라 생각한다. 나와 다르고 거칠고 까칠한 사람을 만날 때에도 ‘저 사람과 마음으로 만나면 얼마나 기쁠까’하고 생각할 수 있는 마음. 즉,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기쁨을 아는 것이다. 

마음을 만나는 기쁨

몇 달 전, 해외에서 생활하시던 시어머님께서 병마가 깊어지셔서 한국으로 들어오셨다. 결혼한 지 4년이 넘었지만 시부모님께서 외국에 계속 지내셨기에, 함께 만난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다 같이 만나도 시어머님과 둘이 이야기하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올해 처음으로 시어머님과 나 그리고 첫째 아이가 2주간 시간을 함께 보냈다. 당시 나는 둘째를 임신해서 만삭이었고, 편찮으신 어머님께 해드릴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아 죄송한 마음이 컸다.

하루는 시어머님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평소 늘 우리 부부를 격려해주고 응원해주셔서 감사했던 마음을 그리고 며느리로서 더 잘 모시지 못해 죄송한 마음을 표현했다. 그러자 어머님은 오히려 “지영아, 내가 너 몸조리를 못 해줘서 오히려 미안하지. 내가 첫째도 못 봐줬잖니.”라고 말씀하셨다.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첫째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어머님 마음 한편에 늘 그런 마음을 갖고 계셨던 것이었다. ‘마냥 철없는 막내며느리로만 생각하실 줄 알았는데, 어머님은 나를 딸처럼 챙겨주고 싶으셨구나. 멀리서도 나를 생각하고 계셨구나…’ 편찮으신 와중에도 내게 전해주셨던 어머님의 마음이 내게 깊이 새겨졌다.

얼마 후, 어머님은 우리 곁을 멀리 떠나셨다. 지금도 어머님의 빈 자리가 크지만, 한편으론 며칠이라도 어머님과 함께 지내면서 그분의 마음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 감사하다. 만약 그때, 어머님께 내 마음을 표현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어머님의 마음을 영영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어린 아이들은 부모에게 자신의 마음을 자유롭게 모두 표현한다. 우리 첫째 아들도 잠들기 전, 매일 나에게 “엄마, 사랑해. 내가 제일 제일 사랑해.”라고 말한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아이든 어른이든 서로의 마음을 만나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바쁘다는 이유로, 부담스러워서 그런 행복한 순간들을 많이 놓치며 사는 건 아닐까?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겠지만 그중에 한두 명의 마음과 만날 수 있어도 삶에 큰 기쁨, 행복이 될 것이다. 우리 삶 속에 조금씩 그런 기쁨들이 쌓여가기를 바란다.

글쓴이 오지영

심리상담 전문 자유기고가. 중어중문학을 전공한 그는 어학연구소에서 중국어 교재를 편집했다. 후에 대학원에서 아동가족학을 전공했고 최근에는 자녀 교육 관련 심리상담 및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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