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글동글한 밤_양재은
가을이 되면, 유독 생각나는 제자가 있다. 내가 재직하고 있는 학교 운동장 주변에는 밤나무가 여러 그루 있다. 학생들은 쉬는 시간이면 여럿이 나와 떨어진 밤을 줍곤 한다. 밤을 보는 학생들의 눈은 반짝거린다. 그러다 큰 밤알 하나라도 찾으면 보물을 찾은 듯 기뻐한다. 나는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곤 했다. 어느 날, 한 아이가 내게 오더니 “선생님”하곤 아무 말 없이 손에 밤 세 알을 주고 갔다. 그러더니 조금 있다가 다시 와 “이게 큰 거예요.”라고 말하며 밤을 하나 더 주는 것이다. 내게 준 밤 크기가 작은 것이 마음에 쓰였던 모양이었다. 그 생각이 드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 아이는 한 해 전 우리 반 남학생이었다. 당시, 초보 교사였던 나는 그 학생의 뾰족한 말투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늘 고민하곤 했다. 마음을 열어보려 차분히 이야기해보아도 좀처럼 들어주지 않아서 속상했고, 크고 작은 말썽을 피우는 모습에 때론 지치기도 했었다. 그렇게 아쉬운 마음으로 헤어졌던 아이였다. 그런데 다음 해 스승의 날, 그 학생이 써준 편지에는 자신이 직접 지은 시가 적혀 있었다. “언제나 제가 잘되길 바라며 괴로우나 힘이 드나 정성을 다해 가르치시던 나의 선생님… 언제나 감사합니다.” 꼼꼼히 눌러쓴 그 아이의 편지를 보니, 내 마음을 받아주었던 것이 고맙고 한편 부끄럽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한 번, 밤송이에 서툴게 담아 전해준 순수한 마음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뾰족한 가시 안에 동글동글한 밤이 있듯 뾰족한 말에 가려있던 따뜻한 마음이 사랑스럽다.
고마운, 서 팀장님_이연아
나는 4년 차 직장인이다. 처음 입사했을 때, 내게 가장 큰 난제는 ‘팀장님’이었다. 팀장님은 사무실에서 가장 오래 근무하신 분으로, 국제행사 같은 큰 프로젝트도 척척 해내는 프로셨다. 나는 느린 성격 탓에 늘 팀장님에게 혼이 났다.
보고서를 제출하면, 언제나 그곳에는 빨간 줄이 덕지덕지 그어졌다. “일을 장난하듯이 하면 안 돼요!” 현장에 나가서도 지적받기 일쑤였다. 나는 팀장님 앞에 가면 늘 움츠러들었다. ‘팀장님은 날 싫어하실 거야’ ‘나를 멍청하다고 생각하시겠지?’ 일에 대한 자신감은 점점 떨어졌고, 출근하는 길이 무겁기만 했다.
그러던 중, 일본으로 출장을 갈 일이 있었다. 당일 아침, 사무실에 들러 팀장님에게 받아갈 서류가 있었다. 팀장님은 파일과 함께 작은 봉투를 건네셨다.
‘뭐지? 이런 서류가 있었나?’ 이동하는 길에 봉투를 열어보니, 포스트잇 한 장과 엔화가 들어 있었다. “잘 다녀와요. 시간이 없었을 것 같아서.” 전날까지 일을 마무리하느라 야근하는 나를 본 팀장님의 배려였다. ‘나를 팀의 일원으로 아껴주고 계시는구나….’ 첫 해외 출장을 앞두고 긴장했던 마음, 오랜 야근으로 지칠 대로 지친 마음이 어느새 눈 녹듯 녹아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후, 나는 더이상 팀장님의 질책에 괴로워만 하지 않았다. 대신 마음을 열고 팀장님의 말에 귀 기울여 조금씩이라도 배워가자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나는 점차 일에 재미를 붙였다. 이후에도 팀장님은 ‘츤데레’ 즉, 쌀쌀맞은 척하지만 누구보다 팀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심으로 아끼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1년 전,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5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한달음에 달려와 묵묵히 함께 해주셨다.
이젠, 팀장님이 나의 롤모델이다.
짐바브웨의 참맛에 빠지다 _신윤미
누군가 나에게 삶 속에서 ‘겉바속촉’의 매력을 느껴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짐바브웨’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나는 지난 석 달간, 아프리카 짐바브웨로 봉사를 다녀왔다. 주변에 짐바브웨로 봉사를 다녀온 선배들이 있었기에, 아프리카이긴 하지만 그런대로 살기 좋은 곳일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내가 마주한 짐바브웨의 현실은 ‘쓴맛’ ‘매운맛’이었다. 첫날부터 그랬다. 도착한 지 5분도 되지 않아 온 마을이 정전됐다. 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가까이에서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놀란 나머지 소리를 크게 질렀다. 그게 짐바브웨의 첫인상이었다. 정전은 시시때때로 일어났고, 현지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해 자주 아팠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고, ‘이곳은 힘든 곳, 나랑 맞지 않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자 하나하나가 불평불만 거리가 되었다.
나는 어느새 내가 하기 싫은 힘든 일은 어떻게든 빠질 궁리만 하며 지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 모습을 지켜보셨던 짐바브웨 지부장님이 나를 부르셨다. 나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현지 친구들이나, 다른 봉사자들도 종종 야단맞는 모습을 본적 있기에 바짝 긴장했다. 그런데 그날, 의외의 이야기를 들었다. “윤미야, 나는 네가 행복하게 지내면 좋겠어. 1년 뒤에, 10년 뒤에 너에 대해 들었을 때도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싶어. 행복하게 지내려면, 네 마음에 있는 가시를 빼야 해. 가시를 구분하고 버리는 훈련을 하면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어.” 나를 충분히 미워할 만도 한데, 내가 진정으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지부장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지부장님은 나에게 ‘감사하는 마음가짐’ 등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알려주셨다.
마음을 열고 보니, 불평불만만 하던 나를 판단하지 않고 진심으로 도와주려 했던 현지 사람들과 봉사 단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때부터 나는 짐바브웨의 ‘참맛’에 푹 빠지고 말았다. 옥수수 가루로 만든 현지 음식 ‘싸자’의 맛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부담스러운 일’이라고만 여기던 활동에도 도전하기 시작했다. 문화 교류 행사에서 영어로 사회를 보고, 교도소 봉사활동으로 한국어 노래를 알려주기도 했다. 이외에도 청소나 손빨래, 닭을 손질하는 일도 해보았다. 싫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함께하니 즐겁게 느껴졌다.
그때도 정전은 자주 일어났다. 예전에는 ‘정전이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너무 싫어!’라고 생각하던 나였지만, 언제부터 밤하늘의 별을 보며 짐바브웨 노래 ‘Ndoda(은도다)’를 부르며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오늘도, 짐바브웨의 그 맛이 무척이나 그립다.
“지부장님, 안녕하세요! 저 윤미예요. 한국은 선선한 가을을 맞았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짐바브웨에서 지냈던 하루하루를 떠올릴수록, 제가 정말 많은 걸 배웠다는 걸 느낍니다. 모나고 뾰족한 부분이 많은 저 때문에 많이 힘드셨지요?(웃음) 그런데도 언제나 저를 따듯하게 바라봐주시고, 어떤 마음으로 살 때 행복한지 하나하나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에게 ‘영어나 한국어만 언어가 아니라 미안해요, 사랑해요와 같은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언어야. 언어를 계속 쓰면 느는 것처럼, 이런 말도 계속하면 늘어.’라고 하셨지요. 쉽지는 않지만, 그 후로 불평 대신 긍정적인 언어를 늘려가고 있습니다. 제게 가르쳐주신 한마디 한마디 기억하면서 한국에서도 즐겁게 지내겠습니다. 짐바브웨 소식 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한국에서 윤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