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프리카공화국 청소년부 장관 아리스티드 브리앙 르보아스 Aristide Briand Reboas

나라의 사활이 걸린 최후의 결전이 아니라면, 누군가는 전장의 총성이 멎을 때까지 싸우고, 누군가는 군수품을 나르고, 또 누군가는 전쟁이 끝난 후를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지금은 정치 쿠데타로 나라가 혼란스럽지만 언젠가 안정된 날이 오면, 국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그는 여러 가지의 길을 고민해왔다. 그렇게 오랜 시간 생각하면서 그가 찾아낸 미래의 해결책은 다름 아닌 한국의 새마을 운동과 마인드교육이었다.  

아리스티드 브리앙 르보아스 청소년 스포츠 진흥 및 시민교육 장관 (Ministre chargé de la Promotion de la Jeunesse des Sports et de l’Education Civique) 1979년생. 다섯 명의 딸을 둔 아버지. 파리 고급 국제 연구 학교, 고급 정치 연구 및 외교 및 전략 연구 센터(HEIP CEDS)를 졸업했다. 새마을 운동을 연구하다 보니 한국을 수십 차례나 방문해서 한국이 제2의 고향 같다고 한다. 중아공에서는 김치도 먹고 K-Culture를 즐기는 ‘한국홍보대사’다. 프랑스에서 학위를 마치고 2006년에 돌아와 대통령실에서 일했다. CEMAC(중부아프리카경제통화공동체)에서 6개국 경제개혁을 추진했고, 아프리카 연합에서도 활동했다.(사진=권은민 객원기자)
아리스티드 브리앙 르보아스 청소년 스포츠 진흥 및 시민교육 장관 (Ministre chargé de la Promotion de la Jeunesse des Sports et de l’Education Civique) 1979년생. 다섯 명의 딸을 둔 아버지. 파리 고급 국제 연구 학교, 고급 정치 연구 및 외교 및 전략 연구 센터(HEIP CEDS)를 졸업했다. 새마을 운동을 연구하다 보니 한국을 수십 차례나 방문해서 한국이 제2의 고향 같다고 한다. 중아공에서는 김치도 먹고 K-Culture를 즐기는 ‘한국홍보대사’다. 프랑스에서 학위를 마치고 2006년에 돌아와 대통령실에서 일했다. CEMAC(중부아프리카경제통화공동체)에서 6개국 경제개혁을 추진했고, 아프리카 연합에서도 활동했다.(사진=권은민 객원기자)

역사를 ‘도전과 응전’이라 규정한 토인비의 말에 따르면, 인류의 삶은 물질적 정신적 토대가 한정된 상황에서 빼앗고 빼앗기는 분쟁의 연속이었다. 그 과정에서 취하는 자와 잃는 자, 이기는 자와 지는 자가 바뀌어갈 뿐이었다. 아프리카 대륙 한가운데에 자리한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이하 중아공)도 그랬다. 여섯 개 나라에 빙 둘러싸여 있어서 주변국과 가깝게 지내거나 반목하는 입장을 반복하며 살았다.

그런데 19세기에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로 진입하면서,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처럼 중아공도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들은 지배자로서 복종만을 요구했고, 중아공 국민들은 시련과 박해 속에서 지내야 했다. 마침내 1960년에 식민지에서 벗어나 자립국가를 이뤘으나, 산 너머 또 다른 산이 있었다. 권력을 놓고 벌이는 지도자층의 갈등과 다툼은 국민들에게 더 큰 실망과 상처를 던져주었다.

그가 파리로 유학을 떠난 이유

그런 혼란의 시대에 아리스티드 브리앙 르보아스가 중아공의 수도 방기Bangui에서 태어났다. 끊이지 않는 쿠데타로 정권이 자주 바뀌고, 불안감과 불만은 사회를 어지럽게 만들던 시기였다. 새로 등극한 지도자는 정치적 안정과 평화를 보장하겠다고 선언했으나, 신변에 위협이 오면 미련 없이 주변 나라로 망명을 떠났다. 그런 지도자들의 모습을 보고 실망한 국민들은 고향을 떠나 실향민이 되거나, 해외로 나가 난민이 되었다. 장래가 어두운 학생들은 학업을 포기하고 소년병을 자원했다.

반군의 총알받이가 된 그들은 무기를 들고 어른 흉내를 내며 점점 잔인하게 변해갔다. 어느덧 르보아스도 소년이 되었다.

“저는 제 또래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행운아였어요. 할아버지가 우리나라의 초대 목사셔서 엄격한 기독교 교육을 받고 자랐어요. 늘 교회 안에서 청소년 활동을 했고요. 18살에 바칼로레아(프랑스 대학입학자격시험)를 보고 파리로 유학을 떠났어요. 거기서 9년 동안 공부하면서 대학과 대학원 과정을 끝냈습니다.”

그가 프랑스로 떠난 이유는 무엇일까? 부조리한 사회를 목격하면서 그는 어려서부터 인간과 국가, 평화와 진리 같은 근본 개념들에 대해 고민해왔고, 그 답을 얻고 싶었다. 발전한 나라에 가서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배워 그것을 조국에 뿌리내리게 하고 싶었다. 그것이 그가 유학을 택한 가장 큰 이유였다. ‘우리가 식민 지배로부터 자유를 얻었지만 또다시 긴 소용돌이에 빠진 것은 독립 후를 준비하지 않아서가 아닐까?’ 언젠가는 내전이 종식될 것이라고 본 그는 선진국에서 배워 그때를 대비해야겠다고 다짐했고, 마음으로 미래의 청사진을 그렸다.

프랑스에서 알게 된 한국의 새마을 운동 

파리에서 외교학과 경제학을 공부하던 중, 그는 한국의 새마을 운동에 대해 알게 된다. 중아공보다 몇 년 빨리 독립한 한국은 급속도로 경제 성장을 해서 국제적 위상이 대단히 높았다. 그 비결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새마을 운동을 석사 논문의 주제로 잡고, 한국의 전문가들을 찾아가 배웠다. 뭔가 가능성이 보여도 그는 쉽게 들뜨거나 서두르지 않았다. 지름길에는 반드시 함정이 있기 때문이다. 나라 발전이라는 대전제를 머릿속에 두고 그는 문제를 천천히 숙성시키며 풀어갔다.

“새마을 운동이 한국에서 성공했지만, 다른 나라에는 맞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우리는 서로 기질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고, 잘하는 것도 다르니까요. 그래서 좋은 제도라도 받아들일 때엔 신중해야 해요. ‘그들은 왜 가능했고, 우리에겐 어떨까?’를 생각하면서 논문을 썼어요. 한국도 일제 식민 지배를 36년 동안 당하고 북한과 전쟁도 했어요. 하지만 한국은 국력을 다시 세웠고 지금 대단히 발전했지요. 내일의 희망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감내하려는 정신이 남다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새마을 운동은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가 함축하고 있듯이, ‘가난으로부터의 탈출’을 희망하던 국민의 요구와 ‘조국 근대화’를 추진하려는 지도자의 의지가 딱 맞아떨어진 ‘잘 살기 운동’이다. 1970년에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 주도한 이 운동은 이념적으로 반공反共에 기초했고, 경제발전을 향한 국가와 사회의 열망을 담아냈다. 그리고 산업화와 도시화로 생기는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할 포용력도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나라 발전을 위한 일은 밀어붙여서라도 했습니다. 저는 이런 정신이 중아공에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내에서는 새마을 운동의 가치가 실제보다 낮게 평가되고 있지만, 국제사회에서는 개발도상국의 발전을 지원하는 모범적인 성공 매뉴얼입니다.”

1. 중아공 방기에 있는 IYF 지부를 방문해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 중아공 IYF센터 제공 2. 지난 7월 부산에서 열린 세계청소년부장관포럼에 참석해 주제 발표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 권은민 객원기자 3. 자조 자립 협동을 핵심가치로 내세운 새마을 운동은 한국의 근대화를 앞당긴 원동력이 되었다. 농촌은 물론, 도시지역의 공동체 의식을 높여 ‘도시 새마을 운동’으로도 전개되었다. 르보아스 장관은 이 운동이 중아공의 발전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진 공감포토)
1. 중아공 방기에 있는 IYF 지부를 방문해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 중아공 IYF센터 제공 2. 지난 7월 부산에서 열린 세계청소년부장관포럼에 참석해 주제 발표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 권은민 객원기자 3. 자조 자립 협동을 핵심가치로 내세운 새마을 운동은 한국의 근대화를 앞당긴 원동력이 되었다. 농촌은 물론, 도시지역의 공동체 의식을 높여 ‘도시 새마을 운동’으로도 전개되었다. 르보아스 장관은 이 운동이 중아공의 발전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진 공감포토)

청소년들에게 마인드 전환이 필요 

2006년 파리에서 돌아와 대통령실에서 연설문을 작성하는 일을 맡았고, 국립문서보관소의 사무총장도 역임했다. 동시에 그는 아프리카연합의 평화안보부 법률 고문이면서 인권운동가로도 활동했다. 귀국 후 15년 가까이 평화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아프리카의 풀뿌리 운동에 참여해온 그가 2021년에 청소년부 장관이 되었다.

“투아데라 대통령은 고등학교 때 저를 가르치신 선생님이십니다. 2016년에 대통령이 되시고 제게 같이 일하자고 하셨는데 그때는 박사논문을 준비 중이었고, 쓰고 싶은 책들도 많았습니다. 아직은 공부가 더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대통령 법률보좌관으로 곁에서 도왔고, 영부인을 모시고 한국을 방문해 교육과 산업시설을 두루 시찰하기도 했습니다.

2021년 연임에 성공하신 대통령께서 다시 저를 부르셨어요. 그때는 “예” 하고 답했습니다. 대통령께서 저를 청소년부 장관으로 임명하셨죠. 나중에 그 이유를 여쭸더니, “자네가 두 번째 쓴 책의 103페이지를 보니까 젊은이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썼더구먼.” 하시는 겁니다. 상대를 배려하고 따뜻하게 품을 줄 아는 대통령입니다.”

그가 이끄는 부처엔 청소년, 스포츠, 시민교육이 포함된다. 청소년 인구가 국민의 75%인 중아공에서 매우 중요한 일을 맡고 있는 것이다. 꿈이 없는 중아공의 청소년들은 강간, 폭력, 약탈을 일삼고 마약에 빠져 결국 사회악을 만드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되고 만다. 그는 올해 국가청소년진흥정책을 세우고 이를 실행할 전략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제도를 잘 정비해도 청소년들의 호응이 이어지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청소년들의 닫힌 마음을 열게 해줄 마인드의 전환이 필요했다.

중아공이 살 길은 IYF가 닦아놓은 길이다

어느 날, 그는 중아공에 진출해 있는 해외 NGO 단체장들을 한 명씩 면담하던 중에 IYF에서 파견된 젊은 지부장을 만난다. 사무실 간판만 달아놓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단체들과 IYF는 확실히 달랐다.

“제가 중아공의 모든 NGO들의 활동을 세심하게 살펴봤는데 수십 년 동안 실적 없는 단체들이 수두룩했어요. 승인을 다 취소시키고 본국으로 돌려보냈죠. 저희와 일할 8개의 NGO만 남겼는데 그중에 IYF는 누가 봐도 활동이 투명하고 적극적이었어요. 청소년을 위해서 인성교육과 캠프 등 여러 행사를 꾸준히 해왔고 거기에 참가한 젊은이들이 점점 변하고 있었습니다.”

새마을 운동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알게 된 그는 IYF 단체를 설립한 박옥수 목사에 대해서도 궁금해졌다. 어쩌면 중아공에서 새마을 운동을 실행할 정신적 토양이 되겠다 싶었다.

“일을 구상할 때 저는 그 일을 처음 시작한 분을 찾아가 만납니다. 창립자의 이야기엔 정신의 진수가 담겨 있거든요. 그런 맥락에서 IYF 설립자 면담을 요청했고, 지난 7월 한국에서 열린 월드캠프에 참석해서 처음 만났습니다.

어땠냐고요? 한국을 수십 번 다녀왔는데 이제서야 연결된 게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박옥수 목사님과의 만남은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저는 중아공에 돌아와 대통령께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나라가 살 길은 하나, IYF가 닦아놓은 길’이라고요. 마인드교육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그 정체성을 정확하게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한 사람의 변화가 시작됩니다.”

1.2015년에 출간한 첫 책의 제목은 <중아공의 평화정책을 위해>였다. 2,3. 두 책은 현재 미국 스탠포드대학에서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아프리카의 테러리즘과 외교 전략에 관한 내용이다. 4.대통령이 <중아공을 구하기 위한 행동>이라는 그의 책을 읽고 청소년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1.2015년에 출간한 첫 책의 제목은 <중아공의 평화정책을 위해>였다. 2,3. 두 책은 현재 미국 스탠포드대학에서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아프리카의 테러리즘과 외교 전략에 관한 내용이다. 4.대통령이 <중아공을 구하기 위한 행동>이라는 그의 책을 읽고 청소년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진정한 평화는 욕망을 다스릴 수 있을 때 

지난 9월 21일은 유엔이 지정한 ‘세계 평화의 날’이었다. 중아공에서도 평화를 기원하는 여러 행사가 열렸다. 아직도 전 세계엔 평화를 지키려는 평화유지군이 각지에 주둔하고 있다. 평화를 위해 무장한 군인이 필요하다는 말은 매우 역설적으로 들린다. 평화라는 말을 역사적으로 보면,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평화를 전쟁에 속한 개념으로 인식했다. 그래서 전쟁을 하다가 잠시 멈춘 휴전 상태에서 경험하는 내적인 평안을 의미했다. 반면에 로마 시대에는, 강자가 싸워서 승리로 얻은 지배 체제 상태를 평화라고 지칭했다. 로마인들의 잠언 중에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로마 시대의 평화가 지배자 입장에서의 논리임을 보여준다. 

이런 그리스 로마 사상이 지금까지 이어져, 평화의 사전적 의미는 평온하고 화목한 상태, 즉 전쟁이나 갈등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렇게 정의한다면, ‘과연 세상에 평화가 존재할까’라는 의구심이 생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든 것이 유한有限하기 때문이다. 자연자원이나 사회적 지위나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어서 그것을 얻으려면 서로 경쟁하고 다투어야 한다. 남보다 더 갖고 싶고 더 누리고 싶고 더 위에 서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살아 있는 한, 유한 세계에서의 평화는 기대할 수 없는 추상적 개념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에게 죽음이 사라져 영원히 살게 되고, 먹고 쓸 모든 자원이 ‘화수분’처럼 계속 나온다면 굳이 싸울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네가 원하면 먼저 대통령 해라. 나는 하겠다는 사람이 없을 때 할게.” “이 금덩이를 네가 가질래? 나는 지금 쓸 일이 없다.” 라고 할 텐데, 누가 솟아나는 샘물을 두고, 신선한 공기를 두고 제 것이라 다투겠는가. 평화는 이처럼 욕망을 무한대로 충족시켜줄 수 있을 때 사용가능한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욕망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을 때 비로소 평화 상태가 가능해질 것이다.

르보아스 장관이 박 목사를 만나 놀란 것은, 그가 창시한 마인드교육에 그리스도의 희생이 담겨 있어 누구나 마음에 쉼을 얻으며 그것이 인간에게 이타적인 성품을 부여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평화 전문가로 활동해온 그는 자신이 규정한 평화에 한계가 있음을 깨달았다. 갈등과 화합을 양팔 저울에 올려놓고 어느 것이 더 유익한지 따지는 유한 세계를 뛰어넘어 무한의 관점으로 세상을 응시하는 것, 이것이 그가 마인드교육에서 발견한 새로운 평화였다. 

‘과연 될까?’ ‘저게 가능할까?’ 생각하는 것들에 뛰어들어 결국 해내는 이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개척자라고 부른다. 그런 개척자 정신은 다음 세대들이 그 혜택을 편하게 누리도록 길을 열어준다. 유한 세계에서 평화를 논하던 그가 앞으로는 아프리카 청소년들을 위해 마인드교육에 담긴 평화를 구현해갈 것이다. 먼 훗날, 후대들은 그들이 당연히 누리는 평화가 앞서 달려간 르보아스 장관의 개척자 정신 덕분임을 알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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