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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칼럼] 움직이지 않는 꿈
박문택 | 승인 2022.09.02 09:57

사법시험 1차를 준비할 때, 새벽 일찍 지하철을 타고 와서 마아가린에 구운 노점상 토스트로 아침 식사를 하고 시립도서관으로 향했다. 날이 밝지 않아 잘 보이진 않아도 나는 그 길에서 라일락 꽃들이 뿜어내는 향을 맡는 게 정말 좋았다. 계속 걸어가야 하기 때문에 향은 곧 사라졌지만, 보라색 향이 내 몸과 마음에 스며들어 상쾌한 기분을 가질 수 있었다.

날씨가 어두울 때면 들어오는 생각들이 있었다. 가장 컸던 것은 내가 지금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건가였다. 신림동 고시촌에 들어가서 기약도 할 수 없는 공부를 할 만한 자격이 나한테 없는 것 같았고, 괜한 객기를 부려서 고시 공부를 하려는 게 아닌지 나도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그런데, 라일락 향을 맡으며 조금만 걸어가다 보면 이상하게 우울한 생각이 사라졌고, 어두워 잘 보이지 않던 라일락 꽃만큼은 늘 같은 길을 지나가는 나를 기억하고 응원해 주었다.

돈이 별로 없어서 잠을 잘 고시원은 열두 명이 한 방을 쓰는 곳으로 정했다. 전기 판넬 위에 이층 침대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공기가 건조하다며 바닥에 물을 뿌렸다가 이것을 고시원 총무가 알고 달려와 감전돼 죽을 일 있냐며 자는 우리를 깨웠다. 같이 지내도 서로 잘 모르는 사이지만, 같이 공부하는 입장이라 우리는 이런 상황이 재미있기도 했다. 고시원에는 새벽에 온수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 맞은편 초등학교 운동장에 가서 힘껏 달리기를 한 후 땀이 식기 전에 돌아와 ‘으아아’ 소리를 내며 빨리 찬물 샤워를 했다. 밥값을 아껴보려고 아침은 도로 변에서 토스트를 사 먹고, 점심과 저녁은 도서관 식당에서 해결했다.

어떻게 보면, 이 시기가 불쌍한 때였는데, 나는 내가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참 늦게 공부를 시작한 아들을 둔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그것 하나만 마음에 걸렸다. 부모님은 이런 나에게 돈 걱정은 하지 말고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고 하셨지만, 나는 매달 보내주시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씀드렸다. 학원비가 비싸면 카세트 테이프를 사서 들으면 되고, 책도 운이 좋으면 중고책방에서 깨끗한 헌책을 헐값에 살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집이 찢어지게 가난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모든 조건을 갖춰 놓고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에 매이지 않았고, 그만큼 나는 여러 측면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1차 시험을 한 달 정도 앞둔 어느 날, 나는 갑자기 쓰러졌다. 병원에 가지 않고 혼자 고시원에 누워 있다가 회복했기 때문에 쓰러진 원인을 끝내 알지 못했고, 시험날이 코앞이라 병원에 가기도 싫었다. 며칠 끙끙대다가 다시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정말 그냥, 공부를 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무사히 1차에 붙고, 다음 해에 있는 2차에도 합격을 했다. 단기간에 합격을 했던 터라 월간 고시계라는 잡지사에서 연락이 와서 최종 발표가 나기도 전인데 합격기를 써 달라고 했다. 만일 수석이나 차석이면 발표가 난 다음 달에 바로 잡지에 수기가 실리고, 그렇지 않으면 그 다음 달에 게재된다고 했다. 글의 제목은 ‘움직이지 않는 꿈’이었다.(당연히 수석이나 차석이 아니었다.)

나는 이때부터 지금까지 20년이 넘도록 어딜 가든지 꿈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꿈을 잘 모른다. 똑똑해야 하고, 많이 알아야 하고, 강해야 하는 것으로 안다. 아니다. “꿈을 꾼다면 OO을 해야 한다.”는 문장은 성립될 수 없다. “꿈을 꾼다면 OO이 된다.”가 맞다. 나는 꿈을 꾸고, 꿈을 키우고, 꿈을 믿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9월이다. 한 해를 열심히 보내고, 이때쯤이면 어떤 결실이 나오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실망할 필요가 없다. 그냥 한 해 내내 꿈을 가지고 꿈을 심으면 된다. 농부는 들판을 쳐다보며 추수만 기다리지 않고, 다음에 뿌릴 씨를 챙기면서 계속 준비한다. 곡식은 일 년이면 익지만, 우리 꿈은 그보다 덜 걸릴 수도 있고, 더 걸릴 수도 있다. 그러니 열매만 쳐다보지 말고, 꿈부터 심자.

박문택  info@dailytw.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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