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를 알면 고사성어가 보인다

우리는 살면서 고사성어를 자주 접합니다. 고사성어故事成語란, 말 그대로 옛날에 벌어진 일, 특히 중국에서 있었던 일을 토대로 만들어진 말이 오랫동안 널리 쓰이면서 관용어로 굳어진 것입니다. 간결하면서도 오히려 분명하고 묵직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고사성어가 지닌 장점일 것입니다.

고사성어 중에는 도원결의桃園結義, 백미白眉, 계륵鷄肋, 괄목상대刮目相對 등 삼국지에서 유래한 것들도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고사성어가 삼고초려三顧草廬인 것 같습니다. ‘예의와 정성을 다해 인재를 맞아들인다’는 뜻을 가진 이 고사성어에는 1,8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읽는 이로 하여금 절로 입에 흐뭇한 미소를 머금게 하는, 감동적인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좌충우돌’ 유비의 수난사

삼국지 최후의 생존자인 유비, 조조, 손권 중 가장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은 단연 유비일 겁니다. 조조는 든든한 집안 배경 덕분에 스무 살에 관직에 올랐고, 간신 동탁을 토벌하는 반동탁 연합군을 결성해 중심에서 활약했으며, 이후 다른 제후들과의 대결에서 연전연승하며 50대 초반에는 대륙의 최강자로 우뚝 서게 됩니다. 손권은 아홉 살에 아버지를, 열여덟 살에 형을 여의긴 했지만 선대의 실력있는 장수와 모사들이 어린 그를 계속 보좌했습니다. 또 물려받은 오나라는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했기에 이를 바탕으로 착실히 국력을 키운 손권은 불과 20대 후반에 아버지뻘 되는 두 영웅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7세기 당나라 때 화가가 그린 유비(161~223)의 모습.
7세기 당나라 때 화가가 그린 유비(161~223)의 모습.

반면 유비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일찍이 아버지를 잃은 유비는 홀어머니와 함께 돗자리나 신발을 만들어 팔아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20대 초반에는 의병을 일으켜 황건적 토벌에 참가해 공을 세웠지만, 관군官軍이 아니라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20대 후반에는 반동탁 연합군에 참여했으나, 연합군이 성과없이 해산하면서 한때 동문수학했던 공손찬을 찾아가 객장客將 노릇을 했습니다.

그런 유비도 서른세 살 무렵, 잠시 ‘볕들 날’이 찾아옵니다. 조조에게 침공당한 서주徐州 태수 도겸이 사방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유비만이 군사를 이끌고 도우러 왔고, 이에 도겸은 유비에게 서주를 물려주고 세상을 떠납니다. 허나 좋은 날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여포가 ‘조조에게 패해 갈 곳이 없다’며 찾아온 것입니다. 유비는 호의를 베풀어 성城 하나를 내주었지만, 배신의 명수 여포는 유비가 전쟁하러 나간 틈을 타 서주를 차지해 버립니다. 그 뒤로도 유비는 10년 넘게 조조, 원소, 유표 등에게 번갈아 몸을 의탁하며 떠돌이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세 번을 두드린 끝에 열린 마음의 문

어느덧 40대 중반의 나이가 된 유비는 문득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천하의 절반을 손에 넣은 라이벌 조조에 비하면, 변변한 근거지 하나 마련 못하고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자신이 너무도 한심하게 느껴졌습니다. 유비에겐 천하무적의 맹장 관우, 장비, 조운이 있었지만, 정작 이들이 전쟁터에서 제 실력을 맘껏 발휘할 작전을 세우고, 나아가 국가경영의 큰 틀을 짤 전략가의 부재가 뼈아팠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동굴 같은 내 삶에, 한줄기 빛이 되어줄 인물은 정녕 없는 걸까?’ 사막에서 물을 구하듯 애타게 인재를 수소문하던 유비에게 당대의 현인 사마휘가 제갈량을 추천해 주었습니다. ‘제갈량을 얻으면 능히 천하를 얻을 수 있다’는 게 그의 말이었습니다. 바로 다음 날 유비는 제갈량이 산다는 초가집을 찾아 나섰지만, 아쉽게도 그는 출타중이었습니다.

며칠 뒤 유비는 사람을 보내 제갈량이 집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의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제갈량은 그새 친구를 따라 집을 비운 뒤였습니다. 하는 수 없이 편지를 남긴 채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제갈공명이라고도 불리는 제갈량은 지금도 지혜의 대명사로 통한다.
제갈공명이라고도 불리는 제갈량은 지금도 지혜의 대명사로 통한다.

유비가 두 번이나 헛걸음을 하는 동안, 계절은 겨울을 지나 봄이 되었습니다. 유비는 다시 제갈량을 만나러 떠났습니다. 물론 목숨처럼 아끼는 관우, 장비와 함께였습니다. 다행히 이날은 제갈량이 집에 있었습니다. 침상에서 쿨쿨 낮잠을 자면서 말입니다. 유비는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서서 제갈량이 잠에서 깨길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반나절이 흘렀지만 제갈량은 전혀 일어날 기색이 없었고, 급기야 성질 급한 장비가 눈을 부라리며 관우에게 말했습니다.

“작은형님, 우리 이 집에 불을 지릅시다. 제깟 놈이 안 일어나고 배기는가 보게 말이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큰형님도 다 뜻이 있어서 저러실 테니.”

관우가 장비를 애써 진정시켰습니다. 동생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유비는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섰을 뿐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두 시간이 더 지난 뒤에야 잠에서 깬 제갈량은, 유비를 발견하고는 황급히 옷을 갈아입고 나와 맞으며 예를 갖추었습니다.

“유 장군께서 여러 번 저를 보러 오셨는데도 찾아뵙지 않다가 오늘 이렇게 다시 오시게 했으니 참으로 송구합니다.”

“선생께선 천하를 경영할 큰 재주를 갖고 계신다 들었습니다. 부디 어리석은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시작된 대화에서, 유비는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황제를 앞세워 권력을 휘두르는 조조를 무찌르고 한나라를 부흥시켜 백성들을 전쟁의 도가니에서 건져내고 싶은 자신의 꿈을 이야기했습니다. 오랫동안 전란에 시달리며 고통받는 백성들을 생각해서라도 부디 지혜를 빌려달라고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는 이때 유비의 심정을 ‘부릴 사람을 찾는 주군主君의 정성이라기보다는 스승을 구하듯 하는 간절함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 진심은 제갈량의 마음에도 전해져, 그는 유비를 따르기로 결심합니다. 유비에게 있어 불세출의 지략가 제갈량의 가세加勢는,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갈량의 맹활약에 힘입어 유비는 불과 7년 만에 형주와 익주를 제패하며 단숨에 삼국의 한 축으로 발돋움했습니다. 유비가 세 번이나 초가집을 찾은 끝에 제갈량을 얻은 이 일을 가리켜 후세 사람들은 ‘삼고초려’라고 부릅니다.

몸은 제갈량이지만, 마음은 평생 유비로 살았다

개인적으로는 이 ‘삼고초려’를 삼국지 최고의 명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삼국지에는 삼고초려 말고도 인재를 얻고자 자신을 낮추고 공을 들인 영웅들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절친이나 주종관계를 넘어, 평생토록 서로 감사와 신뢰를 주고받으며 지낸 사례는 생각만큼 많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유비와 제갈량의 관계는 참으로 특별했습니다. 스무 살 위였지만 유비는 내세울 것 없는 자신을 믿고 따라와 준 제갈량을 스승처럼 모셨고, 제갈량은 제갈량대로 이름 없 는 시골선비였던 자신을 세 번이나 찾아준 유비를 향해 평생 고마운 마음을 간직했습니다. 그 마음은 제갈량이 쓴 ‘출사표出師表’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선제(유비)께서는 황공하옵게도 무려 세 번이나 몸을 낮추어 몸소 저희 집을 찾아오셔서 당세의 일을 자문하시니, 신은 이에 감격하여 선제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그 뜻을 받들었사옵니다.”

삼고초려가 우리에게 더 큰 울림을 선사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유비가 죽은 뒤, 제갈량은 몸은 제갈량이었지만 남은 생애를 유비의 마음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유비는 죽으면서 제갈량에게 아들 유선을 잘 보필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유선은 삼국지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둔한 군주였지만, 제갈량은 그 유언을 잊지 않고 성심껏 유선을 보좌했습니다. 심지어 나라를 다스리려면 꼭 익혀야 할 고전들을 손수 필사해서 유선에게 보내 글공부를 독려한 모습에서는, 마치 자식을 바르게 키우려는 아버지 같은 면모마저 엿보입니다.

장쑤위성TV에서 방영된 드라마 <대군사 사마의: 호소용음>에서 위나라 원정을 떠나기 전 출사표를 작성하는 제갈량. 나라에 대한 걱정과 임금을 향한 충심이 가득 담긴 출사표는 후세에도 귀감이 되는 글이다.
장쑤위성TV에서 방영된 드라마 <대군사 사마의: 호소용음>에서 위나라 원정을 떠나기 전 출사표를 작성하는 제갈량. 나라에 대한 걱정과 임금을 향한 충심이 가득 담긴 출사표는 후세에도 귀감이 되는 글이다.

제갈량은 유비의 염원이었던 한나라 부흥을 이루고자 다섯 차례나 위나라로 진격하는 북벌을 단행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위나라와 촉나라 간에 군사력과 경제력 차이가 워낙 컸던 터라 북벌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 또한 제갈량이 오롯이 유비의 뜻을 가슴에 담고 살았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입니다.

아프리카에는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속담이 있다고 합니다. 흔히 인생을 여행에 비유합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인생이란 여행길에서, 제갈량처럼 지혜롭고, 서로를 향한 믿음과 감사로 마음까지 하나 되어 함께 갈 수 있는 친구 하나만 얻는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삶은 충분히 값지고 의미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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