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티벌 프로그램 중에 박은유 씨의 다큐멘터리가 있었다. 흑백으로 시작한 영상엔 물총으로 사람을 겨눈 한 아이가 “지원 바람”을 외치자 여행 트렁크에 숨어 있던 다른 아이가 “7시 방향으로 출동”을 말하며 물총을 들고 뛰어나온다. 잠시 뒤, 두 아이에게 물총 공격을 당한 아주머니는 소리친다. “이놈의 자식들, 내가 너희들 가만히 안 둘 거야!” 무서운 아주머니와 눈이 딱 마주친 아이들은 뒤로 돌아 뛰어가며 “은유 형!”을 목청껏 부른다. 즐거워 보이는 장면 다음이 반전이다. 박은유 씨는 북받치는 듯한 감정을 절제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저한테 있어서 엄마와 아빠는, 기댈 수 없는 존재였어요….” 담담히 자신에 대해 말하는 박은유 씨의 다큐멘터리 내용을 질의응답 형식으로 소개한다.

은유 씨에게 부모님이 기댈 수 없는 존재라고 하셨는데, 이유가 있었나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은 자주 싸우셨어요. 10살 때로 기억하는데, 아버지께서 다급히 집에 오셨어요. 인사를 드려도, 말을 걸어도, 아무런 반응을 해주지 않으시고 짐을 싸기 시작하셨어요. 아버지가 집을 나가신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지만, 떠나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저는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어요. 아버지를 잡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었거든요. 그렇게 아버지는 형만 데리고 집을 나가셨죠.

우린 4형제였는데, 어머니는 홀로 아들 셋을 키우셨어요. 경제적으로도 빠듯하다 보니, 힘들어도 직장을 쉴 수 없으셨어요. 그래서 늘 피곤해 보이셨죠. 그리고 제가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엔, 어머니께선 어린 두 동생들을 더 챙기셨어요. 자연스레 저는 학교생활, 공부, 준비물, 간식이나 가정통신문 등 거의 모든 것을 제 스스로 해나갔어요. 그렇게 살다 보니, 아버지가 우릴 버렸다는 생각에 아버지를 많이 미워하기도 했고, 어머니가 나를 신경 써주지 않는 것이 서운하기도 했습니다. 부모님은 제게, 그런 존재셨어요.

부모님께 기댈 수 없을 때 은유 씨는 어디서 위로를 얻고 힘을 얻었나요?

아무에게도 의지할 수 없을 때, 게임에 빠져들기 시작했어요. 게임을 하다 보면 제가 그곳의 주인공이 된 것 같고, 현실에서 벗어난 것처럼 느껴졌어요. 게임을 할 때면 외롭고, 서운하고, 괴롭고, 슬픈 기억들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저에게 게임은 현실의 도피처이자, 제 마음이 쉴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어요.

어린 시절 아버지는 아들들과 잘 놀아주는 따뜻한 분이셨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아들들과 잘 놀아주는 따뜻한 분이셨다.

게임에 빠져있던 은유 씨가 해외로 봉사를 가게 된 계기는요?

어머니께서 어느 날 책 한 권을 제게 건네셨어요. 여러 나라로 해외봉사를 간 학생들의 모습과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책이었는데요.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 제 마음을 끌어당겼습니다. ‘나도 저렇게 행복하게 웃을 수 있을까?’라는 궁금증이 생기더군요. 그리고 마침 저랑 친한 형이 해외봉사를 다녀왔었어요. 그래서 그 형에게 거기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어떻게 지냈는지 이런저런 것들을 물으면서, 해외봉사를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떠난 푸에르토리코라는 나라에서 잘 지내셨나요?

저는 현지인들에게 스페인어로 한글을 가르치고, 섬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학생들에게 코리안캠프를 진행했습니다. 또한 6.25 전쟁에 참전했던 용사들을 찾아다니면서 감사의 인사와 선물을 드리는 활동도 했습니다. 그때 ‘라파엘 리베라’라는 할아버지를 만났어요. 그분은 우리를 향해 “내가 지킨 아이들이다. 내 목숨을 바쳐서 지켜낸 나라의 아이들이다.”라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이분들이 우리나라를 많이 그리워하고 진심으로 사랑하시는구나.’를 강하게 느낄 수 있었어요. 우리나라를 위해 젊음을 바쳐 자유를 지켜주신 분들에게 정말 감사했습니다. 6.25 주간에는 바야몬 시에 위치한 국립묘지에 가서 묘지 주변을 정돈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해 드렸습니다.

해외에 나가 애국심을 경험해보는 뭉클한 시간이었군요.

네. 그리고 MBC와 YMCA가 주최하고 재외동포재단이 후원하는 ‘2021 더 위대한 도전’ 공모전 해외 에세이 부문에도 도전해보았습니다. 원고를 제출했지만, 저는 수상하진 못했고 대신에 같은 단원이 최고상인 금상을 받아 기뻤어요. 1년간 함께 활동한 4명의 단원들이 모두 푸에르토리코 국회의장, 교육부장관 그리고 산후안 시장님께로부터 표창장을 받았습니다.

다양한 활동도 하고 성과도 있었지만, 오랫동안 몸에 배인 제 습관은 여전했습니다. 봉사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도 저 혼자서 생각하고 결정하다 보니, 함께 온 단원들과 자주 다툴 일이 있었어요. 그때마다 ‘잘 도와주지도 않을 거면서’라는 마음도 들었고,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거나 타인을 헤아리는 능력이 없는 것 같다.’는 자책도 했습니다. 이런 나를 보고 지부장님께서 상담을 해주셨는데, 그때 제 마음 깊은 곳에 있던 아버지를 향한 미움, 슬픔, 분노가 분출되었습니다. 지부장님께선 그 상처들을 하나씩 치유해주셨어요. 그날 저녁, 난생 처음 아버지께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편지를 받으신 아버지의 반응이 궁금하네요. 답장이 왔나요?

네. ‘사랑하는 우리 아들 은유에게. 아빠가 우리 은유 어렸을 때, 너무 큰 상처를 준 것 같구나. 아빠로서의 역할을 곁에서 충분히 해주지 못해 마음이 너무 무거웠단다. 그런데도 건강하게 자라주고, 아빠의 아들로 태어나줘서 고맙다. 한국에 오면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자, 사랑한다. 우리 아들. 재밌게 잘 지내고 와♥’

편지 안에는 처음 느껴본 아버지의 사랑이 담겨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부모님을 향한 문을 닫고 있었는데, 편지 한 통에 닫혔던 문이 활짝 열리더군요. 그리고 ‘아버지가 나를 사랑했구나. 아버지가 나를 버린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은 타인에게 닫혔던 문도 열게 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지부장님과 단원들 그리고 푸에르토리코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에서 진정한 행복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요? 아버지와 계속 연락하며 지내시는지요?

아버지께서 집을 나가신 뒤로는 거의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전화나 문자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런데 해외봉사를 다녀온 뒤로는 자주 연락하며 지냅니다. 원래 저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 어색했는데, 푸에르토리코에서 사람들과 지내며 내 생각을 표현하는 연습을 하다 보니, 지금은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뭘 먹고 싶은지 아버지께 사소하지만 일상적인 표현들을 합니다. 그렇게 만난 아버지는 예전에 알고 있던 아버지가 아니셨습니다. 전에는 아버지가 차갑고 냉정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 누구보다 저를 사랑하시는 따뜻한 분이십니다.

행복하게 웃고 싶어서 푸에르토리코로 떠난 박은유 씨. 어느새 그는 누구보다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제가 누군가에게 행복을 주니, 저도 똑같이 되더라고요. 제 미소는 그들로부터 받은 선물이에요.”라고 말했다. 불안정한 가정 속에서 스스로를 보호하느라 누구에게도 속내를 드러내지 못했던 그의 다큐멘터리에는 사람과 사람 간에 통용되는 원칙이 담겨 있었다. 마음을 열면 흐른다는 것, 변화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는 원칙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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