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 라흐마니노프의 실패

매년 방송사에서 실시하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클래식’ 설문조사에, 항상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곡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이다. 피아니스트 서혜경은 암 투병 중일 때 라흐마니노프를 떠올렸고, 암을 이겨낸 뒤 재기 무대에서도 그의 작품들을 연주해냈다. 그는 피아노를 치면서, 작곡가 라흐마니노프가 겪은 깊은 어두움과 찬란한 빛을 느꼈다고 한다. 피아니스트들에게 도전할 의지를 주고, 때론 조용한 위로도 주는 라흐마니노프 역시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데 혼자서 할 수는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125년 전의 일이다. 1897년 3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아직 봄이라고 부르기엔 춥고 스산했다. 하루 일을 마친 저녁, 사람들은 천재 작곡가 라흐마니노프(1873~1943)의 초연初演 교향곡을 들으려고 공연장으로 모여들었다. 2년 전 완성해둔 신곡을 드디어 세상에 개봉하는 그날, 작곡가는 기대감에 들떴고 다른 한 편에선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도 느꼈다.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의 지휘봉에 따라 연주가 시작되고 클라리넷 독주로 이어졌다. 1악장에서 4악장까지 약 42분간의 연주가 끝났을 때 공연장엔 기립박수가 아닌, 비아냥과 야유의 소리들로 술렁거렸다. 오케스트라의 미숙한 연주도 원인이었지만, 모스크바 음악원 출신의 라흐마니노프를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계에서 반기지 않는 의도도 다분히 깔려 있었다.

어느 날 불어닥친 악평이라는 폭풍 

다음날, 조간신문의 비평 기사를 읽은 라흐마니노프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당시 음악계를 쥐락펴락하고 있던 비평가 세자르 큐이가 그의 교향곡 1번을 두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나올 때 있었던 10개의 재앙을 다시 보는 것 같았다.’라고 비꼬면서 ‘지옥의 음악학교에서나 좋아할 곡’이라며 라흐마니노프를 향해 악평을 퍼부은 것이었다.

심혈을 기울인 첫 교향곡에 이런 소리들이 들리자, 스물네 살의 라흐마니노프는 정신적 타격을 입는다. 그는 악보를 서랍에 넣고 자물쇠로 꽁꽁 잠가버렸다. 자신의 모든 창작 의욕도 함께…. 2미터 가까운 키에, 농구공을 한 손에 잡을 만치 크고 긴 손을 가졌지만, 그의 정신은 금방 부서질 듯 얄팍한 유리 멘탈이었다.

다음 곡을 준비할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해버린 그는 괴로웠다. 줄곧 음악적 자질을 인정 받아온 그였기에 이런 평판을 받아들이기가 더 어려웠다.

차이코프스키도 감탄한 그의 실력 

제정 러시아 말기,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라흐마니노프는 어려서부터 음악 천재라는 말을 들었다. 타고난 절대음감과 기억력은 한 번 훑어본 악보를 그대로 연주해냈고, 아들의 음악성을 일찍이 알아본 어머니는 4살 때부터 피아노를 가르쳤다. 그는 12살에 모스크바 국립음악원에 입학해 니콜라이 쯔베레프 교수 문하에서 최고의 피아노 연주자로 교육을 받았다. 대위법과 화성법을 공부하던 중 그는 연주보다 작곡으로 관심이 옮겨졌고, 얼마 뒤 차이코프스키 교수의 시험에서 5점 만점에 5점이라는 전설적인 점수를 받는다.

그는 졸업 작품으로 19일 만에 완성시킨 오페라 ‘알레코’를 제출한다. 이 악보를 본 차이코프스키는 오페라 ‘알레코’를 1893년 볼쇼이 극장 무대에 올리도록 적극 추천했다고 한다. 능력도, 성과도 남달랐던 라흐마니노프가 오선지에 그린 음표들의 선율은 아름다우면서도 웅장해 사람들의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이렇게 촉망받던 그가 세자르 큐이의 혹평은 견딜 수 없는 저주의 소리로만 들었다.

꼬마 아이의 기질을 버리게 해준 사람들

사색적이고 내향적인 성격, 그것을 뒤집어 표현하면 부담스러운 일을 피하고 숨어버리는 겁쟁이를 말한다. 거인 체구에 꼬마 아이의 기질을 버리지 못하던 그는 교향곡 실패 후 2년 반을 두문불출했다. 신경쇠약이 극도에 이르러 헛소리까지 하는 그를 본 사촌형 실로티는 사랑하는 동생을 그냥 놔둘 수 없었다. 치료를 잘 해줄 정신과 의사를 수소문했고 니콜라이 달 박사를 그에게 소개한다.

라흐마니노프를 만난 달 박사는 자기암시 요법과 심리치료를 그에게 처방했고, 1900년 1월부터 3개월간 꾸준히 치료해주었다. 아마추어 비올라 연주가로도 활동하는 달 박사는 음악가의 고뇌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당신은 피아노 협주곡을 쓸 것입니다. 당신은 아주 잘 해낼 것입니다. 그 곡은 매우 훌륭한 협주곡이 될 것입니다.’라고 매일 끊임없이 그에게 반복해 말해주었다. 이런 방법으로 환자의  마음속 좌절과 절망을 제거 해내고 희망과 자존감을 새롭게 불어넣었다. 라흐마니노프는 달 박사의 치료로 달라진 자신을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놀랍게도 그 치료는 내게 큰 도움을 주었다. 3개월이 지나자 나는 서서히 살아나는 걸 느꼈고 새로운 음악적 영감이 떠올랐다. 나는 초여름부터 작곡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음을 알고 있던 그는 달 박사의 치료를 그대로 받아들여 마침내 은둔의 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첫 번째로 쓴 작품이 유명한 ‘피아노 협주곡 2번’이다. 이 곡은 자신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준 고마운 니콜라이 달에게 헌정되었다. 얼마 후, 그를 진정 아끼는 사촌형 실로티가 지휘를 맡아 신곡을 초연하였고 그때 라흐마니노프가 직접 피아노를 연주했다. 자신의 병을 고쳐준 달 박사와 자신을 혹평했던 평론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말이다. 공연이 끝나자 평론가들과 청중은 갈채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작곡가로서 명성을 회복해준 이 피아노 협주곡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위로의 선율이 되고 있다.

사촌형 알렉산드로 실로티(왼쪽)와 라흐마니노프의 사진. 실로티 형은 그에게 고마운 존재였다. 형의 권유로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한 그는 처음에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실로티에게 헌정했고 훗날 실로티는 피아노 협주곡 2번 초연 때 지휘를 맡았다.
사촌형 알렉산드로 실로티(왼쪽)와 라흐마니노프의 사진. 실로티 형은 그에게 고마운 존재였다. 형의 권유로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한 그는 처음에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실로티에게 헌정했고 훗날 실로티는 피아노 협주곡 2번 초연 때 지휘를 맡았다.

이젠, 어떤 소리도 수용할 수 있는 거장巨匠

이후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에 반대 입장을 표명한 그는 독일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다. 1928년 1월 뉴욕, 그는 신예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뉴욕에서 만난다. 당시 그는 쉰다섯 살, 호로비츠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다음 달 공연을 앞둔 호로비츠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습하며 느낀 점들을 작곡가에게 서슴 없이 말했다. 그도 연주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런 광경은 작곡가와 연주자 사이에 신뢰와 존경이 없으면 절대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라흐마니노프 곡을 연주한 호로비츠.
라흐마니노프 곡을 연주한 호로비츠.

언젠가 호로비츠의 연주를 듣고 감동을 받아 ‘내 작품을 통째로 삼켜 버렸다.’고 표현한 라흐마니노프는 어린 연주자의 조언을 모두 받아들여 악보를 수정했다. 비난의 소리가 두려워서 은둔을 택했던 그가 이제는 평정심과 자유를 향유할 줄 아는 거장 음악가로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훗날 호로비츠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는 한 그는 가장 위대한 인간이자, 위대한 작곡가이며, 위대한 피아니스트였습니다.”

그는 악평 몇 마디에 쓰러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촌형의 지속적인 관심 덕분에 달 박사를 만났고, 치료를 받으면서 불구가 된 자신의 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다 비워버린 마음에 새로운 음악적 영감을 받아들인다. 라흐마니노프의 인생을 보면 거센 폭풍에 맞서는 길은 정면돌파도, 줄행랑도 아니다. 더 이상 자기 것이 없을 때, 완전히 비워졌을 때가 바로 그때이다.

다음과 같은 책들이 라흐마니노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어 소개한다. 

자크 엠마뉘엘 푸스나케 <라흐마니노프> 중앙일보사, 존 버로우즈 <클래식의 세계> 21세기북스, 조회창 <클래식이 좋다 : 29인의 작곡가를 만나다> 미디어샘, 조병선 <클래식 법정> 뮤직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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