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비아로 해외 봉사를 떠났던 친구가 내게 문자를 보냈다. 원래 낯도 많이 가리고 대인관계도 원만하지 않았던 친구라 잘 지내고 있을지 걱정스러웠는데,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무척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 부러웠다. 그 당시 나는 어머니가 암으로 병원에 입원해 계시고, 순탄치 않은 군 생활 중이었다. 친구의 웃음을 보니 ‘저렇게 웃어본 적이 언제였나?’ 하는 생각과 함께 나도 그런 환한 미소로 웃어보고 싶었다. 그렇게 제대 후 친구가 다녀온 잠비아로 해외 봉사를 왔다.

루프완야마에서 만난 케네디(맨 오른쪽)와 그의 동생들과 함께.
루프완야마에서 만난 케네디(맨 오른쪽)와 그의 동생들과 함께.

처음 잠비아에 도착했을 때, 사진으로 보았던 한국의 1970년대를 만난 것만 같이 친근하고 푸근했다. 그리고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나라라서 당연히 더울 거란 생각에 후덥지근한 날씨를 상상했는데, 잠비아는 한국의 여름보다 덥지 않았다. 습도가 높지 않아서 훨씬 쾌적하게 여름을 날 수 있었다. 또 생각보다 잘 구비된 시설에 놀랐다. 당연히 물이 부족하고, 자주 전기가 끊길 줄 알았는데, 내가 지낸 잠비아 수도 루사카는 기반 시설이 잘 구비되어 있어서 전기나 물 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들에서도 부족함을 느끼지 못할 만큼이었다. 또한 잠비아의 자연경관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보기만 해도 감탄사가 나올 만큼 말이다. 다만 음식은 입맛에 맞지 않아 고생을 좀 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뜨거운 물에 옥수수가루를 풀어 만든 ‘씨마’를 주식으로 먹는다. 우리나라 백설기처럼 포슬거리는 시마를 한 덩어리 떼어 야채와 말린 생선을 넣고 손으로 오물쪼물해서 먹는다.

이 음식이 내겐 너무 짜고 별맛을 느낄 수 없어서, 꽤 오랫 동안 먹는 걸 힘들어 했다. 한번은 국내 NGO단체 굿네이버스와 다큐멘터리 촬영을 함께했다.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떠난 곳은 잠비아에서 두 번째로 큰 지역인 루프완야마였다. 루프완야마는 정말, 책에서나 TV에서 봐왔던 아프리카 그 자체였다. 흙으로 지어진 집에, 수동식 펌프를 사용해 물을 기르고, 흙길은 끝없이 뻗어있었으며, 도시에선 흔히 볼 수 있었던 자동차 한 대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그곳에서 9살의 어린 케네디를 만났다. 케네디의 부모님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셨고, 혼자 6명의 동생들과 아픈 할아버지를 돌보고 있었다. 하루 7시간씩 장작 패는 일을 하며 번 돈 250원으로, 이틀 만에 먹을 고구마 3개를 사 왔다.

부족한 고구마를 나눠 먹는 동생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케네디에게 나는 혹시 꿈이 있냐고 물었다. 그의 꿈은 옥수수죽을 먹는 것과 동생들이 아프지 않게 자라는 것이었다. 내가 아프리카에서 매일 먹는 옥수수죽을 먹는 게 꿈이라는 말을 듣고, 한동안 마음이 먹먹했다. ‘나는 그걸 먹고 얼마나 투덜댔었나...’ 하며 말이다. 그날 저녁, 다큐멘터리 촬영을 마치고 온 가족이 불 앞에 둘러앉았다. 한참을 불 앞에서 앉아있는 케네디에게 뭘 하느냐고 물었는데, 방 안이 추우니까, 잠들기 전까지 불 앞에서 몸을 녹이는 거라고 이야기했다. 2평 남짓 되는 좁은 방에 많은 식구가 잠을 청해야 했고, 그 방마저 데울 연료가 없었다. 9살 케네디는 좋은 환경에서 당연하게 살아온 내게, 많은 걸 돌아보게 했다.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아왔는지 깨닫게 된 그 날, 난 지금까지 나를 둘러싼 환경에 감사함을 느꼈다.

2주간 루프완야마에서 새로운 경험을 마치고 다시 루사카로 돌아온 나는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한 명씩 생각해보았다. 아프리카 사람들 중에는 열악한 교육시설 때문에, 혹은 집이 너무 가난해서 교육을 받지 못하는 친구들도 많고, 일자리가 많지 않아 매일 땅을 파는 일을 하며 하루 천 원을 버는 친구도 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내가 봉사자라는 이유로, 혹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때론 아프리카에서 살지 않았다는 이유로 많은 것을 배려해주고, 존중해주었다.

나는 1년 동안 참 많은 사랑을 받았다.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를 배웠다. 환한 웃음을 지으며 행복해하는 친구처럼 나도 어느새 그렇게 웃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 잠비아에서 받은 사랑을 어떻게 갚을지 고민하며 살 것이다. 그들이 더 나은 미래를 살 수 있도록 기반을 닦아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날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조금이라도 그 빚을 갚고 싶다.

글 김명진 (잠비아 해외봉사 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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