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이다. 봄이 왔다. 나는 매년 이맘때면 어린 시절 머리에 ‘빵꾸’ 난 일이 생각난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다. 긴 겨울 동안 동네 친구들과 거의 하루도 안 빠지고 미나리꽝이나 강을 찾아다니며 썰매를 타다가 얼음 두께가 얇아져 더는 탈 수 없을 때가 되면, 이젠 산에 올라가서 잣 치기를 하거나 새총 싸움을 하거나 칡을 캐면서 놀았다.

이날도 친구들과 함께 동네 옆산 정상까지 올라가서 오후 내내 실컷 놀다보니 해질녘이 되었다. 그때 동네 형이 말했다. “여기서 마을까지 누가 빨리 내려가나 시합하자.” 우리는 이 말을 듣자마자 산 아래로 내달렸다. 어려서 무릎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몸은 가벼워서 날아갈 것 같았다. 우리들의 뜀박질에 노란 흙먼지가 산길에 뿌옇게 일어났고, 코로는 흙냄새, 숲 냄새,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냄새가 들어왔다. 몸을 내던지며 한쪽 발로 땅을 튕기면 몸이 용수철처럼 치솟아 족히 4~5미터나 되는 거리까지 날아갔다. 내리막길이니 가능했다.

두 번 세 번 날듯이 뛰면 이제는 한번 붙은 속도를 줄일 수가 없다. 이대로 산 아래까지 날아가는 것이다. 산에서 놀며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스릴이었다. 집에 가면 어디 돌아다니다가 이제 오느냐고 야단을 맞겠지만, 그건 나중 일이었다. 끝에서 두 번째였던 나는 꼴찌는 되기 싫었다. 내 앞을 질러가려는 친구 놈을 적당히 막으면서 달렸다. 그러다가 친구 놈이 잽싸게 앞질러 나갔고, 나는 더 힘을 써서 박차며 달려가려고 하는데, 그때 땅 위로 드러난 뿌리의 곁가지에 발이 걸렸다. 내 몸이 하늘 위로 붕 떠오르더니 머리가 먼저 땅에 떨어지면서 뾰족한 나무 밑동에 그대로 가서 푸~욱 박혀버렸다. 그 밑동은 어린 소나무를 누군가가 잘라가고 남은 것이었는데, 꼭 도끼 날 모양 같았다.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나는 내 머리가 어떻게 된 줄도 모르고 바로 일어나 산 아래로 달려갔는데, 동네 할머니가 쑥을 캐다가 얼굴에 피를 흘리며 뛰어오는 나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쑥을 뭉쳐 내 머리에 꼭 눌러준 다음 한 아이에 게 우리 아버지를 불러오라고 하셨다. 다른 한 아이에게는 된장을 가져오라고 해서 아버지가 오실 때까지 머리에 된장을 바르고 할머니의 다리를 배고 누워 있게 하셨다. 나는 그때서야 내 머리에 큰 상처가 난 걸 알았다.

며칠 앓아 누워 있는 동안, 아버지가 매일 산에 가시는 걸 보았다. 이 밤에 왜 산에 가시지? 우리는 농사를 짓거나 짐승을 기르지 않기 때문에 아버지가 산에 올라가실 일은 없다. 며칠 지나서 어머니가 말씀해 주셨다. “산에 어떤 놈이 위험하게 나무 밑동을 그런 식으로 남겨놓았냐?”고 화를 내시면서 아이들이 다니는 산길을 찾아다니며 그런 밑동을 아예 다 잘라 버리거나 위험하지 않게 다른 것으로 덮는 작업을 하셨다고 했다. 내 머리를 파고 들어간 나무 밑동, 땅 위로 드러나 걸림새가 되는 뿌리들을 도끼와 톱으로 보이는 대로 없앤 것이었다. 꼭 그것 때문은 아니겠지만, 덕분에 나는 두 번 다시 산에서 놀다가 다치는 일은 없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지금의 삶이 어떠하든 우리는 많은 사랑을 받으며 여기까지 왔다. 지금 나에게는 아버지, 어머니가 안 계신다. 그러나 두 분은 나에게 ‘사랑’이라는 씨앗을 심어 주셨다. 그 사랑이 쉬 깨질까 봐 희생이라는 껍질로 감싸 아들의 가슴에 넣어 주셨다. 두 분이 나에게 심어준 씨앗은 내 안에서 자라 많은 결실을 얻게 했다. 이제는 내가 나의 세 아들들에게 ‘씨앗’을 심는다. 나의 부모님만큼 큰 어려움을 겪으며 희생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만큼은 듬뿍 담아 심어본다. 어렵고 힘들어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이 되어줄 ‘씨앗’을.

나와 우리 팀원들은 투머로우에 많은 분들의 마음에서 나온 ‘씨앗’을 담았다. ‘투머로우 호’가 ‘씨앗’을 싣고 여러분들이 있는 항구로 간다. 다들 대박만 바라고 있을 때 우리는 땅을 가꾸어 씨앗을 심고, 이 씨앗으로 우리의 자녀와 가족들이 살고 이 사회가 살아나는 것을 볼 것이다.

글 박문택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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