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게 사고하지 못하고 떠오르는 생각에 사로잡혀 불행을 끌어안고 살았던 김효은 씨. 해외로 봉사를 갔을 때 처음으로 그런 자신을 바로 보았고,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배울 수 있었다. 그때부터 그는 듣고 배우고,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전혀 다른 세상을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던 걸까?

나에게는 아주 고질적인 버릇이 있다. 쉽게 포기하고 주저앉으면서 ‘나는 불행한 사람’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그 때문에 나는 어려서부터 오랜 시간을 불행한 사람으로 살았다. 회사에 적응하지 못해 이직이 잦으셨던 아버지, 게임한다고 매일같이 부모님과 싸우는 남동생… 이런 환경들이 나를 불행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커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이해력이 부족한 것이, 볼품없는 외모가 내 불행의 주된 이유였다. 그런 나에게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라며 응원해주던 분들도 있었지만, 그 응원의 효력은 잠깐이었다. 돌아서면, 너무 선명하게 보이는 나의 단점들이 다시 나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이런 나의 고민을 아셨던 걸까. 내가 대학에 입학한 후 부모님은 해외 봉사를 권하셨고, 그 덕분에 나는 1학년을 마치고 아프리카 에스와티니로 떠났다. 색다른 경험을 하며 ‘좀 더 번듯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 컸다.

하지만 그 나라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불행한 새로운 이유를 발견했다. 한국에서 온 여덟 명의 단원들과 함께 활동했는데, 모두 굉장히 활발하고 무슨 일이든 꼼꼼하게 잘했다. 반면에 나는 친구들에게 말 한번 걸기 쉽지 않았고, 혼자 겉도는 기분이었다. ‘나는 성격이 왜 이렇게 소심한 거지?’ 내 생각의 종착지는 결국 불행이라 부르는 그곳이었다. 이후에도 댄스나 노래, 공연이나 행사를 준비할 때마다 불행의 이유가 무수히 늘어났다. ‘나는 왜 이렇게 댄스를 못 하지?’ ‘나는 왜 이렇게 일하는 속도가 느릴까?’ ‘역시 난 이해력이 부족해.’ 시간이 지날수록 자괴감은 점점 커졌다. 누가 나의 실수를 지적하며 수정할 것을 요청하면 잘 듣지 못했다. ‘나는 못 할 거야, 나는 못 났어’라는 생각만 앞섰다.

어느 날, 지부장님이 나를 부르더니 “효은아, 이번에 네가 한국어 캠프를 진행해 봐.”라고 하셨다.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여덟 명 중 가장 부족한 나에게 행사를 맡기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무엇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혼자 끙끙거리며 힘겨워했다. 모르는 게 있어도 혼날까봐 눈치를 보느라 지부장님에게 자주 묻지도 못했다. 결국, 크고 작은 실수들이 곳곳에서 속출했다. 지부장님을 찾아갔다. 혼날 줄 알았던 내 추측과 달리 지부장님은 내 마음이 어떤지를 물으셨다. 나는 가슴에 가득 차 있는 ‘삶의 불행한 이유들’을 열거하며, 그 이유로 새로운 일이 두렵고 피하고만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내 모습이 싫지만 앞으로도 이렇게 살 것 같다고 했다. 그러자 지부장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효은아, 네가 이해력이 부족해서 못 하는 게 아니야. 못 한다는 생각이 너를 안 되는 사람, 못 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거야. 네가 부족하고 불행하다는 생각만 품고 살면 넌 아무것도 배울 수가 없어.”

내 부족함이, 좋지 않은 상황들이 나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여겼지, ‘나는 부족하고 불행하다’는 생각이 나를 망치고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나를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내 처지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어쩌면 그 생각이 나를 망쳤던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그때부터 내안에서 나오는 생각과 싸워보고 싶었다.

처음엔 익숙한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작은 일을 하다가 실수가 생기면 ‘나는 역시 안 돼’라는 생각에 급격히 슬퍼졌다. 하지만 그때마다 지부장님을 찾아갔고, 지부장님은 내게 늘 같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못 한다는 네 생각이 너를 못 하게 만드는 거야. 혼나면 혼나겠다는 마음으로 뭐든지 온 마음으로 해봐. 괜찮아.” 그렇게 한 번, 두 번, 세 번 내 생각과 싸워나갔다. 그때부터 동료 단원들이 내게 하는 말이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준비물은 하나씩 적어서 직접 확인하는 거구나.’ ‘일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물어보면서 같이 하는 거구나.’ ‘내가 영어가 서툴러도 일단 가서 사람들과 이야기하면 영어 실력이 자라는구나.’

하루는 아침 청소 시간에 지부장님이 나를 불러 이렇게 말하셨다. “효은아,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온 마음으로 하는 법을 배우면 좋아. 청소뿐 아니라 사람을 대할 때에도 온 마음으로 해봐.” 사실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 말을 따라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편하려고 대충 했던 청소를 온 마음으로 해보았다. 뭐가 좋은 건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었지만, 마음이 상쾌했다.

사람들을 마음으로 대하면 무엇이 좋은지 궁금해 무작정 현지 사람들을 찾아갔다. 봉사센터에서 식사를 담당하시는 아주머니의 빠듯한 일과를 보고 “너무 감사해요.”라고 내 마음을 표현하기도 하고, 현지 또래 친구들과 서로 얘기하며 고민을 나누기도 했다. 그들에게 우리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면 나를 무척 부러워했다. 에스와티니에는 가족에 대한 상처가 있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들은 나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으며 살았지만 나와 달리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았고, 마음을 열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배우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을 보며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불행한 요소로 꼽았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닐 수 있구나. 어려운 상황에 있다고 해서 불행하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니구나.’

한국어 캠프에서 한국 라면을 소개했다. 에스와티니 사람들은 '매운데 너무 맛있다'며 남은 국물에 옥수수 가루로 만든 현지 주식인 '빱'을 함께 먹었다.
한국어 캠프에서 한국 라면을 소개했다. 에스와티니 사람들은 '매운데 너무 맛있다'며 남은 국물에 옥수수 가루로 만든 현지 주식인 '빱'을 함께 먹었다.

에스와티니에서 지내면서 전혀 몰랐던 새로운 세계를 한 발짝 두 발짝 내딛고 알아가면서, 나는 어느새 울상 짓는 날보다 웃는 날이 더 많아졌다. 특히 내 생일 저녁을 잊지 못한다. 많은 현지 친구들이 내가 좋아하는 과자와 과일을 잔뜩 선물해 줬는데, 그게 얼마나 귀한 음식인지 알기에 그 자리에서 펑펑 울고 말았다. 불행해서가 아니라 너무 행복해서 말이다. 

나는 일주일 후면 소중한 추억들을 뒤로 한 채 한국으로 다시 돌아간다. 가면 가장 먼저 부모님에게 ‘나를 에스와티니로 보내주어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다. 그리고 지난 일 년간 이곳에서 느끼고 배웠던 것들을 하나하나 이야기하고 싶다. 한국에서 늘 엄마 아빠에게 나를 왜 이렇게 부족한 사람으로 태어나게 했느냐고 따지며 상처만 줘서 죄송하다고, 그게 좁은 내 생각 안에서 살았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고,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이 너무 많다는 걸 안다고, 그리고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외치고 싶다.

글쓴이 김효은

현재 원광대학교 가정 아동복지학과에 재학중이다. 에스와티니에서 1년간 해외봉사를 하며 청소년 인성 교육 분야에서 일하고 싶은 꿈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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