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한자에게 굿바이 인사를 했던 내가 중국어과를?

내가 처음 한자를 접한 건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우리 학교는 수능을 마친 고3 학생들에게 별도로 ‘졸업시험’을 치르게 했는데, 이때 시험 과목이 영어와 한자였다. 나는 ‘유종의 미’를 거두겠노라며 열심히 공부했지만, 그림처럼 생겨서 독음에 뜻까지 외워야 하는 한자가 너무 어려웠다. 결국 나는 졸업시험 중 한자 시험은 꼴등을 했고,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 한자에게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라는 굿바이 인사를 남겼다. 

그러나 그후,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수능 점수에 맞춰 지원했던 학과에 모조리 떨어지고, 안정적으로 지원한 ‘중국어과’에만 합격한 것이다. 그 학교에 입학하면 성적 장학금을 받으며 다닐 수 있었기에, 울며 겨자먹기로 입학을 결정했다. 하지만 한자를 기반으로 하는 중국어는 하나부터 열까지 나와 맞지 않았다. 전공수업 시간마다 맨 앞자리에 앉아 누구보다 열심히 수업을 듣고, 매일같이 도서관에서 공부했음에도, 낙제점을 받으며 1학년 1학기를 마쳤다. 그날 처음으로 ‘인생이 내 마음대로 흘러가진 않구나…’ 생각했다.

방학 동안 ‘다른 학과로 전과를 할까? 재수를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고등학교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답답한 심정에 이런저런 고민을 선생님께 털어놓았더니, “원래 중국어는 어려워! 어려워서 하기 싫고, 점수도 안 나오는 공부를 왜 해야 하나 싶겠지만,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일수록 포기하지 말고 부딪혀봐. 그 다음엔 직접 중어권을 가보는 건 어때?” 라고 말씀해주셨다. 말씀을 듣고 보니, 안 맞는다고 포기하는 것보다 더 부딪혀 보는 게 지혜로워 보였다. 다만 중국어 공부를 할 때마다 힘들고 짜증스러운 기분이었는데, 앞으론 즐겁게 중국어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2학기를 보낸 결과, 모든 전공에서 B + 이상의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이 시험 점수가 신기하기도 했지만, 절대 안 맞을거라 생각했던 중국어를 배우는 즐거움을 알았다. 그후 ‘중어권을 가보는 건 어떠냐’는 제안대로, 해외봉사를 대만으로 떠났다.

열심히 할수록 갈등은 커졌다

내가 대만에서 한 봉사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행사는 대만 이란시市에서 열린 국제 댄스 페스티벌에 한국대표로 참가한 것이다. 외국에서 한국 대표로 우리나라 문화를 춤으로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이 너무 영광스러웠다. 다신 오지 않을 기회라는 생각에 봉사단원들은 매일 10시간씩 댄스 연습을 했고, 손수 의상과 소품을 만들며 열심히 준비했다. 그 결과 우리는 이란 시장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이외에도 어떤 활동을 하든지 최선을 다했다. 한국에 관심 있는 대만 학생들을 모아 한글 아카데미와 태권도 아카데미를 진행할 때도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였고, 망고 농장에 갔을 때도, 농촌 봉사를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쉴 새 없이 최선을 다해 봉사활동을 하면 내 스스로가 뿌듯할 뿐만 아니라 모두가 나를 인정해주고, 잘했다고 칭찬해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반대로 나는 늘 함께 봉사활동을 하는 단원들과 끊임없이 갈등을 겪었다.

나는 일을 할 때마다 다른 단원들이 답답했다. 한 친구가 갈피를 못 잡고 허둥대는 걸 보면, 차분히 알려주거나 기다려주지 않고 그냥 내가 했다. 그리곤 가차 없이 “왜 이렇게 하느냐?” 따져 묻거나 뭐가 잘못됐는지 지적했다. 나의 말에 상대방은 상처를 받아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거나, 싸우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나는 속으로 ‘자기가 잘못했으면서!’라며 나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어느 날, 나와 가장 친한 친구가 말했다. “다은아, 너는 꼭 선생님 같아. 네가 서툰 게 있듯이 나도 못하는 게 많아. 그렇기 때문에 서로 도와주며 지내는 거라 생각해. 그런데 너는 늘 다른 사람이 못하는 걸 지적하려고만 하지, 네가 뭐가 부족한지는 들어보려고 하지 않아. 네가 그럴 때마다 난 늘 상처받고, 우린 친구가 아닌 거 같아.” 친구의 그 말은 너무 충격적이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늘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니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쥐구멍이 있다면 그곳에 들어가 숨고 싶었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함께 지낸 모든 단원들에게 가서 진심으로 사과했다. 나라면 사과를 해도 안받아줄 것 같은데, 오히려 그들 모두는 ‘사과를 해줘서 고맙다’며 되레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그때부터였다. 조금 부족해도 함께 하는 것이 즐거워졌다. 서로 돕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는 것이 행복했다.

1년 봉사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갑작스레 비자가 6개월 연장됐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며 대만 친구들은 “이건 대만에 남으라는 운명이야!”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 말이 나에게도 와 닿았다. ‘대만에 있는 시간이 너무 행복했는데, 좀 더 있을 순 없을까?’ 하는 고민과 중국어를 더 배우고 싶은 욕심도 생겼기에, 이곳에 남아 봉사를 계속하면서 유학을 하기로 결정했다.

‘리우꾸이’ 지역의 망고농장에 자주 가서 일손을 보탰다. 그때마다 어른 팔뚝만한 망고를 따기도 하고, 먹기도 했다. 수고한다며 망고와 밥을 차려주시던 분들이 그립다.
‘리우꾸이’ 지역의 망고농장에 자주 가서 일손을 보탰다. 그때마다 어른 팔뚝만한 망고를 따기도 하고, 먹기도 했다. 수고한다며 망고와 밥을 차려주시던 분들이 그립다.

친구 사귀는 법을 가르쳐준 대만

대만은 언어도, 날씨도, 문화도, 심지어 버스 색깔도 우리나라와 다르다. 우리나라와 멀지 않지만, 너무나도 다른 세상이다. 눈이 내리는 한국의 겨울과는 달리, 대만에선 고산지대에만 살짝 내릴 뿐, 연중 내내 온화한 기후다. 도로에는 흰색, 노란색, 초록색 등 다양한 색을 가진 버스들이 지나가고, 수많은 오토바이들이 도로를 촘촘히 채우고 있다. 그리고 대만에는 외국인들이 많이 사는데, 다양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만큼 이곳의 사람들은 국제적인 매너가 몸에 배어 있다. 누굴 만나도 친절하게 대해주기 때문에 처음 친구를 사귈 때 어렵지 않게 친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분명 친하긴 하지만 ‘보이지 않는 선’으로 가로 막혀 있었다. 개인적으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연락이 되지 않고, 또 시간이 지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타났다. 힘이 되고 싶고, 보탬이 되는 일이라면 도와주고 싶었지만, 무슨 일이 있었냐는 질문에 입을 닫는 대만 친구들을 보면서 답답하기도 했다. 겉만 친해 보이는 그 정도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에게 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던 나의 단점부터, 어린 시절 겪었던 가난, 동생들과의 추억 등 시시콜콜한 일들까지 말이다. 그렇게 몇 달을 지냈는데, 친구들이 내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아무에게도 꺼내놓지 않았던 가족 이야기, 학창시절, 그리고 어려웠던 일들을 입술을 덜덜 떨며 내게 말했는데, 그날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너무 고마웠다. 겉으로는 문제 없어 보였던 친구가 짊어진 무게를 비로소 나누는 시간이었다. 그 이후로 더 많은 대만 친구들과 깊게 교류할 수 있었다.

이란시市에서 열린 국제 댄스 페스티벌에 참가한 김다은 씨(사진 가운데)와 봉사단원들.입은 옷 뿐 아니라 소품을 직접 만들 정도로 열성을 다했고, 그 결과 국제 대회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였다.
이란시市에서 열린 국제 댄스 페스티벌에 참가한 김다은 씨(사진 가운데)와 봉사단원들.입은 옷 뿐 아니라 소품을 직접 만들 정도로 열성을 다했고, 그 결과 국제 대회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였다.

최근에 나는 학교를 가다가 맨홀 뚜껑에 미끄러져 다리가 부러졌다. 두 개의 뼈가 부러진 엑스레이 사진을 본 의사선생님께서 걷다가 넘어진 게 맞느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다리를 깁스한 채 병원에 누워 있는데, 대만 친구들이 왔다. 내가 좋아하는 과자랑 음료수를 사와서 같이 나눠 먹고, 혼자 누워 있으면 심심할까봐 하루 종일 내 옆에 앉아서 말동무를 해주었다. 씻지 못하고 있는 나를 보더니, 물수건으로 닦아주고, 머리도 감겨주었다. 정말 가족들만 할 수 있는 일들을 묵묵히 해주었다. 그들 덕분에 아파도 외롭지 않고, 힘들지 않다.

나는 잠시 한국에 갔다가 다시 대만으로 돌아와 지낼 것이다. 앞으로 내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지만, 지금처럼 ‘행복하게 사는 법’을 하나씩 배워나가고 싶다. 절대 배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나도 몰랐던 나의 모습을 보며 서로 도우며 사는 기쁨도 알았고, 진심으로 서로를 위하는 친구를 사귀는 법도 배웠다. 그리고 그 배움은 나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으로 한 발짝씩 이끌어주었다. 아마 이것이 내가 대만으로 다시 돌아가는 이유일 것이다.

글 김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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