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Therapy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노인과 바다>는 미국의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1952년에 쓴 중편 소설이다. 그의 나이 54세에 발표한 이 작품은 수많은 사람에게 찬사를 받았으며, 헤밍웨이에게 퓰리처상과 노벨 문학상을 안겨주었다.

소설은 쿠바의 수도 아바나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주인공의 이름은 산티아고. 여든이 훌쩍 넘은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조각배를 타고 단신으로 고기를 잡는 노인이다. 그는 벌써 84일째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마을 사람들은 그의 운이 다했다고 수군거린다.

노인은 몇 년 전에 아내를 잃고 혼자 살고 있었다. 그는 마을 사람들과 특별한 유대 관계가 없지만, 다섯 살 때부터 노인에게 고기잡이를 배운 소년만 그를 따른다. 하지만 노인이 고기를 계속 잡지 못하자 소년의 부모는 아이를 다른 배에 타게 한다. 그래도 소년은 매일 노인을 찾아와 식사를 챙겨주고, 자신이 고깃배를 타서 번 돈으로 낚시 미끼로 쓸 정어리를 사다 노인에게 준다. 소년은 말한다.

“고기를 잘 잡는 어부는 많이 있고, 또 아주 뛰어난 어부도 더러 있죠. 하지만 할아버지에게 비길 만한 사람은 없어요.”

85일째 되던 날, 노인은 다시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간다. 그날, 노인의 눈은 어쩐지 빛이 났다. 노인은 바다를, 필요한 것을 어떻게든 얻기만 하면 된다고 여기는 어부들과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바다는 어부가 숙명인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주는 곳이며, 때론 무섭게 굴거나 재앙을 끼치는 일이 있어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섭리라고 여겼다.

깊은 바다에서 노인은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본다. 시간이 흐르고, 군함새가 검은 날개를 펴고 빙빙 돌고 날치가 물위로 튀어올라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것을 보면서, 노인은 바다에서 얻은 오랜 경험으로 주변에 큰 물고기가 있다는 걸 직감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굉장히 큰 물고기가 노인이 던져놓은 낚시의 정어리 미끼를 삼킨다. 낚싯줄을 통해 엄청난 힘이 느껴지고, 노인의 배는 도망치려는 물고기에게 끌려 점점 먼 바다로 간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해가 지고 날씨가 쌀쌀해졌다. 낚싯줄을 잡고 있는 노인의 손에 점점 쥐가 나고, 어깨에 걸친 낚싯줄에서는 고기의 거센 힘이 연신 느껴진다.

밤이 지나가고 다음날 아침, 물고기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의 배보다 2피트나 더 큰 거대한 청새치, 노인의 힘으로는 끌어당길 수 없는 엄청난 녀석이었다. 노인은 힘겹지만 낚싯줄을 놓지 않는다.

망망대해에서 노인은 종종 소년을 그리워한다. ‘그 애가 있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나를 도와주고, 이런 근사한 구경도 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야.’ 그러다 고기에게 혼잣말을 한다. “고기야, 죽을 때까지 너하고 같이 있으마. 고기야, 난 네가 좋다. 또 너를 대단히 존경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오늘 해지기 전에 너는 내 손에 반드시 죽을 거야.”

낚싯줄은 여전히 팽팽하고, 줄을 쥔 노인의 손이 뒤틀린다. 노인은 넌더리를 내며 손을 내려다본다. “도대체 어떻게 된 놈의 손이야? 쥐가 나려면 나보라지. 제 마음대로 매 발톱처럼 오그라들어 보라고. 그래야 소용없을 걸.” 고기와 긴 싸움을 이어가기 위해 노인은 다랑어 살 한 점을 떼어먹는다. 고통은 여전했지만, 고기에게 인간이 얼마나 역경을 잘 견뎌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겠다고 말한다.

바다에 나온 뒤 세 번째 아침 해가 솟고, 물고기가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잠을 못잔 노인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고, 껍질이 벗겨진 양손에, 의식은 가물거린다. 그러나 노인은 마침내 작살로 청새치를 찔러 죽이고, 고기를 배에 붙들어 맨 뒤 항구로 돌아간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작살에 찔린 물고기의 피 냄새를 맡은 상어가 나타난다. 배는 작고, 상어는 사나웠다. 노인은 고기를 뜯어먹는 상어에게 온 힘을 쏟아 작살을 내리꽂는다.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인간은 파멸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어.”라고 하면서. 상어를 죽였지만 항구까지는 한참을 더 가야 했다.

얼마 안 되어 상어 떼가 또 몰려들었다. 노인은 “놈들과 죽을 때까지 싸우겠어.” 하며 끝까지 싸운다. 하지만 청새치는 결국 앙상한 뼈만 남는다. 노인은 더 이상 고기를 보지 않은 채 항구로 향한다. 가는 길에 그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그리 녹초가 되었는지 자문한다. “아무것도 없어. 다만 너무 멀리 나갔을 뿐이야.” 마을로 돌아온 노인은 자신의 오두막에서 쓰러지듯 잠이 든다. 그런 노인의 곁을 지키며 소년은 눈물을 흘린다. 지쳐 쓰러진 노인은, 젊은 시절에 보았던 아프리카 사자 꿈을 꾼다.

헤밍웨이가 그린 ‘노인’

얼마 전, <노인과 바다>로 독서 토론 준비를 했다. <노인과 바다>는 세상을 나타내는 바다에서 작은 배를 타고 살아가는 모습을 담은, 인생 이야기로 이해된다. 소설이 처음 발표된 뒤 “치열한 삶 뒤에 남는 것이 ‘앙상한 뼈’일지라도 패배하지 않겠다며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가는 모습이 존경스럽다”는 호평을 받았다. 오늘날까지도 <노인과 바다>는 ‘희망을 잃지 않는 삶’ ‘의지’ ‘인간의 선한 싸움’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옆에는 ‘우울증’이나 ‘헤밍웨이의 자살’ 등이 함께 붙어 있다. 헤밍웨이는 말년에 비행기 사고를 두 차례 당하며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 등으로 힘들어하다가, 소설 속 주인공인 노인과는 사뭇 다른 모습인 엽총 자살로 삶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을 대하며 사람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이런 물음을 이어왔다.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는가?’ ‘희망을 이야기한 그가 왜 희망을 품지 못했는가?’ 나 또한 궁금해 책을 몇 차례 읽으며 그 답을 찾아보았다.

헤밍웨이의 삶은 소설 같았다. 그는 기자, 특파원, 참전 용사, 소설가 등 여러 모습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포탄에 맞아 부상을 당하기도 했고,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기도 했으며, 미국인들에게 ‘파파’라는 애칭으로 불릴 만큼 큰 인기와 부를 누리기도 했다. 그런 길들을 지나, 헤밍웨이는 멋진 인간과 가치 있는 삶의 표상으로 ‘노인’을 그려낸 것이다.

바다를 이기려 하지 않고 그 안에 안겨 동행하며, 돈이나 명예에 대하여는 초연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과 어려움에는 결코 패배하지 않으려고 죽기까지 투쟁하는 노인. 모든 것을 쏟아부어 잡은 물고기를 상어들에게 다 잃고 큰 부상도 당했지만 아무것도 잃지 않은 듯 평안하게 잠이 드는 노인. 그리고 굴복하지 않는 의지의 상징인 사자 꿈을 꾸는 노인. 헤밍웨이가 그린 노인은, 겉모습은 볼품없지만 내면은 순수하고 강하며 초월적이다. 마을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하지만 순수한 소년만은 알아보는, 순전한 가치를 지닌 인물이다.

운명의 장난처럼, <노인과 바다>를 펴낸 후 헤밍웨이는 큰 문제들을 만난다. 그때 그는, 자신을 내려놓고 초연하게 싸웠던 노인과 달리 술을 의지하고 우울증으로 무너진다. 쿠바에서 미국으로 돌아와 우울증을 치료하려 했지만 호전되지 않고 기억마저 잃어가자 그는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소설에서는 무릎 꿇지 않는 초연한 의지를 가진 인간을 그렸지만, 자신이 무너져내릴 때 그는 존재해야 할 의미를 잃은 것이다.

패배했을 때에도 쉴 수 있다면

어떤 이는 헤밍웨이가 결국 자신과의 싸움에서 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헤밍웨이와 다르게 노인의 길을 제대로 걸어야 한다고 덧붙이면서. 하지만 노인처럼 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죽기까지 패배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살면 어떤 비참한 순간에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헤밍웨이의 죽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큰아들이 취직시험을 준비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당시 내가 아들을 위할 수 있는 일은,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열심히 하라는 말뿐이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시험에 떨어졌을 때까지 아들의 마음 또한 나와 같았다. 더 열심히 노력하면 될 거라고, 마음을 다잡고 공부했다. 그런데 세 번째 시험에 떨어지자 아들은 방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들었지만, ‘난 안돼’라는 생각에 잡혀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며칠 뒤, 소식을 들은 선생님에게서 연락이 왔고, 전화를 받고 나갔다 온 아들의 얼굴이 한층 밝아 보였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혼자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도움받는 걸 부끄럽게 여겼는데, 그게 아니란 걸 알았어요. 선생님이 도와주시겠대요. 친구들에게도, 선배들에게도 물어보려고요.”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선생님에게 무척 고마웠다. 주저앉은 아들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아들에게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해에 아들은 선생님과 선배들에게 자주 오가며 물었고, 다음 해에 원하는 회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입사 후에도 어려움이 생기면 선배, 선생님, 그리고 가족들에게 찾아와 묻고 배우며 어려운 고개들을 하나하나 넘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아들은 때론 도움을 받아 고마워하고, 때론 누군가를 도우며 밝게 지냈다.

큰아들의 변화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누구나 실패하거나 비참한 존재가 되는 것을 싫어하지만, 어쩌면 사람은 그때 더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오랫동안 했다. 그 시절을 떠올리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헤밍웨이가 죽음을 선택한 것은, 비참해져도 쉴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음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산티아고 노인처럼 마지막까지 물러서지 않으며, 힘을 다 쏟아서 얻은 것을 잃어도 실망하지 않고 내일을 준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에게도 박수 받을 만한, 대단한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어떤 경우에도 좌절하지 않을 수 있을까.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면 누구나 주저앉지 않을까. 초연하게 사는 것만이 가치 있는 삶이라 여기면 그렇게 하지 못할 상황이 찾아올 때,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물러서지 않는 것만 멋있고 아름다울까? 올곧게 설 때도 있지만 때론 모자람과 실패를 인정하고 마음으로 고개를 숙여도 멋있고 아름답지 않을까. 패배했을 때에도 쉴 수 있다면 그 사람이 강한 사람,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우리가 어릴 적에는 넘어지는 것이 부끄럽지 않고, 부모님의 손을 잡고 일어나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넘어지는 것이 부끄럽고, 도움을 받는 것도 달갑지 않은 일이 되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넘어져도 당황하지 않고 마음이 쉬며, 도움을 받아 일어서서 감사가 가득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정말 강하고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그런 사람이야말로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서 가면 되기 때문이다.

헤밍웨이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살았고,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그 시대 최고의 작가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어떤 부분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지도 모른다. 만약 그가 ‘내게도 이렇게 약한 면이 있구나. 내 마음은 절망으로 뒤덮였는데 이런 마음에 희망을 넣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하며, 자신 같은 처지에서 행복을 찾은 사람을 찾으려고 했다면 어땠을까? 그를 찾아가 길을 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산티아고 노인은 3일 동안 거대한 청새치와 싸우며 문득문득 소년을 그리워했다. 작은 도움들을 받고 싶고, 청새치를 잡는 멋진 장면을 소년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 그리움도 소중하고 아름답지만, 우리가 실패했을 때 그리운 사람이 있다면 더 소중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노인의 가치를 알고 따르며 함께하는 소년만 아니라, 사자의 꿈을 꿀 수 없는 초라한 날에도 따뜻한 마음으로 함께 지낼 수 있는 사람이 노인 곁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상상을 하며 나는 책장을 덮었다.

글쓴이 심문자

서울과학기술대학 사회교육개발원에서 독서교육을, 방정환 교육센터에서 부모교육을 하고 있다. 예루살렘 라디오 ‘북적북적 북클럽’ 진행자이다. 독서지도사, 청소년상담사, 독서논술교사 등 책과 관련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노인과 바다>는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1952년에 발표한 중편 소설이다. 한 노인의 실존적 투쟁과 불굴의 의지를 절제된 문장으로 강렬하게 그려냈다. 십여 년 동안 이렇다 할 작품을 내놓지 못했던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작가로서의 명성을 회복했다. 대표작으로 <무기여 잘 있어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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