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를 맞은 사람들이 있다. 그 지점은 첫 취직일 수도 있고, 가족의 소중함을 발견한 때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도움을 얻었을 때가 되기도 한다. 어떤 계기이든, 그때부터 삶의 방향과 의미가 달라진다. 기자는 많은 사람들이 터닝 포인트로 꼽는 것 중 하나가 ‘해외봉사’라고 생각한다. 해외봉사를 떠나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겪어본 적 없는 경험을 하고, 전혀 다른 문화를 영위하는 사람들을 만나며 그 전과는 전혀 다른 마음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이번에 만난 이규환 씨도 그랬다. 그는 미얀마로 해외봉사를 다녀왔고, 그곳에서 세 가지 선물을 받았다. 미얀마가 준 선물이 이규환 씨에게 어떤 터닝 포인트가 됐는지 궁금해 그를 만났다.

이규환구미대학교 마케팅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직장생활을 하다 28살에 굿뉴스코 해외봉사단으로 1년 간 미얀마에 다녀왔다. 현재 KAF 합성섬유 제조회사에 다니며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이규환구미대학교 마케팅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직장생활을 하다 28살에 굿뉴스코 해외봉사단으로 1년 간 미얀마에 다녀왔다. 현재 KAF 합성섬유 제조회사에 다니며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28살에 해외봉사를 떠났는데, 늦은 나이에 가셨네요.

제가 고등학생 때부터 주변에 해외봉사를 다녀온 형 누나들이 많았어요. 까맣게 탄 얼굴로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들을 보면서 ‘나도 대학생이 되면 꼭 해외봉사를 가야겠다’ 생각했는데,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오니까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빨리 졸업해서 돈을 벌고 싶었어요.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바로 취업했습니다. 그 당시를 되돌아보면 어린 동생이 이제 막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 보였습니다. 얼른 돈을 벌어서 집에 경제적인 보탬이 되고 싶었습니다.

5년 정도 여러 회사를 다니며 직장생활을 했었는데, 마지막에 다녔던 회사가 경영난을 겪으면서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다니던 직장이 갑작스럽게 없어지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예전에 가고 싶었던 해외봉사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과 상의한 뒤 미얀마로 해외봉사를 떠났습니다.

미얀마로 가게 된 이유가 있나요?

제 어머니가 미얀마 분이신데요. 어렸을 적부터 미얀마에 계신 친척들과 어머니의 지인 분들이 자주 놀러 오라고 말씀하셨어요. ‘가야지, 가야지’ 하면서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해외봉사를 가게 되면 꼭 미얀마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엄마의 나라는 어떤 곳일까?’ 하는 궁금증도 있었고요. 그래서 고민 없이 미얀마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미얀마에 갔을 때 코로나19가 너무 심해져서 밖에 자주 나가지 못했습니다. 사람들도 많이 못 만났고요. 그래서 ‘좀 더 빨리 왔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미얀마 말을 배우면서 엄마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엄마가 한국에서 사신 지 꽤 오래되었는데도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시지 못합니다. 사실 이 부분을 특별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제가 미얀마에 가서 말을 배워보니까 말 배우는 게 정말 어렵더라고요. 그래도 저는 미얀마 친구들이 언어를 많이 가르쳐주고 한국어도 물어보며 자주 말을 걸어주어서 그나마 쉽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엄마가 한국어를 배울 때 많이 어려웠겠다, 외로웠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좀 가르쳐드렸다면 엄마가 훨씬 쉽게 한글을 배우셨을 텐데요. 이 외에도 미얀마 음식이나 문화에 적응하느라 고생을 했는데, 그때마다 ‘엄마도 한국 음식에 적응하느라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한국 음식이 입에 안 맞을 수도 있고, 저한테 음식을 해주실 때도 맘 편히 물어볼 곳이 없으셨을 테니까요.

미얀마 피아폰Pyapon에 위치한 따웅와인Taung Wine 산에 오른 이규환 씨(맨 앞). 높지는 않지만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경치가 일품이라,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이다. 밖을 나서는 일이 거의 없던 차에 코로나 경계가 풀려 미얀마 친구들과 산에 올랐다.
미얀마 피아폰Pyapon에 위치한 따웅와인Taung Wine 산에 오른 이규환 씨(맨 앞). 높지는 않지만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경치가 일품이라,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이다. 밖을 나서는 일이 거의 없던 차에 코로나 경계가 풀려 미얀마 친구들과 산에 올랐다.

미얀마 해외봉사가 이규환 씨에게 준 첫 번째 선물을 꼽자면, ‘엄마를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다. 엄마가 자란 동네를 보고, 미얀마 음식을 먹고 언어를 배우며 엄마를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지만 한 번씩 이해하기 어려웠던 엄마를, 미얀마에 가서 만난 것이다. 타국에서 느꼈을 엄마의 외로움과 고됨을 처음으로 경험하며, 무심하고 무뚝뚝한 성격 탓에 엄마에게 살갑게 다가가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죄송함과 감사함을 느꼈다.

코로나 때문에 해외봉사활동에 제약이 많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지내셨나요?

다른 나라도 사정이 비슷하겠지만 미얀마는 야외 활동 제약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을 굿뉴스코 센터 안에서 보냈습니다. 현지 친구들과 줌Zoom으로 만나 ‘한글 아카데미’ 같은 활동을 하며 시간을 보냈지요. 다양한 프로그램을 영상으로 진행하다 보니 영상 찍는 방법도 배우고, 편집도 배우면서요.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K-Pop 노래 부르기 대회를 열었던 겁니다. 미얀마 친구들이 노래를 정말 잘 부르고 K-Pop을 좋아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미얀마는 학교에서 음악을 공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음악에 소질 있는 친구들이 정말 많아서,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서는 코로나를 다 잊을 만큼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많이 혼나면서 지냈습니다. 제가 다른 단원들보다 나이가 많고 사회생활 경험도 있다 보니 일을 알아서 처리할 때가 많았거든요. 미얀마 사정도 잘 모르면서 일을 진행하고, 행사 규모를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제 마음대로 하다가 봉사단 지부장님께 꾸중을 들었죠. “묻고 상의하면서 일을 진행하면 훨씬 빠르고 수월하게 됐을 텐데, 왜 묻질 않았냐?” 하시는데, 제가 미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론 어떤 일을 맡든지 지부장님께 여쭤보고, 함께 일하는 친구들과 의견을 나누면서 일했는데요. 혼자 일할 때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걸 보며 제 모습을 많이 돌아보게 됐습니다.

어떤 모습을 돌아보게 됐나요?

저는 ‘이렇게 하는 게 좋을 거야’라고 혼자 판단하고 진행할 때가 많았어요. 졸업하고 취업했을 때에도 부모님께 거의 통보하다시피 말씀드렸고, 가족들 중 누구도 제게 “집에 보탬이 돼야 한다”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혼자 어깨에 짐을 얹고 살았던 것 같아요. ‘내가 쉬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요.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했고, 이런 제 마음을 털어놓지도 못했어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다녔던 회사가 어려워졌을 땐 속으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어깨가 점점 무거워져서 쉬고 싶었거든요. 그런 제 마음을 아셨는지, 아버지께서 먼저 “네가 가고 싶었던 해외봉사를 가보는 게 어떻겠냐?” 말씀해 주셔서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미얀마로 갈 수 있었어요. 만약 먼저 이야기해주시지 않았다면 또 ‘이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일을 시작했을지 몰라요. 누구에게 의견을 묻거나 들어보지 않고 ‘내가 보기에 좋은 대로’ 했었죠. 그런 제 모습을 많이 되돌아본 것 같아요.

노래뿐만 아니라 춤도 잘 추는 미얀마 친구들과 세계적인 관광명소인 쉐다곤 파고다 앞에서 뮤직비디오 촬영을 했다. (뒷줄 왼쪽 끝).
노래뿐만 아니라 춤도 잘 추는 미얀마 친구들과 세계적인 관광명소인 쉐다곤 파고다 앞에서 뮤직비디오 촬영을 했다. (뒷줄 왼쪽 끝).

그가 미얀마에서 받은 두 번째 선물은 ‘쉼’이었다. 한국에서 그는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했다. 미얀마로 떠나는 순간에도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지만, 그는 자신이 보탬이 되지 않아도 가족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안도감이었다. 그렇게 걱정을 내려놓으니 그다음엔 자신을 챙겨주고 좋아해주는 미얀마 사람들이 보였다. 언제나 그를 따뜻하게 대하는 미얀마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은 규환 씨에게 편안함을 주었다. 무언가를 잘하지 않아도, 보탬이 되지 않아도 충분히 괜찮을 수 있다는 걸 안 순간이었다. 그는 아무 걱정 없이 편한 마음으로 1년을 지내다, ‘쉼’을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가 받은 세번째 선물은 ‘배움’이었다. 언제나 혼자 일을 결정하던 그가 묻고 소통하는 법을 알게 됐다.

현재 다니는 회사에 입사하실 때 해외봉사를 다녀온 경험이 도움이 됐다고 들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가장 걱정했던 부분이 취업이었습니다. 해외봉사활동이 취업에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스펙이 부족해 서류 전형에서 떨어질 것 같았거든요. 또, 어떤 회사에 이력서를 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요. 제가 이런저런 걱정을 하며 혼자 고민하고 있을 때 아버지께서 또 말씀하셨어요. “집이랑 가까운 이 회사는 어떠니?” “네가 생각할 땐 잘 안 맞을 거 같겠지만 아빠가 볼 땐 너한테 잘 맞을 거 같다. 이 회사에 한번 지원해보면 좋겠다.” 저는 또 제가 볼 때 괜찮을 것 같은 곳만 가려고 했는데, 아버지와 대화하면서 아버지가 추천해주신 곳에 지원해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이력서를 넣었는데 서류 전형을 통과했다며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하더군요.

면접이 있던 날, 면접관이 제 이력서를 보더니 “2020년부터 현재까지 회사를 다닌 기록이 없는데 이 시기엔 뭘 했나요?”라고 물으셨어요. 그래서 미얀마에 다녀온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활동을 했는지, 어떤 친구들을 만나 무슨 경험을 했는지 차근차근 말씀드렸습니다. 특히 묻고 소통하며 일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웠다는 대목에서 면접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셨어요. 그렇게 면접을 마치고, 며칠 뒤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걱정스러웠던 취업을 하고 나니 해외봉사활동 다녀오길 정말 잘했다 싶었습니다. 제게 필요한 선물만 쏙쏙 뽑아서 받아온 기분이었거든요.

정말 축하합니다. 현재 하는 업무는 무엇인가요?

저는 합성섬유 제조 회사의 기술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저희 회사는 여성용품이나 기저귀, 차량에 들어가는 필터 등을 만들고 있습니다. 저는 만들어진 제품들에 문제가 없는지, 정해진 시간 안에 검사하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업무가 익숙하지 않아, 검사 의뢰가 들어온 줄 알고 자주 문 앞을 서성였습니다. 상사 분들이 좌불안석인 저를 보며 하나씩 가르쳐주고 또 편하게 지낼 수 있게 해주셔서 지금은 잘 적응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인터뷰 말미에, 이규환 씨가 미얀마에 있었던 시간을 생각해 보았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도시는 멈췄고, 2021년 2월부터 시작된 쿠데타로 미얀마의 정세는 혼란스러웠다. ‘왜 내가 해외봉사를 왔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며 불평할 만한데, 그가 기억하는 미얀마는 평온하고 따뜻한 온기가 가득한 곳이었다. 그건 아마 그의 마음이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행복했기 때문일 것이다. 미얀마에서 발견한 ‘엄마를 이해한 시간’과 ‘쉼’ 그리고 ‘배움’의 선물은, 앞으로 그가 인생에서 마주할 여러 어려움 앞에서도 빛을 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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