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열 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가 오랜 병고 끝에 돌아가셨다. 우리 가족의 삶도 송두리째 바뀌었다. 아버지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한동안 술로 세월을 보내셨고, 나는 7살 4살 두 여동생과 함께 친척집을 전전했다. 그 후 아버지를 따라 큰아버지가 살고 계신 대구로 이사를 왔다.

8년간 투병한 어머니의 병원비로 재산을 다 써서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웠다. 먹을 것이 없었고, 배고픔으로 힘겨울 때가 많았다. 그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새엄마와 지내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일하러 나가시면 무턱대고 때리는 새엄마로 인해 마음의 상처가 점점 깊어졌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들어도, 고생하시는 아버지와 동생들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견딜 수밖에 없었다. 유난히 가난한 가정형편을 친구들에게 보이기 싫었고, 누가 알게 될까봐 일부러 친구들을 멀리했다.

내게 먼저 다가와준 친구 순임이

때로는 숨을 쉬는 것도 힘들다 싶을 때 나에게 먼저 다가와준 친구가 있었다. 같은 동네에 살던 동갑내기 순임이었다. 처음에는 선뜻 친해지기 힘들었지만, 나와 함께 학교에 가려고 매일 아침 우리 집 앞에서 기다리는 순임이를 보며 마음이 열렸고, 자연스레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순임이 부모님은 동네 지주였고, 대궐처럼 큰 집에서 살았다. 나는 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했으나 너무 가난해서 책 한 권 사볼 수 없었다. 순임이에게 제일 부러웠던 건 맛있는 음식이나 예쁜 옷이 아니라 집 벽 한 면에 빽빽이 꽂힌 책이었다. 순임이는 언제나 그 책을 마음껏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책을 가져다 읽는 것이 내게는 큰 즐거움이었고, 난 그 집에 있는 책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읽었다. 가끔은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아 그 집에서 자기도 했다. 아침에는 순임이 어머니가 밥을 꼭 챙겨주셨다. 평소 먹어보기 힘든 반찬을 내 앞으로 밀어주며 많이 먹으라고 하셨다. 그때 순임이 어머니가 해주셨던 갈치조림이, 넓은 대청마루에서 빳빳하게 풀 먹인 모시 홑이불을 덮고 둘이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눴던 추억이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우리가 열두 살이었던 해에 같은 반 친구인 수정이가 연탄가스로 세상을 떠났다. 유달리 눈이 크고 잘 웃던 수정이의 갑작스런 죽음은 우리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순임이, 희숙이와 함께 셋이서 새끼손가락을 걸고 그 친구 몫까지 열심히 살아 훌륭한 사람이 되자고, 끝까지 함께하자고 약속했다. 그 후로 우린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순임이와는 이상하게도 작은 다툼 한번 없었다. 종종 내 자격지심 때문에 말없이 순임이를 피할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순임이는 나를 잠잠히 기다려주거나 편지를 써서 내 마음을 풀어주곤 했다. 그러면 미안하고, 또 고마워서 순임이에게 편지로 답을 써서 보냈다. 그렇게 우리는 쑥스러워서 하지 못 하는 말들이 있으면 편지를 주고받으며 마음을 표현했다.

학창 시절, 순임이가 내게 써주었던 손 편지를 고스란히 모아두었다.
학창 시절, 순임이가 내게 써주었던 손 편지를 고스란히 모아두었다.

잘 살아줘서 고맙다

나는 순임이와 함께 먹고 놀고 공부하며, 그렇게 우리가 늘 함께할 줄 알았다. 그런데 중학교를 졸업한 후,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걸어야했다. 순임이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들어갔고 일찍 돈을 벌어야 했던 나는 실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처음에는 떨어져 있는 것이 너무 싫어서 아버지를 졸라서 같이 자취방 생활을 하였으나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방세와 생활비를 순임이만 전적으로 부담하는 것이 미안해서 3개월 만에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그날 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밤새 울었다.

이후, 순임이는 치의대에 진학했고, 나는 직장생활을 하느라 자연히 멀어졌다. 그나마 간간이 주고받던 편지마저 끊어져 버렸다. 오랫동안 소식 없이 지내다가 오랜만에 만나게 된 것이 내 결혼식에서였다. 그때부터 우린 종종 전화로 안부를 물으며 지내오고 있다.

순임이는 현재 치과의사로 일하고 있고, 아들과 딸도 의사가 되었다. 내 두 딸은 결혼했고, 늦둥이인 대학생 아들은 군 입대를 앞두고 있다. 자주 볼 수는 없지만 그래서 만나면 서로가 애틋함을 느낀다. 내가 순임이에게 “어릴 적 힘들 때 나와 함께해줘서, 내게 힘이 되어주어서 고맙다.”라고 말하면 순임이는 오히려 “네가 언니 같아서 내가 많이 의지했지.”라고 말한다.

얼마 전에 순임이가 일하는 치과에 진료를 받으러 갔다. 1년에 한두 번 만나는 것도 쉽지 않아 괜히 들뜨고 설레는 마음이 앞섰다. 항상 내게 “괜찮냐? 잘 지내냐?” 걱정해주었던 순임이. 몸도 마음도 고생이 많았던 나의 속사정을 너무 잘 알기에, 어려움을 잘 이겨낸 나를 보며 늘 대견해했다. 그래서 늘 내게 “잘 살아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순임이는 추웠던 내 어린 시절 기억을 따뜻하게 해주는 친구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가도, 순임이와 만날 때면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즐겁고 따스해진다.

그날도 치료를 마치고 순임이와 짧은 만남을 가졌다. 순임이에게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조심스럽지만, 부모님 살아계실 때 꼭 뵙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순임이는 “우리 부모님 건강하게 잘 계셔. 오래 사실 거야. 우리 엄마가 널 항상 기다리고 계시겠대. 언제든지 오라고 하시더라.”며 내 안부를 전해주겠다고 했다. 순임이 부모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를 자식처럼 생각해주고 계신다.

우린 초등학생 때부터 중학생 때까지 “너네는 연애하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항상 붙어 다녔다. 가을이면 등굣길에 코스모스가 알록달록 예쁘게 피어 있었다. 둘이 그 길을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은 그 길에 빌딩들이 들어서서 그토록 예뻤던 코스모스 길을 다시는 볼 수 없어 아쉬울 뿐이다. 사실 나는 그다지 좋아하는 꽃이 없는데, 순임이와의 추억 때문에 코스모스만큼은 무척 좋아한다. 순임이는 항상 내 마음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떠올리기만 해도 즐겁고 그리운 코스모스 같은 친구다.

순임아!

삶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들었을 때에

네가 옆에 있어서 살아갈 용기를 얻었어.

내 고집스런 오기마저 다 받아준 친구야,

내가 이제 그런 친구로 네 옆에 있을게.

항상 그립고 고맙다!

노애경

어린 시절, 숨을 쉬는 것도 힘들다 느낄 만큼 힘겨운 날도 있었지만, 친구 순임이와 함께하며 삶의 쉼과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 그는 친구에게서 고향을 느낀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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