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주에서 태어나 중학생 때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고등학교를 다른 도시에 있는 기숙사 형 학교로 가면서 타지 생활이 시작됐고, 이는 대학생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전주는 그리운 부모님이 계시는 푸근한 곳, 삶에 충전이 필요할 때 찾아가는 쉼터였다. 그런데 스물한 살에 내게 또 하나의 고향이 생겼다. 한국에서 약 8,500km 떨어진 나라 독일이다. 어쩌다 독일이 나의 제 2의 고향이 되었을까?

3년 전만 해도 독일은 나에게 ‘유럽에 있는 어느 나라, 음악이 유명한 나라, 나와 별 상관이 없는 나라’이었다. 나는 대학에서 가구 디자인을 전공하기에 심플하고도 감각적인 가구 디자인으로 유명한 핀란드에 관심이 많았다. 핀란드에 갈 방도를 찾던 나는 1학년을 마치고 핀란드로 해외 봉사활동을 떠났다.

독일 유명 관광 도시인 하이델베르크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호전된 이후의 첫 외출이었다.
독일 유명 관광 도시인 하이델베르크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호전된 이후의 첫 외출이었다.

핀란드에 도착한 후, 들뜬 마음으로 3일을 보냈다. 그때 일을 도와달라는 독일 봉사단의 급한 요청을 받았고 동료 단원들과 함께 독일 괴팅겐으로 향했다. 한 달 후에 핀란드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그런데 독일에 도착하고 며칠 되지 않아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심각해졌고, 국경이 차단되어 결국 핀란드로 돌아가지 못했다. 핀란드에 가고 싶었던 만큼 아쉬움이 컸다. 힘이 빠졌다. 한편으론 한국으로 돌아가고픈 마음도 들었다. 그런데 정확히 10개월이 흐른 후, 나는 부모님에게 “독일이 너무 좋아서 여기 있고 싶어요.”라고 말하며 유학을 부탁드리고 있었고, 친구들에게 “독일은 내게 제2의 고향이야”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가족들과 한국에 있는 지인들은 “독일 문화가 너와 잘 맞나 보다”, “너는 봉사가 체질인가 봐.”라는 반응을 보인 반면, 독일 현지 사람들은 “코로나 때문에 독일에서 특별한 추억도 많이 없었을 텐데 뭐가 좋았던 거냐?”고 신기해했다.

독일의 여유 있는 문화가 내 마음에 들기도 했고, 특별한 추억은 아니더라도 봉사활동을 하면서 보람된 시간을 보낸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내게 독일이 특별해진 건, 내 마음이 어느 때보다 가장 편안했으며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큰 말썽 한 번 부린 적 없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성격이 좋아 보인다. 밝아 보인다.”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고, 언제나 친구들과 큰 문제없이 잘 지내왔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간 후, 인간관계에서 큰 어려움을 만났고, 그 과정에서 겉과 속이 다른 내 모습을 보며 무척 혼란스러웠다. 지금 돌이켜보면 큰일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때부터 작은 실수에도 나 자신에게 실망했고, 나의 부족한 모습을 볼 때면 부정적인 생각에 휩쓸렸다. 겉으론 웃고 있지만, 마음은 슬픔이나 좌절로 울고 있었다. 그런 나를 바꾸고 싶어 대외활동을 하며 바쁘게 지내기도 했지만, 집에 혼자 있을 때면 그 괴리감이 더 커졌다. 해외 봉사를 떠나면서 어쩌면 환경이 바뀌면 내 마음이 달라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했다. 하지만 환경이 바뀐다고 마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열심히 활동하면서도 속은 여전히 생각들로 시끄러웠다.

거주지가 독일로 정해진 후, 지부장님을 만났을 때였다. 인사를 간단히 마치고 자리를 떠나려는데 지부장님이 갑자기 “진희야. 너 진짜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하셨다. 처음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그 다음 날에도, 그 다음 주에도, 한달 뒤에도 지부장님은 봉사 단원들을 만날 때마다 그 이야기를 하셨다. 우리 마음과 생각이 갇혀 있어서 보지 못할 뿐이지,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그 말이 내 마음을 자꾸 두드렸다.

내 생일날, 차를 타고 다섯 시간을 달려야 도착하는 지역에 사는 독일 친구가 나를 찾아와 축하해주었다.
내 생일날, 차를 타고 다섯 시간을 달려야 도착하는 지역에 사는 독일 친구가 나를 찾아와 축하해주었다.

어느 날, 나는 용기를 내서 지부장님을 찾아가 오랜 고민을 털어놓았다. 한편으론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지부장님은 “많이 힘들었겠다. 괜찮아”라고 하며 입을 여셨다. 그리고 내게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의 의미를 설명해주셨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부족하고, 때론 이기적인 모습들이 있어. 나도 그런 부분들이 있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다가와주는 사람이 고맙고 작은 일에도 감사를 느끼며 살 수도 있어. 진희야, 너는 지금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어. 새로운 문화, 사람들을 경험할 수도 있고, 언어도 마음껏 배울 수 있고, 봉사하는 기쁨도 느낄 수 있지. 마음의 초점을 옮겨보면 어떨까? 나는 진희가 이곳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지부장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한껏 가벼워졌다. 내가 부족한 모습만 바라보고 슬퍼하는 동안 많은 걸 놓치며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보니 내 곁에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친구가, 따듯한 가족이, 손을 내밀면 나를 잡아주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마음의 눈이 가려져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지부장님은 그날 이후에도 같은 말을 오래오래 반복하셨다. 나는 그 메시지를 들을 때마다 너무 행복했다. 고민이 컸던 만큼 기쁨도 컸다. 그리고 동료 단원들도 나와 같은 고민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는 종종 모일 때마다 각자의 고민과 지부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느낀 점들을 서로 말하곤 했다.

지부장님이, 내게 마음을 열어준 친구들이 고마웠다. 어느새 핀란드에 가지 못한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고, 봉사활동이 주로 실내에서 이루어진다 해도 그 사실이 나를 슬픔에 빠트리지 못했다. 그렇게 1년을 보낸 뒤, 나를 포함해 세 사람이 유학생이자 자원봉사자로 독일에 남아 한 해를 더 보냈다.

가구 회사에서 제작 실습을 하는 모습. 걱정과는 다르게 즐거운 분위기에서 일할 수 있었다.
가구 회사에서 제작 실습을 하는 모습. 걱정과는 다르게 즐거운 분위기에서 일할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독일에서 고마운 사람들과 함께하며 재미있는 일도 많았지만, 어려운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현지인 언니와 룸메이트로 지내면서 문화와 성향 차이로 자주 다투곤 했다. 윗사람에게 싹싹한 줄 알았던 내가 언니에게 화내는 모습을 보고 내가 놀랄 때도 있었다. 한 가구 회사에서 실습을 시작하면서는 작은 일에도 긴장하고 떨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왜 이렇게 화가 많지?’ 혹은 ‘난 왜 이리 작은 일에도 두려워하지?’라는 생각에 휩쓸려가는 대신 독일인 언니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문제를 풀어갔고, 약한 나를 언제나 응원해주고 자신의 일처럼 고민해주는 봉사단 가족들 덕분에 가구 회사에서 실습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한번은 “동양인에다 여자인 너를 누가 채용하겠어?”라는 말을 듣고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그때 한 친구의 도움으로 유명한 독일 가구 디자이너에게 고민을 담은 메일을 보냈고, 동양인이고 여자라서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디자이너가 될 거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받기도 했다. 다시 생각해봐도 꿈같은 일들이다.

나는 프랑크푸르트 전철인 ‘에스반’을 타고 출근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주말엔 오래전에 예약한 미용실에 느긋한 마음으로 가며, 독일어 노래를 들으면서 흥얼거리곤 한다. 이젠 독일 문화에 제법 익숙해지기도 했지만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도 간혹 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문제가 되지 않는 이곳, 내 삶에서 가장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곳은 누가 뭐래도 나의 소중한 또 하나의 고향이다.

김진희

멋진 가구 디자이너를 꿈꾸며 독일에서 살고 있다. 독일은 언어도 문화도 전혀 다른 곳이지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품어주고 행복을 알려준 곳이기에 ‘제2의 고향’이라고 말한다.

저작권자 © 데일리투머로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