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우 송정희

오디오북을 몇 권 들은 적이 있다. 낭독자의 목소리는 멋있지만 내용이 잘 전달되지 않는 경우도 있고, 낭독자의 목소리는 평범하지만 잔잔한 울림이 전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드는 걸까? 전국으로 낭독 강의를 다니며 ‘낭독이란, 사람의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것’이라고 말하는 성우 송정희 씨를 만나 그 이유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우’ 하면 애니메이션 혹은 외화 더빙 목소리가 먼저 생각납니다.

아무래도 그렇죠. 특히 애니메이션 더빙은 성우만이 해낼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해요. 소리만으로 캐릭터를 다 표현해야 하니까요. 어른인 성우가 어린이를 표현해야 할 때도 있고, 애벌레나 강아지를 표현해야 할 때도 있죠(웃음). 저는 애니메이션 더빙 경험은 많지 않아요. 20대에 성우로 KBS에 입사한 뒤 라디오 드라마와 TV 프로그램의 내레이션 분야에서 활동했고, 프리랜서가 된 후로는 외화 더빙을 주로 했어요. ‘그레이스 아나토미’ ‘이프 온리’ ‘쥬라기 공원’ ‘노다메 칸타빌레’ 등의 영화 더빙 작업을 했지요.

최근에는 낭독과 관련된 활동을 하고 있어요. 성우 서혜정 선배님의 도움으로 낭독 관련 책을 출간하기도 하고, 낭독 팟캐스트도 운영했어요. 현재는 오디오북 내레이터를 양성하는 강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정의하시는 낭독이란 어떤 것인가요?

저는 낭독을 ‘사람의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것’이라고 소개합니다. 물론 낭독하기 위해선 기술적인 훈련도 필요합니다. 일정한 에너지와 호흡, 톤 등이 유지되어야 하고, 발음 연습도 해야 하지요. 하지만 낭독이 단순히 좋은 목소리로 소리 내어 글을 읽는 작업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낭독하기 위해선 낭독자가 글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과정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거든요. 책 속의 활자는 사실 작가의 생각과 마음이잖아요. 낭독자는 그 글을 바라보면서 이해하고, 글에 깔린 정서와 감정을 들여다봐요. 그리고 ‘아, 이 사람에게는 이런 생각이 있구나’ ‘이건 진짜 그렇네’ 하며 공감하고, 그걸 마음에 담습니다. 낭독자가 글을 보면서 마음에 담은 것들을 솔직하게 표현하면, 그게 훌륭한 낭독입니다. 어설픈 발음이라도 듣는 사람이 귀를 기울이게 되거든요. 그러면 결국 작가의 마음에 담긴 것이 낭독자의 마음에 담기고, 다시 불특정 다수의 생각과 마음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렇게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거죠.

낭독의 또 다른 특징은 진입 장벽이 낮다는 거예요. 특히 요즘엔 인문학 열풍이 불면서 많은 분들이 낭독에 관심을 갖고 계세요. 그래서 강의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요. 저와 전혀 다른 분야에 종사하고, 다른 삶을 살았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개인적으로 이 점이 굉장히 매력적이에요.

낭독 강의에서 책만 읽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이야기도 하는군요.

낭독을 위해 발음, 호흡, 연기 등 여러 가지를 훈련하지만, 낭독을 잘하기 위해선 자기 마음을 잘 봐야 하고 자기 마음을 잘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이유로, 강의를 듣는 분들이 글을 읽은 뒤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곤 해요. 그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그분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거예요. 그러면 감사하게도 마음의 문을 열고 많은 이야기를 해주세요. 그렇게 하는 가운데 수강생들의 마음이 편안해지고, 조금 더 자유로워지면 생기가 없던 목소리가 또렷해지고 거친 목소리도 부드러워져요. 목소리는 자신의 마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거든요. 제 목소리도 그래요. 예전에는 삶과 마음이 불안해 목소리도 불안했는데, 삶이 바뀌니 목소리도 편안해졌어요.

삶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저는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했고, 졸업하자마자 성우가 되었어요. 처음엔 성우 일도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다른 세계였어요. 초반에는 기본기가 없어서 고생을 많이 했죠. 특히 ‘그레이 아나토미’라는 외화에서 ‘캘리’ 역을 맡아 더빙했을 땐, 밤새도록 연습해 목소리가 안 나올 정도였어요. 그렇게 실패하고 일어서고를 반복하며 배웠어요. 성우 연기가 너무 어려울 땐 잠깐씩 연극을 하며 연기의 기본기를 다지기도 했고요. 나만이 낼 수 있는 소리를 찾고 싶었고, 나만이 할 수 있는 연기 영역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어요. 나중엔 제 강점을 알아봐주시는 분도 생겨 왕성하게 활동했지요. 그런데 성우가 되고 10년이 지나니 스트레스가 너무 많이 쌓여 있었고, 일을 할 수 있는 에너지도 남아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일을 그만두었어요.

송정희 씨가 더빙한 외화 작품. 왼쪽부터 ‘그레이 아나토미’ ‘이프 온리’ ‘노다메 칸타빌레’. 외화 더빙을 할 때는 대본 속의 인물들의 특징 외에도, 그 인물의 역을 맡은 배우가 하는 연기 또한 계산해야 한다. 이외에도 발성을 마이크 메커니즘에 맞도록 훈련해야 하며, 화면 속 배우와 입을 맞추는 연습이 필요하다.
송정희 씨가 더빙한 외화 작품. 왼쪽부터 ‘그레이 아나토미’ ‘이프 온리’ ‘노다메 칸타빌레’. 외화 더빙을 할 때는 대본 속의 인물들의 특징 외에도, 그 인물의 역을 맡은 배우가 하는 연기 또한 계산해야 한다. 이외에도 발성을 마이크 메커니즘에 맞도록 훈련해야 하며, 화면 속 배우와 입을 맞추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 후로는 명상도 하고, 채식도 하고, 산행도 많이 다녔어요. 그즈음 결혼해서 다큐 감독인 남편을 따라 바다로, 산으로, 해외로 다니며 많은 것을 경험하기도 했어요. 마음 한편에 미련, 결핍으로 남아 있던 연극 활동을 마음껏 해보기도 했고요.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그런데 그 가운데에도 고난은 있고, 내 뜻대로 되는 게 없다는 걸 처절하게 느꼈어요.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했죠. 그때 제 목소리 또한 불안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삶이 내 뜻대로 되지 않기도 하지만 내 뜻과 다르게 좋은 일이 생기기도 하더라고요. 어느 순간 우연히 좋은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되면서 삶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어요.

‘내 뜻과 상관없이 만난 좋은 일’이 어떤 일이었나요?

첫 번째가 좋은 책을 만난 것이었어요. 저는 직업 특성상 다양한 텍스트를 접하는데요, 한번은 성경을 낭독했어요. 오래 전에도 성경을 낭독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와는 전혀 다르게 느껴지더라고요. 여러 고난을 지나며 제 마음이 변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성경을 소리 내어 읽을수록 ‘나는 나를 자책하고 모나게 여기며 살았는데, 나를 향한 창조주의 마음은 이렇게 따뜻했구나’ 하며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어요. 제 삶에 큰 변화였죠.

두 번째는 서혜정 선배님을 다시 만난 것이었어요. 선배님은 제가 처음 성우가 됐을 때부터 저를 지켜봐주신 분이었어요. 제가 성우의 삶을 오랜 시간 떠나 살면서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워졌던 때가 있었어요. 그때 다시 서울로 나와 일하려고 했는데, 방송국으로 가진 못하겠더라고요. 그때 서혜정 선배님이 제 사정을 알고 연락을 주셨어요. 당시 선배님은 ‘롤러코스터 남녀탐구생활’, ‘생로병사의 비밀’ 등으로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을 때였어요. 전국을 누비며 낭독 강의도 하고 계셨죠. 그런 선배님이 제게 “정희야, 너 나랑 낭독 강의 같이 다닐래?”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선배님이 저를 강사로 데리고 다니면서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1년여 간 전국을 다니면서 낭독 강의를 했어요. 그즈음 한 출판사에서 선배님에게 낭독에 관련한 책을 내보자고 제안했어요. 선배님이 저에게 ‘그 책을 너랑 나랑 같이 내보자’ 하시더라고요. 저는 유명하지도 않고 활동도 하지 않고 있는 성우인데 선배님 덕분에 책을 냈고, 그 일을 계기로 ‘나에게 낭독’이라는 팟캐스트도 운영하게 되었지요.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낭독 강의를 하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을, 그들의 마음을 만났어요.

만났던 수많은 마음들 가운데 기억에 남는 하나를 꼽는다면요?

한번은 낭독 첫 수업 날 어떤 분에게 첫 구절을 읽어보라고 했어요. 그분이 읽는데 소리에 생기가 하나도 없고, 소리가 밖으로 다 내뱉어지지 않더라고요. 그리고 소리에서 우울감과 고통이 느껴졌어요. 그런 뒤 그분에게 낭독을 잘하기 위해선 자기 마음을 잘 봐야 하고 자기 마음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리고 그분의 이야기를 경청했지요. 감사하게도 그분이 입을 열어 자신이 어떤 가족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는지, 그 여파로 세상을 향한 문을 다 닫고 자기 방에 들어가 홀로 살게 된 과정을 차분히 말해주셨어요. 그 후 그분의 심정과 유사한 텍스트 낭독을 권했어요. 그 다음에는 그분의 상황과 전혀 다른 텍스트를 권했고요. 그렇게 하는 동안 자신의 내면이 어떤지 볼 수 있는 훈련을 많이 했어요.

그렇게 9개월이라는 과정을 마쳤는데, 그분의 목소리가 또렷해지고 자신감이 살아나고 흥미가 느껴지는 거예요. 강의 마지막 날, 그분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저는 이번에 이 강의를 통해 여러 훈련을 하면서 제 삶이 바뀌었습니다. 마음이 치유되었고, 제 소리가 달라졌습니다. 이젠 달라진 소리로 사람들과 건강한 관계를 맺으면서 소통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너무 기뻤어요. 이런 사례들이 많은데요, 이것이 제게 큰 기쁨입니다. 앞으로도 낭독으로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요. 그분들의 삶에 귀 기울이고, 제 이야기도 나누며 그렇게 살고 싶어요.     

약 4년간 다큐멘터리 감독인 남편과 함께 국내외 곳곳을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스튜디오 안에서 종이 한 장과 씨름하며 배웠던 세상이 다였던 그에게, 그 시간은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폭을 넓혀주었다.
약 4년간 다큐멘터리 감독인 남편과 함께 국내외 곳곳을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스튜디오 안에서 종이 한 장과 씨름하며 배웠던 세상이 다였던 그에게, 그 시간은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폭을 넓혀주었다.

인터뷰를 하면서 기자가 알게된 ‘송정희 씨의 치열한 20대’와 ‘낭독 강의를 하고 있는 송정희 씨의 지금’은 각기 다른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그가 더 행복해 보이는 건, 예전의 마음과 달라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마음에 편안함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마음에 진한 감동들이,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자는 이런 생각을 했다. ‘크든 작든 마음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자신에게 없던 감사, 사랑을 받아들여 자신이 먼저 따뜻해지고 풍성해진 사람, 그래서 그것을 기쁘게 퍼나르는 메신저 일을 자처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송정희

서울 예대에서 연기를 전공했으며, 29기 KBS 성우로 입사 후 현재까지 다양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외화 ‘그레이 아나토미’ ‘쥬라기 공원’ ‘노다메 칸타빌레’ 등에서 더빙을 맡았으며, 2012년 거창국제연극제에서 여자연기대상을 수상했다. ‘만물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말하는 그는 최근 목소리를 통해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만날 수 있는 ‘낭독’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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