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가가> DJ 박현준
전파에 목소리를 실어 전달하는 라디오는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고 있는 매체이다. 지금은 라디오 청취자가 예전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지만 운전하면서도, 집안일을 하면서도 들을 수 있다는 장점에, 동영상 시대에도 대체 불가능한 매체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나섰다. 어린 시절부터 라디오를 들으며 자랐고, 라디오 DJ를 꿈꿨다는 박현준 씨는 현재 경인방송 <라디오 가가>를 제작‧진행하고 있다. 그는 어떻게 사람들의 일상에 배경음악이 되었을까?
경인방송의 최장수 프로그램인 <라디오 가가>에서 DJ로 활동하고 계시다고요.
2006년부터 <라디오 가가>를 시작해서 오늘이 5,655회네요. 책이 나올 때쯤이면 더 늘어나 있겠죠? 처음 라디오 가가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이건 길어야 3개월이다’라고 생각했어요. 그 당시 저는 경인방송에서 진행하고 있는 김광한 선생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음악 작가 겸 게스트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오전 11시 프로그램 진행자가 펑크를 냈고, 저에게 DJ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니 어땠겠어요. 처음에는 얼마나 막막했는지 몰라요. 하루하루를 힘들게 준비했는데 그게 석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고, 벌써 15년이 됐네요(하하). 감사하죠. 다들 저를 좋게 봐주셔서 지금까지 왔고, 어느새 최장수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 했으니까요.
매일 정해진 시간에 2시간씩 청취자들을 만나고 있어요. 방송국으로 날아온 사연을 읽고, 또 그걸 들은 청취자들의 반응을 만나는 일상이 특별할 것 같아요.
매일 방송을 준비하는 게 어렵긴 해도, 생방송을 하는 그 2시간이 참 좋습니다. 가장 편안한 시간이기도 하고요. 뭐랄까요, 라디오를 듣는 분들이나 진행하는 저나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라디오에 모여 각자 느낀 감정을 공유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하고, 어려움을 겪는 분들에겐 위로를 전하는데…, 이런 일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는 게 참 특별하죠. 저보다 연배가 높으신 분들의 이야기는 제게 교훈이 되기도 하고, 제가 건네는 한마디가 어떤 분에게는 힘이 되기도 하니까, 하루하루가 새로운 일상으로 채워집니다. 이런 게 라디오의 묘미가 아닐까 싶네요.
5,600회가 넘는 긴 시간 동안 정말 많은 분들을 만나셨을 텐데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분이 있는지요?
2006년부터 방송하다 보니 오래된 청취자 분들이 매우 많습니다. 한 사람이 기억난다기보단 함께 시간을 보낸 분들이 생각나네요. 방송을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미혼이었던 분이 지금은 결혼하시고 애를 낳아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고요. 임용고시를 준비했던 분은 몇 년 동안 시험에 떨어져 마음고생하다가 지금은 중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하시고…. 한번은 엄마가 듣는 라디오를 함께 들으며 자라온 아이가 어느새 군대에 간다고 연락이 왔더군요. 라디오라는 게, 참 매력 있는 매체이지 않습니까? 내가 보낸 사연이 라디오로 흘러나오면 한 명의 고정 청취자가 되고, 그걸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습관처럼 라디오를 들으며 유대감을 형성해 가는 거죠. 자연스레 서로의 일상에 배경음악이 되다 보니 기억에 남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일상의 배경음악이라는 표현이 너무 멋있네요. 박현준 씨도 라디오 DJ를 하기 전에 라디오를 많이 들으셨나요?
아주 많이 들었죠. 저는 초등학생 때부터 라디오를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제가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팝송을 따라 불렀어요. 저는 만화영화 주제곡을 좋아했을 땐데요(하하). 그 친구와 같이 어울리고 싶은 마음에 팝송을 찾아 들었는데, 그게 라디오였죠. 그 당시에 인터넷이 있는 것도 아니고, 텔레비전도 귀한 때였으니까요. 라디오를 듣다 보면 DJ들이 팝송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줘요. 그럼 ‘와, 그런 일이 있었어?’ 하면서 신기해하고, 그 이야기를 여자애들한테 해주면 눈을 반짝반짝하면서 듣고요. 그래서 더 열심히 라디오를 들으며 공부했어요. 그렇게 팝송에도 빠졌고요. 어린 시절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게 라디오이다 보니, 제겐 라디오 DJ가 우상이었어요.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음악적 지식을 동경하며 라디오 DJ를 꿈꿨죠. 그런데 DJ가 되는 방법은 잘 모르겠고 막연하니까, 1차 목표로 ‘팝 칼럼니스트를 해보자’ 싶어서 잡지를 읽으며 글을 썼었죠(하하).
어린 시절부터 라디오 DJ를 꿈꾸셨군요.
그렇게 살고 싶었지만 제가 방송 관련 학과를 나온 것도 아니고, 진짜 막연한 꿈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제가 자주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인 <KBS 김광한의 골든 팝스>에서 ‘DJ 콘테스트’가 열렸어요. 그래서 참석했어요(하하). 그때가 2002년 월드컵이 막 끝났을 무렵이라 ‘꿈은 이루어진다’로 방송 주제를 정하고 거기에 맞는 노래를 선곡했는데, 실시간 청취자 투표에서 가장 많이 득표해 우승했어요. 요즘 말로 하면 라디오 DJ 오디션에 합격한 거죠(하하). 무슨 권위가 있는 대회도 아니었고 그냥 재미로 끝날 일이었는데, 김광한 선생님이 연락하셨어요. 어렸을 때부터 동경하던 분이 저한테 “너, DJ 한번 해보지 않겠냐?” 하시는데, 그 상황이 믿어지지 않더라고요. 엄청난 기회인 동시에 두려움이 컸어요. 이제 막 군대에서 제대한 학생이었는데, 겁이 나서 선뜻 하겠다고 못 하겠더라고요. 그런데 김광한 선생님이 계속 연락해주셨어요. “음악에 관련된 글을 한번 써봐라.”, “요즘엔 무슨 노래를 즐겨 듣냐?” 하시면서요. 1년을 고민한 뒤에야 한번 해보겠다고 했어요.
오디션 출신이시군요! 전문적으로 이 일을 시작해보니 어떠셨나요?
제가 방송 아카데미를 다닌 것도 아니고, 언론 고시를 통과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나운서 시험을 본 것도 아니잖아요. ‘김광한’이라는 이름 석 자와 함께 방송국에 들어오니 정말 치열하게 공부해야만 했어요. 선생님께 혼도 많이 나고요. 선생님이 ‘1 더하기 1은 2다’ 이런 식으로 가르쳐 주신 게 아니라,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이거 아니야.” 하셨어요.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말씀하시지 않고요. 그래서 선생님이 하시는 걸 보고 그대로 따라 한 적도 많아요. 선생님이 제 방송을 모니터링하며 하나씩 잡아주셨는데 그때마다 엄청나게 혼났죠. 저에게만큼은 엄하셨거든요. 배우는 입장에서는 조금 더 정확히 알려주면 좋겠는데 매번 ‘그렇게 하면 안 돼’라는 말만 들으니까 정답을 찾느라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게, 지금에 와서야 ‘선생님이 알려주신 게 이런 의미였구나’라고 깨닫는 게 많아요. 방송하면서 느끼는 건데, 방송이란 게 정답이 없더라고요. 하면서 해답을 찾아가고 알아가는 거더라고요. 선생님은 제가 스스로 느낄 수 있게 계속 알려주셨던 거죠. 김광한 선생님이 2015년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는데, 많이 그립습니다. 그분께 배운 모든 걸 자양분 삼아 제가 방송을 하고 있는데…,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거든요.
선생님 덕분에 꿈을 이루신 거네요. <라디오 가가>가 청취자 분들에게 어떤 프로그램으로 남길 바라나요?
선생님께 정확히 배운 게 하나 있는데, ‘네가 듣고 싶은 거 말고,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노래를 선곡해라’입니다. ‘라디오 가가’는 팝송 프로그램이다 보니 사람들에게 생소한 노래가 많아요. 뜻이 바로 전달되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청취자 분들이 편안하고 친근하게 들을 수 있는 곡을 찾으려고 많이 고민합니다.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음악들을 찾기도 하고, 유명한 그룹이 부른 노래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려드리기도 하고요. 그렇게 하는 이유를 꼽으라면, 라디오는 청취자와의 소통으로 만들어지는 매체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라디오가 흘러나가는 시간만큼은 청취자 분들의 일상에 하나의 사운드트랙이 되고 싶어요.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이 세상을 바꾼다거나 사회의 여론을 형성하지는 않잖아요. 그저 가까운 곳에, 편하게 머물 수 있는 존재가 된다면 그걸로 좋지 않을까요. 전 그저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게 전하는 일을 하고요.
인터뷰를 마친 뒤, 20년 전 ‘DJ 콘테스트’를 준비했을 박현준 씨를 떠올려보았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고민하다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주제를 정했을 테고, 콘테스트라는 명목 아래 DJ의 꿈을 이룬 자신의 이야기를 소개했을 것이다. 지금 그는 오래 전 자신이 꿈 이야기를 꺼냈던 라디오 방송의 진행자 자리에 앉아, 노래와 함께 여러 사람들의 크고 작은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다. 누군가에겐 위로를, 누군가에겐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오늘도 그는 자신의 이야기, 누군가의 이야기를 청취자들에게 전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취재 최지나 기자 사진 박종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