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차를 타고 가던 중, 말다툼이 시작됐다. 다툼의 시작은 사소했으나 끝에는 너무 화가 나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 머릿속에 글귀 하나가 떠올랐다. “너무 화가 났을 때에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말아라.” 투머로우에서 읽었던 이 글귀가 그 순간 왜 떠올랐는지 모르지만, 한번 해보기로 했다. ‘잠시 멈춤’ 버튼을 누른 듯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신기하게 몇 초라는 짧은 시간에 화가 가득했던 마음이 누그러지고, 더 이상의 싸움은 없었다.

이 경험 때문인지 나는 매달 투머로우를 기다린다. 이번 달에는 어떤 내용이 실려 있을지, 또 어떤 글귀가 마음에 남을지 내심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 가운데 나는 2021년 1월호에 실렸던 <노끈 한 오라기>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노끈 한 오라기로 시작된 오해

투머로우에 ‘북테라피’라는 칼럼이 있다. 영화평론가가 영화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것처럼, 북테라피는 어떤 책의 내용과 그 안에 담긴 의미를 하나씩 말해준다. 1월호에는 모파상의 <노끈 한 오라기>라는 책이 실렸다. 책의 내용은 이러했다. 오슈꼬른이라는 자린고비 영감님이 길에서 노끈 한 오라기를 줍는데, 그 일로 사람들에게 ‘지갑을 주워서 감춰놓고 노끈을 주웠다고 거짓말을 한다’라는 오해를 받기 시작한다. 나중에 지갑을 주운 사람이 나타나지만, ‘영감이 다른 사람을 시켜서 지갑을 돌려줬다’는 누명까지 쓰게 된다. 오슈꼬른은 어떻게든 해명해 보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오해는 더 깊어진다. 결국 그는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죽고 만다는 단편 소설이다.

오슈꼬른의 해명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손가락질하는 이웃 사람들, 그리고 억울하다고 계속 해명하는 오슈꼬른의 모습을 상상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 이웃들처럼 오슈꼬른 영감에게 돌을 던지진 않았을까?’ 왜냐하면 며칠 전에 상대방이 틀렸다고 확신해 손가락질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이어폰으로 시작된 오해

하루는 퇴근하고 집에 왔는데 사용하는 이어폰이 보이지 않았다. 가방을 아무리 뒤져도 나오지 않아 ‘사무실에 놓고 왔나 보다. 내일 가서 찾아야겠다’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출근해서 이어폰을 찾았지만 내 자리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그때 옆 자리의 동료가 내 것과 똑같은 이어폰을 끼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그거 내 이어폰이야.”라고 말했다. 그러자 동료는 “아니야, 이거 내가 집에서부터 하고 온 거야. 내 꺼야.”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줘봐. 이거 내 꺼네. 이거 흔한 이어폰 아니야. 내 꺼라고. 이거 얼마 전에 내가 서울역에 갔을 때 산 거야.” 하면서 빨리 달라고 소리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이다. 그러자 동료는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이어폰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곤 “집에 가서 잘 찾아봐. 분명 자기 꺼 따로 있을 거야. 나중에 찾으면 갖다줘.”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 내 이어폰이 발견됐다. 그것도 내 차 안에서 말이다. 심지어 내 이어폰은 동료의 이어폰과 색깔조차 달랐다. 내 이어폰을 찾자마자 동료가 지었던 표정이 떠올랐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민망함도 잠시, 나는 바로 동료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까는 제가 미쳤었나 봐요. 정말 미안해요. 전 제 꺼라고 확신해서 그랬는데… 제 차 안에 이어폰이 떨어져 있었어요. 정말 죄송해요.”

그러자 동료가 말했다.

“나도 그런 적이 있어. 내 책인 줄 알고 가져갔는데 집에 책이 있더라고. 다 실수하는 거지 뭐. 이해해.”

확신하는 만큼 확실히 틀릴 수 있다

내 것이 맞다고 확신하니까 다른 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동료가 내 것이 아니라고 하는 말도, 동료의 당황하는 표정도, 이어폰의 색깔도 말이다. 사실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오슈꼬른 영감의 말은 변명으로 치부하고 영감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비난한 사람들처럼 말이다. 오슈꼬른의 죽음에는 나의 손가락질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그 동료 외에 또 누군가를 궁지에 몰아넣으면서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너무나 부끄럽지만, 그 일은 나에게 ‘내가 보는 것이 정말 확실할까? 확실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지. 나는 확실히 틀릴 수 있구나’라는 교훈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갖자, 신기하게 한 번 더 생각하는 과정이 생겼다. 전에는 내 생각과 다른 상대방의 의견을 들을 때 방어적 혹은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다면, 지금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그 입장에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부끄러운 나의 모습을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마 투머로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겪은 일을 돌아보고 투머로우에 실린 글과 연결시켜 보니 부끄럽다고 감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는 기능이 생겼으니 투머로우에 고마워할 일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도 이런 생각을 해본다. ‘만약 내가 내 이어폰을 찾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찾았다 해도 오슈꼬른 영감님을 책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나는 지금도 마음에서 동료를 손가락질하거나, 부끄러운 일을 벌였다는 자격지심에 마음을 닫고 살았을지 모를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글을 읽고 그 글에서 작은 행복들을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글쓴이 박연주

대안학교에서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며 학생들을 만난다. 양원숲속도서관에서 독서 모임도 진행하며 학창 시절 덮어놓은 고전 소설부터 현대 소설, 에세이 등 다양한 책을 읽고 있다. 책을 읽으며 책 속 인물도 만나지만,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을 만난다. 그 가운데 하나가 투머로우다. 투머로우 한 권에 열 권의 책이 담겨 있다며 본사에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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