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훈 셰프

“제가 일하고 있는 일식 식당은 손님이 셰프 가까운 곳에 마주 앉을 수 있습니다. 셰프가 손님에게 음식에 대해 설명하기도 하고, 서로 사는 이야기도 나눌 수 있죠. 그 점이 좋아서 오늘도 즐겁게 일해요(웃음).” 한 일식 전통 식당에서 셰프로 일하고 있는 김도훈 씨. 올해 27세인 그가 요리에 바친 시간은 8년, 3만 시간이 넘는다. 김도훈 씨는 그 시간을 통해 ‘요리 실력’뿐 아니라 ‘조금 남다른 삶의 소신’을 갖게 됐다고 말한다. 9월의 어느 오후, 그와 마주 앉아 그가 배운 삶과 요리에 대해 들어보았다.

요리를 일찍 시작하셨나봐요. 

중학교 3학년 때 시작했어요. 그 전까지는 운동을 했는데, 억압적인 분위기가 싫어서 오랜 고민 끝에 그만두었죠. 이후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방황하고 있을 때 누나가 요리를 한번 배워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어요. 운동할 때부터 먹는 걸 좋아해 집에서도 종종 간단한 요리를 해서 먹곤 했지만 대단한 소질이 있는 건 아니었어요. 마땅한 돌파구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한번 해봐야겠다’라는 심정으로 요리를 시작했는데, 제 적성에 딱 맞더군요.

처음엔 요리학원을 다니며 한식, 양식 등 조리 자격증을 땄어요. 그러고 나니 현장에서 다양한 요리를 직접 배워보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대신 홈스쿨링을 택했어요. 오전에는 일하고, 저녁에 온라인으로 수업을 들었어요. 장어 식당을 시작으로 패밀리 레스토랑, 호텔 주방 등에서 일했어요.

어딜 가든 처음에는 설거지나 재료 다듬는 것부터 시작했고, 오랜 훈련 끝에 오븐을 다루고 팬을 잡을 수 있었어요. 그렇게 한식, 양식, 일식 등 다양한 분야를 경험했고, 일식을 집중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지는 5년이 되었습니다.

주방 세계는 치열하고 바쁘게 흘러간다던데, 힘들진 않았나요.

아무래도 칼과 불을 가까이하다 보니 손이 성할 날이 없었어요(웃음). 또 저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분들과 일해야 하는데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몰라 난감하기도 했죠. 그런데 처음에는 그런 어려움보다 제 실력이 향상되고 내가 만든 음식이 손님에게 나갈 수 있다는 기쁨이 컸어요.

요리를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되었을 땐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으니까 유학을 꼭 가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경력을 쌓고, 유학 자금을 모으기 위해 힘든 줄 모르고 정말 쉼 없이 일했어요. 그렇게 열심히만 하면 뭐든 다 될 것 같았죠.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 때 갑자기 안면 신경 마비가 왔어요. 근육이 모두 마비되어 눈도 감지 못했고, 미각에도 장애가 와 음식 맛을 느낄 수 없었어요. 일을 할 수 없었죠. 너무 놀랐고, 충격적이었어요. 당시 몸도 너무 힘들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았고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결국 내게 돌아오는 게 이런 건가? 유학을 못가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에 무척 불안했어요. 세 달 동안 한의원과 병원을 다니며 정말 열심히 재활치료를 받았고, 몸이 완전히 회복되기도 전에 일을 다시 시작했어요. 돌아보면 그때가 가장 힘든 시기였어요. 예상치 못했던 삶의 문제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몰랐고, 제가 세워둔 계획이 틀어지면 불행할 거란 생각에 불안하고 두려운 시간을 보냈으니까요.

주민들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한국 요리 아카데미 시간, 나는 찹쌀가루 반죽 위에 예쁜 꽃을 붙인 ‘화전’을 만들었다.
주민들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한국 요리 아카데미 시간, 나는 찹쌀가루 반죽 위에 예쁜 꽃을 붙인 ‘화전’을 만들었다.

두려운 시간들을 어떻게 건너왔나요.

미국으로 해외봉사를 갔던 누나가 그즈음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평소 누나를 잘 따랐던 터라 제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편하게 이야기했는데, 누나가 “왜 너 혼자서 모든 짐을 지고 살아?”하며 저를 무척 안타까워했어요. 이후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고, 누나가 가깝게 지내는 봉사단 선생님을 소개해줬어요. 선생님이 가끔 안부를 묻고, 제 고민을 말씀드리면 같이 걱정해주시곤 했는데, 그것만으로도 큰 힘이 됐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입대했고, 군 복무 기간에도 종종 누나와 함께 선생님을 찾아갔는데, 그때마다 “유학 가기 전에 해외봉사 가보면 어때?” 하고 물어보셨죠. 사실, 누나가 미국에 다녀온 후 밝아진 모습을 보며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전역하자마자 인도로 떠나 1년 간 해외봉사활동을 했어요.

1년 간 해외봉사라, 요리사로서는 꽤 특이한 이력이네요.

맞아요(웃음). 그래서 취업 면접 볼 때 실장님이나 조리장님이 해외봉사 다녀온 경험에 대한 질문을 많이 하세요. 손님과 대화할 때도 인도 해외봉사 이야기를 하면 무척 신기해하고요. 처음에는 해외봉사가 요리와 전혀 상관없는 경력이라 남들보다 뒤쳐지진 않을까 하는 걱정도 한편에 있었어요. 그런데 그 생각도 좁은 것이었더라고요. 요리사는 요리 실력만큼이나 밝고 건강한 마인드가 중요하니까요. 돌아보면 인도에서 지낸 1년은 요리뿐 아니라 제 인생에 가장 필요했던 최고의 경험이었어요.

인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요?

제가 살면서 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많이 경험했어요. 인도에 함께 간 동료 단원들 중에는 동생도 있었고, 친구도 있었고, 형도 있었어요. 저는 학교생활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던 터라, 처음에는 또래 친구들이랑 어울리는 법을 몰라 늘 어두운 표정으로 다녔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저도 조금씩 변하더군요. 활동 기간 동안 단원들끼리 모여 이야기하는 시간이 유독 많았어요. 다른 단원들이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말하고, 섭섭하거나 힘들었던 일들을 꾸밈없이 말하는 걸 계속 들었는데, 저도 어느 순간 자연스레 제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간호학과에서 공부하는 사람, 수의사를 꿈꾸는 사람, 34살의 나이에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 해외봉사를 왔다는 사람…. 각기 다양한 모양이었어요. 요리만 알고 있던 제게 단원들의 이야기 하나하나가 새로운 세계였고, 배움이었죠. 매일 서로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무척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단원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들이 즐거웠어요.

그리고 인도 청소년들을 위한 캠프에서 선보일 공연을 준비하면서 난생 처음 댄스를 배웠어요(하하). 어찌나 어색하던지 처음에는 떨리고 쑥스러웠지만 나중에는 다 같이 웃으며 숨차게 움직이는 순간순간이 너무 좋았어요. 공연하면서 함박웃음을 짓는 걸 가장 많이 연습했는데 그 덕분에 ‘웃상(웃는상)’이라는 말도 들어봤어요. 한국어 캠프에서는 인도 사람들 앞에서 한국 음식 만드는 법을 소개하기도 했어요. 혼자 만들 줄만 알았지 누군가에게 알려주는 건 처음이라 실수도 많았는데, 별것 아닌 것에도 인도 사람들이 신기해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이 신기했어요.

그렇게 지내면서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넓어졌어요. 이전에는 무조건 유학을 다녀오고 성공해야만 행복할 거라 확신했는데 인도에서 생활하면서 이런 생각을 자주 했어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의 마음이 전달될 때 느끼는 행복이 있구나. 이렇게 사는 것도 행복하구나.’

인도 시골마을에는 동양인들이 많지 않다. 그 때문에 내가 길을 지나가면, 동네 아이들이 나를 신기하게 보곤 했다.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건넬 지 몰라 막막할 땐, 함께 사진을 찍자고 말했다.
인도 시골마을에는 동양인들이 많지 않다. 그 때문에 내가 길을 지나가면, 동네 아이들이 나를 신기하게 보곤 했다.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건넬 지 몰라 막막할 땐, 함께 사진을 찍자고 말했다.

이후 진로를 정하는데도 큰 영향을 미쳤겠어요.

저도 귀국하자마자 다른 삶이 펼쳐질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막상 현실로 돌아오니 ‘얼른 크게 성공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다시 제 마음을 가득 채웠어요. 그래서 한참 고생을 했죠(웃음). 서울에 올라와 고시원에서 지내며 일식 요리를 배우다가 무작정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어요. ‘큰 나라로 가면 뭔가 더 새로운 것이 있을 거야’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죠. 처음엔 딸기나 포도 같은 과일 따는 일을 하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서 대도시 멜버른의 한 라멘 집에 취직해 일했어요. 원했던 호주에 왔고, 농장일 대신 요리도 시작했지만 무엇을 해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어요. ‘더 잘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하려고 여기 온게 아닌데…’라는 마음에 괴롭기만 했어요. 그럴 때마다 술을 마시다 보니 나중엔 술에 빠져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더라고요. 한심한 실패자의 모습이었어요. 제 모습이 싫었고, 이러다간 진짜 망하겠다는 생각에 두렵기도 했어요. 그때마다 인도에서 지냈던 삶이 어렴풋이 떠올랐어요. ‘그때는 그냥 행복했는데 내가 또 과거에 걸었던 길을 걷고 있구나.’ 결국 몇 달 뒤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어요. 그때부터 진짜 제 삶에 변화가 시작된 것 같아요.

단순히 한국에 돌아왔기 때문은 아니겠지요. 어떤 일이 있었나요?

제가 한국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누나와 연락이 닿았어요. 마침 봉사단 선생님도 가까운 경기도로 이사를 오셨더라고요. 선생님이 종종 ‘밥 먹었냐’ 하고 연락을 주셨어요. 실제로 한 번씩 밥을 사주시기도 했고요. 해외봉사 다녀온 뒤 연락 한 번 드리지 않았는데 그런 저에게 먼저 연락도 주시고 손을 내밀어주시는 게 죄송하고, 또 감사했어요.

하루는 선생님께 인도에 갔던 일, 그리고 호주에 다녀온 이야기를 했어요. 제 이야기를 듣고 선생님이 이렇게 이야기해주셨어요.

“도훈아,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성공하는 것도 좋더라. 그런데 실패도 아주 나쁜 것은 아닌 것 같아. 누군가와 함께 살 기회를 주니까 말이야. 네가 앞으로도 함께 살면 좋겠어. 사람은 결국 혼자가 아니라 함께 살 때 행복하더라. 앞으로 어려운 일 있으면 누나랑도 이야기하고 나한테도 이야기해주고 그래(하하).”

사실 그때 제 마음엔 실패에 대한 두려움, 원망, 자책 등 부정적인 생각이 가득했어요. 그랬기 때문에 선생님이 해주신 말이 너무 좋더라고요.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렇구나. 귀를 기울이며 살면 되는구나. 끝이 아니구나’ 하며 기뻐서, 감사해서 마음으로 울었습니다.

함께 걸어가는 기쁨, 지난 8년 동안 도전하고 실패하며 깨달은 교훈이네요.

다른 건 잘 모르겠어요. 제가 아는 건 ‘내가 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 그래서 ‘주변에 묻고 또 물으며 사고하면서 사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것’ 이 두 가지가 다입니다. 신기한 건 그것만 아는데도 제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몇 달 전엔 선생님을 도와 봉사활동을 했는데, 그러면서 함께 활동했던 형 동생들과 가까워졌어요. 서울에 올라와 아는 사람이 몇 없었던 터라 무척 기뻤어요. 사람을 만나고, 밝아지니 일하면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은 것도 생기고요.

마음이 넉넉해지니 일할 때에도 조급해하지 않고 천천히 하나씩 제대로 배우며 한 단계씩 성장하고 있어요. 옛날에는 ‘어떻게 하면 더 빨리 성장하고 잘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면 지금은 ‘어떻게 하면 손님에게 더 맛있는 요리를 드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어요. 스시 한 점을 내도 감사한 마음을 담아 만들어요.

종종 제가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평범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 신기해요. 제가 이런 인터뷰 하는 것도 꿈같네요(하하). 언젠가는 제가 받았던 따스함을 요리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가게를 열고 싶어요. 혼자가 아닌 ‘함께’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식당이요(웃음).

그가 일하고 있는 곳은 일식 요리 ‘오마카세’ 전문점이다. 손님이 메뉴 선택을 셰프에게 온전히 맡기고, 셰프는 그날 가장 신선한 식재료로 손님이 가장 좋아할 만한 요리를 만들어 내놓는 곳이다. 기자는 그와 인터뷰를 마친 후, 언젠가 그가 개업할 식당을 그려보았다. 지친 손님에게 위로를 전하고픈 마음을 한 스푼 담아 음식을 만들고, 외로운 손님에겐 작은 따스함이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 두 스푼을 얹어 만든 음식을 건네는, 조금 특별한 식당을.

취재 고은비 기자 사진 박종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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