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Story 선교사 김대인

‘코이’라는 신기한 물고기는 어디에서 자라느냐에 따라서 크기가 달라진다. 어항에서는 손가락 길이로 자라고, 연못에서는 손바닥 크기 정도로, 강에서는 양팔 길이까지 자란다. 어항 속 코이가 연못에 처음 갔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넓은 곳을 휘젓고 다니는 물고기들을 보고 두려웠을지 모른다. 그러다 강으로 가면 코이는 더 놀랐을 것이다. 어항 속에서는 누릴 수 없는, 넓고 깊은 세계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 세계도 코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어항처럼 좁은 마음으로 힘겨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연못이 전부인 양 신나게 사는 사람도 있다. 또 망망대해 같은 마음으로 조용히 자유롭게 살다 가는 사람도 가끔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물고기도 스스로 어항을 나와 연못으로 갈 수는 없다.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하다.

사람의 마음도 좁은 곳에서 넓은 곳으로 저절로 옮겨지지 않는다. 이끌어주는 존재가 있어야 더 크고 넓은 세계로 갈 수 있다. 여기,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자족하며 살다가 어느 날  스승을 만나 더 행복한 세계로 나아간 한 사람을 소개한다.

탕 탕 탕!

칠흑처럼 깜깜한 밤, 총성이 적막을 가른다. 이어서 유리창 깨지는 소리에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온 세상이 코로나로 신음하고 있는 가운데 미얀마에 또 다른 고통이 시작된 것이다.  2021년 봄, 민 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은 쿠데타를 일으켰고 시민들을 향해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다. 이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으며,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사람들은 그냥 떨고만 있다. 

60년의 식민통치와 54년의 군사독재라는 아픈 시간을 겪고 얻어낸 민주주의는 5년간의 짧은 평화로 막을 내리고, 미얀마는 다시 독재 시대로 돌아가고 있다. 해결의 조짐이 보이지 않자, 외국인들은 미련 없이 미얀마를 떠나고 해외 기업들도 사업장을 철수하기 시작했다.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폭격과 쿠데타군의 침입으로 불안이 감도는 저녁, 양곤의 어느 교회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들었다. 그리고 김대인 선교사 주변에 둘러앉았다. 침묵이 한동안 흐르고, 누군가 입을 열었다. 

“목사님, 가…실 거죠? 언제 떠나실 거예요?”

가더라도 몰래 떠나지 말고 우리를 기억해달라는 애절함이 목소리에 실려 있었다.

“내가 어딜 가요?”

“다들 집으로 돌아가잖아요. 한국으로 안 가세요?”

“여기에 내 집을 놔두고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그는 말을 이어갔다.

“내가 대한민국 사람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미얀마에 20년을 살면서 이곳이 내 나라가 되었습니다. 나는 미얀마를 사랑하고, 미얀마 사람들도 사랑합니다. 여러분과 같이 나는 여기에 뼈를 묻을 생각입니다.”

사람들의 눈시울이 일렁거렸다. 사실, 지키고 돌볼 몸뚱이만 없다면 군부의 총탄도,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공격도 두려울 이유가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는 미얀마에서 한 걸음도 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처음부터 미얀마를 사랑했던 것은 아니었다 

김대인은 50대 경상도 사나이다. 서울서 300킬로미터 떨어진 거창군 가조면 작은 마을이 그가 자라온 어항 속이었다. 부모님은 큰 사람이 되길 바라셨는지 ‘대인’大人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셨고, 그는 이름에 걸맞게 공부도, 운동도 무엇이든 잘했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여유도 있었다. 여섯 살 때 사진관에서 찍었다는 흑백사진을 보니, 귀한 집 아들 티가 줄줄 흐른다. 양복 차림에 넥타이를 맸는데 소매 끝이 손등에 딱 떨어진다. 큰옷 사서 팔을 접혀 입던 당시와 다른 모습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는 한약방 한의사, 어머니는 양약방 약사였다. 넉넉한 환경은 아이의 마음에 구김살 생길 일을 원천봉쇄해 주었다.

해맑은 소년 김대인은 우등생들이 간다는 거창 대성고등학교에 입학했고, ‘뛰어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믿으며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데 대학 입학은 원대로 풀리지 않았다. 그의 인생에 첫 장애물이 등장한 것이다. 재수, 3수도 모자라 4수까지 간 그는 구겨진 종이처럼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감지한다.

‘내가 하려고만 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틀렸구나!’

희망이 없었다. 집으로 내려온 그는 저녁이면 소주병을 쥐고 들판을 배회했고, 낮에는 사람 만나는 게 싫어서 잠만 잤다. 이불을 덮어쓰면 어쩌다 인생이 꽈배기처럼 꼬였는지 비참해서 견딜 수 없었다. 결국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대전 한밭청소년수련원에서 한다는 수양회에 갔다. 아무런 기대감 없이 앉아서 설교를 들었는데 신기하게도 예수의 존재가 믿어졌다. ‘잘난 내 고집을 꺾기 위해서 4수라는 실패를 허락하셨구나.’ 구겨진 마음 틈새로 작은 빛이 들어왔다. 그 빛은 낙방을 감사로 바꾸고, 절망에서 소망을 보여주었다. 1989년 이른 봄이었다.

목표를 바꿔 그는 대구교육대학교에 입학했고 4년 뒤 졸업해 곧바로 초등학교 교사에 임용된다. 화내는 모습조차 사랑스런 정말 예쁜 아가씨와 결혼해 단란한 가정도 이룬 그는 퇴근길에 운전하다가 멀리 붉은 노을을 보면 탄성을 지르며 큰 목소리로 기도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고맙습니다. 못난 저를 구원해 주시고, 좋은 직장에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딸도 주셔서 저는 너무 행복합니다. 주일엔 가족 모두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합니다. 저는 지금 이렇게 사는 것이 좋습니다. 인생이 즐겁습니다. 더 이상은 하나님께 바라지도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즐겁고 행복한 건 분명한 사실인데, ‘이게 인생의 전부인가?’라는 의구심이 생기는 것을 떨쳐낼 수 없었다. 남들에게 받고 사는 것에 익숙한 그는 하나님께 인색한 자신이 조금씩 보였다. 받은 것의 일부라도 감사를 표하고 싶은, 알 수 없는 마음이 안에서 자꾸 꿈틀거렸다. 십 년을 그렇게 마음속에서 저울질을 하다가 그는 학교에 사직서를 낸다. 그리고 선교학교에 입학했다. 교사에서 사역자로 길을 바꾼 그의 용단에 주변에서는 놀라워했다.   

2000년 2월, 그는 서울 변두리 교회의 전도사로 발령을 받아 첫 사역을 시작했다. 6명이 나오는 작은 교회를 위해 그는 간절히 기도했고 열심히 전도하러 다녔다. 2년 만에 성도가 45명으로 늘어나 너무 기뻤다. 가족 같은 분위기 속에서 ‘전도사님, 전도사님’ 하면서 따르는 사람들이 고마웠고 그들과 오래 행복하게 지내고 싶었다. 

김대인 전도사, 미얀마 선교사로 파송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속한 선교회에서 말하길, 김대인 전도사가 미얀마 사람들을 위해 일하면 좋겠다고 했다. 큰일을 하라는 건데 기쁘게 들리지 않았다.

‘내가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데 왜 선교를 가라는 거야? 이건 그만두라는 소리야. 내 인내력은 여기까지야!’

인터넷에서 미얀마를 검색해보니 더 자신이 없었다. 황금빛 탑과 불상이 가득하고, 미얀마 글자는 동글동글한 라면 부스러기 같았다. 동남아에서 가장 빈곤하고 군부독재가 지배하는 나라. 게다가 90퍼센트 이상이 불교신자였다. 미얀마 국민들에게 불교는 종교를 넘어선 신념이자 생활 그 자체였다. 이런 나라에서 선교를 하라니…. 버티고 버티다가 그는 스승을 찾아갔다.

 “목사님, 불상밖에 없는 나라에 왜 저를 보내십니까?”

 “아니네, 그곳에는 사람들도 많이 살아!”

촌철살인 같은 답변이 그의 불평하는 마음을 붙잡아주었다. 어두운 곳만 응시하고 있으니 부정적이고 암담한 면만 보았던 것이다. 스승의 마음을 받아 ‘한번 가보자!’고 그는 결심한다. 그러면서 마음속 비밀서랍에 이런 쪽지를 숨겨 두었다.

‘3년만 살아보자. 그러고 나서 도망가도 늦지는 않을 거야.’

모든 것이 생소했던 미얀마의 풍경들

2002년 5월, 그는 가족을 데리고 미얀마에 도착한다. 우기를 맞은 양곤은 지열과 습기로 후덥지근했다. 어항에서 연못으로 옮겨온 코이처럼, 미얀마에 처음 온 그는 낯설고 어설픈 환경에 불평불만이 떠나질 않았다.

“왜 이렇게 더워?” “수도에선 벌건 녹물만 나오고 길엔 온통 쓰레기뿐이야….” “저 까마귀 녀석, 재수 없게 우리 집에 또 왔네….”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찾아갈 곳도 없었다. 그곳에 살려면 그는 말부터 배워야 했다.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 꼭 필요한 문장 5백 개를 열심히 외웠다. 발음이 안 되면 지나가는 초등학생을 붙잡고 물어봤다. 그러다가 ‘가을동화’라는 한국 드라마가 인기몰이를 하면서, 그는 드라마 자막을 일일이 노트에 받아 적으며 공부했다. 그렇게 독학으로 습득한 언어 실력이 나중에는 현지인을 훌쩍 넘어섰다.

말문이 열리면서 설교, 강연, 통역, 상담, 번역까지 가능해졌고, 막막했던 선교가 서서히 풀리는 것 같았다. 한 사람, 두 사람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와 함께하려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만나서 사귈수록 한국인들에게서 느껴본 적 없는 순수함이 그들에게 가득했다. 그는 미얀마와 사랑에 빠져들었고, 작은 손짓에도 크게 호응하는 천진스런 그들을 위해 가진 것 모두를 내주고 싶었다.

그를 살린 김밥 사건

“따르릉!”

“여보세요?”

2005년 9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리는데 스승이신 박옥수 목사님이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그래. 자네 요즘 김밥 장사 하는가?”

“네? 아니오. 제가 장사하는 게 아니라 장사하는 미얀마 형제 자매들을 위해 한국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김만 사줍니다. 미얀마에는 김이 없어서요. 목사님, 김 좀 보내주세요.”

“김 목사, 알겠네. 김 보낼 때 내가 선교사도 같이 보내겠네.”

“선교사는 왜요?”

“자네는 김밥 장사를 도와야 하니 누가 선교를 하겠나? 그렇게 살면 자네가 앞으로 성경을 읽어도 김밥, 전도해도 김밥, 기도해도 김밥, 온 세상이 김밥으로만 보일 걸세.”

순간 머리에 번개가 번쩍거렸다. 사실 그의 머리에는 이런 생각들이 가득했다.

‘때묻지 않은 저 사람들. 너무 가난해서 속이 상한다. 잘살게 해줄 수 없을까?’

‘김밥 장사를 해서 잘 되면 미얀마 전국에 지점을 내는 거야. 그렇게 번 돈으로 헌금이 들어오면 선교회를 뒷받침할 수도 있겠지!’

그래서 그는 미얀마 최대 명절인 ‘물 축제’ 기간에 장사할 수 있도록 성도들에게 김밥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성경을 봐도 김밥이 아른거리는 걸 이미 간파한 스승을 향해 그는 ‘항복’을 선언하며 고개를 숙였다.

“목사님, 잘못했습니다. 제가 마음을 바꾸겠습니다.”

“허허허. 자네가 마음을 바꾼다니 고맙네. 좀 어려워도 기도하면서 전도하고 살면 하나님이 도우시네.”

한류 열풍이 불어서 물 축제 기간에 한국 김밥을 팔면 일주일에 1백만 원을 거뜬히 벌 수 있었다. 그때 미얀마 노동자 월급이 평균 2만 5천 원이었으니 1백만 원은 대단한 금액이었다. 가난한 미얀마 교인들이 잘사는 길은 김밥 장사에 달린 것 같았다. 하지만 스승의 이야기에 생각을 돌이키고 보니, 미얀마 사람들을 향한 자신의 얄팍한 사랑이 드러나 부끄러웠다.

겨울에 국립공원에 가면 ‘야생동물에게 먹이를 주지 마시오’라는 팻말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폭설로 먹잇감을 못 찾는 동물이 측은하다고 음식을 주면 당장의 배고픔은 잊게 해줄 수 있다. 문제는, 눈이 오면 그 동물이 먹이를 찾으러 갈 생각을 하지 않고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게 된다는 것이다. 눈 속을 헤매는 고생을 하지 않아도 먹이가 생기는 길을 알았기 때문이다. 야생동물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먹이를 주고 싶은 마음을 참고 끝까지 기다려주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얀마 사람들을 가난에서 건져내는 길은 김밥 장사가 아니었다. 가난을 이겨낼 정신만 있으면 가난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들에게 그런 강인한 정신을 심어주는 것이 선교사가 할 역할이었다. 그런데 그가 딴전을 부리고 있으니까 스승은 다른 선교사를 보내서라도 미얀마 사람들에게 필요한 마음을 가르치려고 했던 것이다.

‘내 좁은 마음에서는 김밥의 행복밖에 나오지 않는구나. 내가 넓은 스승의 마음을 받으면 우리 성도들에게 진짜 행복을 가르쳐줄 수 있겠지!’

항복을 선언한 그날, 김대인 선교사는 자신의 얕은 생각을 버리고 스승의 깊은 지혜를 선택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연결된 삶을 사는 스승의 마음에 링크를 걸었다.

불교의 나라에서 열리는 유일한 크리스마스 행사

김밥 사건이 있고부터 스승 목사님은 그가 있는 미얀마를 매년 찾아주었다.  1백 명 이상이 모이는 행사를 하려면 정부 허가가 있어야 했고, 외국인이 설교하는 것은 특히 더 어려웠지만, 미얀마 사람들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기에 마음을 정하고 움직였을 때 그 길들이 하나둘 열렸다. 행사를 하고 나면 성도들이 몇 배로 늘어나 교회가 우후죽순처럼 커져갔다. 교회만 쑥쑥 자란 게 아니라 사역자도, 성도들도 함께 성장해갔다.

자신의 좁은 마음에서 벗어나 마음을 조금 넓히자, 스승이 하고 있는 일을 그도 그대로 해보고 싶었다. ‘미얀마 사람들을 위해서 스승처럼 일하자.’ 그는 먼저 합창단을 만들었다. 창단 14년째인 진달래합창단은 현재 합창 단원 40명에 오케스트라 단원 30명으로, 미얀마에서 가장 규모가 큰 최고의 합창단이 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미얀마는 학교에 음악 수업이 없어서 사람들이 도레미조차 모르고, 공연 문화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교회 성도들이 언제부턴가 한국 그라시아스합창단의 공연 영상을 보고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실력이 좀 붙자,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을 해도 되냐고 김대인 선교사 에게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일을 계기로 합창단이 정식으로 만들어졌다. 얼마 뒤, 그들이 준비한 크리스마스 칸타타 첫 공연을 본 그는 펑펑 울고 말았다. 강으로, 바다로 갈 사람들을 자신이 어항 속에 집어넣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서였다.

‘행복을 찾아가는 마음을 넣어주면 되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그와 함께 일하려는 사람들이 도시마다 있고, 해마다 크리스마스 칸타타 축제도 열고 있다. 미얀마의 유일한 크리스마스 행사를 보려고 전국 각지에서 3박 4일 기차를 타고 오는 사람들도 많다. 이 행사엔 불교신자인 장관이 참석해 축사를 한다. 말 그대로 모든 이의 축제여서, 누구든지 공연도 보고 강연도 들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공연장에 모이는 3천 명 관객들을 위해 교회에서 점심을 준비한다. 수천 개의 도시락을 만드는 일이 쉽지 않지만, 성도들이 조금씩 모은 쌀로 밥을 짓고 싱글벙글 기쁜 마음으로 함께 반찬을 만든다.

미얀마어로 사람들에게 성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선교사 김대인.
미얀마어로 사람들에게 성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선교사 김대인.

아름다운 연결로 세상은 더 아름다워지고

한국에서 선교사로 파송된 그는 미얀마가 종착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시각에서 보니 미얀마는 선교의 시작점이기도 했다. 미얀마 젊은이들은 대부분 경제 사정이 좋은 외국에 나가고 싶어 한다. 난민 비자를 받아 해외로 가서 돈을 벌려는 청년들이 교회에도 제법 많았다. 돈 벌러 떠나는 그들이 안타까웠지만, 그들은 외국에 나가 돈만 벌지 않았다. 교회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낸 기억을 되살려 그들은 다른 나라에서 또 다른 김대인이 되었다. 그를 따르던 쏘산토아, 잉잉모에, 마쉐이, 도자엉 등 많은 젊은이들이 말레이시아, 일본, 호주, 캐나다, 미국, 동티모르로 가서 그곳 미얀마 사람들을 위해 교회들을 세워갔다. 이제는 미얀마 사람들도 다른 나라의 누군가를 돕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스승의 마음에 링크를 걸면서 그의 사역도 반경이 점점 넓어졌다. 정부 부처나 행정 관료들을 만나는 것이 부담스럽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찾아가서 마음을 열고 대화하다 보면 닫힌 것처럼 보였던 문들이 열렸다. 그는 외진 산골에 찾아가서 그곳 사람들에게도 아름다운 공연을 보여주고, 좋은 설교도 들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북부 산악지방 미치나에서 성경세미나를 열기로 계획했다. 그곳은 반군의 출몰이 심하고 폭탄 테러도 있어서 집회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누구도 그곳에 갈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얼마 뒤 정부군과 반군이 평화 협정을 맺었다는 뉴스 보도가 있었다. 가려고 마음을 먹으니 길은 절대로 막혀 있지 않았다. 쾌재를 부른 그는 미치나에서 정부 허가를 최초로 받아 종교 행사를 했다. 어디든 머뭇거리지 않고, 누구든 마다하지 않는 김대인 선교사는 바다에 다다른 커다란 코이였던 것이다.

그 사이에 그에게 고통스런 일들도 있었다. 위경련, 뎅기열로 생사를 오간 적이 있으며, 공황장애에 시달리면서 여기가 인생 끝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때마다 스승은 그에게 아픔을 이길 수 있는 마음을 심어주었다. 여태까지 모든 문제를 마음에서부터 이겨온 것처럼 지금 상황도 이겨나가자고 했다. 그는 아프지 않았던 게 아니라 아팠고, 어렵지 않았던 게 아니라 실제로 어려웠다. 그런데 스승은 먼저 그가 그런 문제를 이겨낼 힘을 마음에 넣어주었다.

불교 나라여서, 정부 통제가 심한 나라여서 선교가 어렵다고 생각하고, 그 생각에 멈춰 서서 도전하지 않았다면 그는 어떻게 살았을까? 다행히 그의 스승은 그를 이끌었고, 그는 자신이 있던 곳을 떠나 스승의 길을 선택했다. 우리 인생은, 코이를 강물에 옮겨주면 크게 자란다는 진리를 아는 자가 더 넓은 곳으로 가자고 내밀 때, 그 손을 잡는 선택에 의해서 아름답게 만들어져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름다운 마음을 보고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 물들여 미얀마 사람들과 함께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간 김대인 선교사. 올 겨울에도 미얀마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하는 행복한 크리스마스 행사가 열릴 것이다.

글 조현주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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