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마음을 읽는 방송작가 강의모

‘읽는다’라는 동사에 빠질 수 없는 명사가 ‘책’일 것이다. 남녀노소 누구든지 읽으면 사고력을 기를 수 있고 지혜를 얻을 수 있어서 ‘스승’이라 불리지만, 한편으론 읽어야 하는 ‘부담스러운 존재’이기도 한 책. 어떻게 읽을 때 잘 읽는다고 할 수 있을까? 그 답을 찾기 위해 수십 년 간 책과 동행하며 16년째 SBS라디오 ‘책하고 놀자’ 구성을 맡고 있는 방송작가, 강의모 씨를 만났다. 

오늘은 어떤 녹음을 마치고 오신 건가요?

매주 토요일, 일요일 아침에 방송되는 ‘책하고 놀자’ 프로그램 중에 새로 나온 책의 저자가 출연해서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내 책 어때요?’라는 코너가 있어요. 오늘은 미술 에세이집을 내신 양정무 교수님 녹음을 진행하고 왔어요. 여기서 방송작가가 할 일은 신간 저자를 선정해 섭외하고, 책을 미리 읽고 무슨 질문을 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거예요. 이외에도 웹툰, 생태, 인문학, 스포츠, 과학, 역사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코너가 있는데요. 이런 경우 각 코너의 고정 게스트가 각기 분야에서 저보다 훨씬 전문가이기 때문에 게스트 분들이 선정한 책이나 주제를 두고 서로 조율하는 일을 합니다.

책 관련 방송일을 하니 정말 많은 책을 접하시겠어요.

네(웃음). 책을 많이 만날 수 있다는 점이 좋아서 ‘책하고 놀자’ 작가 제안이 들어왔을 때 두말없이 잡아챘어요. 얼마 전까지 김탁환 작가님과 10년 동안 코너를 함께했고요. 코너 이름이 ‘김탁환의 뒤적뒤적’이었는데, 그간 함께 뒤적인 책들이 300여 권이었죠.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 읽어야 하는 책, 일하다가 호기심이 생긴 책, 개인적으로 읽고 싶은 책 등을 마구잡이로 집안에 들일 땐 방바닥에 책들이 쌓일 정도였어요. 지금은 거실 한쪽 면에 이중 책장을 만들어 거기에 열 맞춰 세워뒀어요.

하루하루가 기적이라 생각하며, 녹음실로 들어선다.
하루하루가 기적이라 생각하며, 녹음실로 들어선다.

원래 책을 좋아하셨던 모양입니다.

제가 어렸을 적엔 주위에 책을 읽으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책을 읽고 있으면 엄마가 밥 먹으라고 오히려 뭐라고 하셨지요. 책 좀 사달라고 해도 원하는 책을 척척 사줄 만큼 부잣집도 아니었고요. 저에게 책은 일종의 결핍이었죠. 중학교 1학년 때 첫 중간고사를 앞두고 친구 집에 놀러간 적이 있는데 그 집 거실에 커다란 책장이 있었어요. 친구가 잠든 뒤 거기서 몇 권의 책을 빼들었고, 황순원의 소설을 읽다가 해가 뜬 적도 있었어요(웃음).

얼마 전에 제 삶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집을 출간했는데, 그때 제 삶을 돌아보는 과정이 있었어요. 저는 여행을 다니거나 많은 사람을 사귀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아웃사이더, 외골수처럼 자기 껍데기 안에 들어가는 그런 성격이었죠. ‘그렇다면 나를 만들어낸 건 무엇일까?’ 스스로에게 질문했는데, 그나마 책이 나를 성장시킨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재미있는 점은, 젊은 날에는 제 입맛에 맞는 책을 골라 읽었다면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진도가 안 나가는 책이나 평소 읽지 않던 책을 읽는 등 편식을 고쳤다는 거예요.

독서 편식을 고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기보단 살면서 이런 시련도 겪고 저런 어려움도 겪으면서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나 생각하는 방향이 달라졌는데, 그게 독서에도 자연스레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제가 결혼을 조금 일찍 했어요. 그런데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아 이혼한 뒤 아들과 한 팀을 이뤄서 독립했어요. 그때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이었죠. 그땐 ‘내가 너 하나 못 키우겠니!’라는 마음으로 손에 아무것도 없이 나왔는데, 돌이켜보면 무모하고도 용감한 일이었어요. 큰소리는 쳤지만 당시 저는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었죠.

그런데 그때 주변에서 저를 좋게 기억해주고 저를 도와주려는 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제가 방송을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죠. 하루는 어렸을 때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가 방송계에 있었어요. 저를 만나자마자 “너는 학교 다닐 때부터 글을 잘 썼던 친구인데 왜 이러고 살아? 네가 이런 인생을 살 수 없다.”라고 하더군요. 그때 정말 힘들었는데 나를 그렇게 봐주는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 게 위로가 되고 큰 힘이 됐어요. 그 친구 소개로 방송계에 진입했지요.

아들과 독립해 살면서 가장 많이 한 생각이 ‘혼자 세상을 살아가는 게 아니구나, 나 혼자 힘으로 되는 일이 없구나’였어요. 그래서 나를 살펴주고 돌봐준 사람들을 생각하며 열심히 살았고, 저도 주변을 살피며 살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지내다 제 삶의 변화에 정점을 찍은 게 라디오 다큐를 하면서였어요. 다양한 형태의 가족, 조손 가정의 현실, 저출산 문제, 취업 준비생들 이야기 등을 다큐로 만들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정리하면서 삶을 다시 배웠어요. ‘나만 힘든 일을 겪는 게 아니구나.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도 이런저런 어려움을 만나지만 다시 살아가고 있구나.’ 그때 산다는 것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 그런 게 생겼던 것 같아요.

정선 민둥산에서 만난, 그리운 할머니
정선 민둥산에서 만난, 그리운 할머니

또, 사람 만나는 재미도 알게 됐죠. 예전에 추석 특집으로 강원도 정선 민둥산을 찾아간 적이 있어요. 산 아래 외딴집 두 채가 있는데 자식들을 다 도시로 보낸 할머니 두 분이 각기 따로 살고 계셨죠. 그곳에서 2박3일 머물며 두 분의 지나온 삶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때 두 분이 밭에서 막 뜯은 상추로 상을 차려주시고 젓가락으로 장단을 두드리면서 정선아리랑을 불러주셨어요. 그 할머니들과 나눴던 우정, 교감의 기쁨이 얼마나 크던지요. 평생을 가는 것 같아요.

오랜 세월 갇혀 살았던 제가 50대에 가까워지면서부터 그렇게 세상과 사람을 향해 열리기 시작했어요. 그즈음에 ‘책하고 놀자’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책을 택하고 이해하는 폭이 훨씬 넓어졌지요.

최근에는 어떤 책을 읽으셨나요?

강화길 작가의 소설 <대부 호텔의 유령>과 윤성희 작가의 소설집 <날마다 만우절>을 읽었어요. 현재 저와 함께 일하는 디제이와 피디가 1990년대생이에요. 그래서 가능하면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많이 읽고 소개하려고 합니다.

젊은 세대의 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땐 저와 가치관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읽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니야. 내 시각으로 이들을 보는 게 아니라, 이들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들의 세계로 한번 들어가봐야겠다.’ 그런 마음으로 책장을 한 장 두 장 넘기다보면 마음의 문이 열릴 때가 있더라고요. 일 때문에 책을 읽기 시작하지만 어느 순간 호기심이 생기고 공감대가 형성되면, 그 작가에 대해서 관심도 생기고 다른 작품도 찾아보게 돼요.

전에는 나이 드신 분들에게 많이 배우기 위해 그분들의 생각을 잘 읽으려고 했어요. 어른들을 찾아다니는 일에서 행복을 느끼고, ‘나의 노후 모습은 어때야 할까?’라는 고민도 던져보고요. 요즘은 젊은 친구들을 보면서 배워요. ‘이 세상을 위해 나는 어떻게 늙는 게 좋을까?’라는 고민도 곁들이면서요. 젊었을 땐, 나이가 든다는 건 ‘앞에 놓인 여러 갈래의 길에서 나의 길을 하나씩 선택하는 것이니 그것은 곧 나머지 문을 계속 닫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나이가 든다는 건 계속해서 새로운 문들이 열리는 과정인 것 같아요.

한 세대만 지나도 새로운 흐름의 책들이 등장하고, 새롭게 수용하고 배워야 할 것들이 많아집니다. 그래서 오래 전에 쓰인 고전 문학 작품 등은 읽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작가님은 고전 작품도 많이 보셨을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젊었을 때엔 도장 깨기 같은 욕심에 고전 문학을 읽었던 것 같아요. 대학생 때에는 전공이 국어교육이었고 이후 교사로 근무했는데, 그땐 의무감에 읽었지요. 전체 독서에서 고전 읽기를 무척 선호한 것은 아니었어요. 고전 중에서도 심오한 철학이 담긴 책보다는 러브라인이나 재미있는 스토리가 이끌어가는 소설이 흥미로웠어요. <개선문>이나 <오만과 편견> 같은 소설을 좋아했고, 헤밍웨이가 쓴 소설을 좋아했지요.

강의모 작가에게 인생은 혼자 사는 게 아님을 느끼게 해준 고마운 사람들이 있다. 사진 왼쪽부터 ‘책하고 놀자’ 디제이로 9년간 함께한 최영아 아나운서, 10년을 함께한 김탁환 작가, 라디오 프로그램 기둥으로 함께한 이선아 피디.
강의모 작가에게 인생은 혼자 사는 게 아님을 느끼게 해준 고마운 사람들이 있다. 사진 왼쪽부터 ‘책하고 놀자’ 디제이로 9년간 함께한 최영아 아나운서, 10년을 함께한 김탁환 작가, 라디오 프로그램 기둥으로 함께한 이선아 피디.

그러다 ‘책하고 놀자’ 작가로 일하면서 김탁환 작가님 덕분에 두꺼운 고전 소설도 많이 읽었어요. <에덴의 동쪽> 같은 소설은 상하권 합해서 1165쪽짜리 책이었죠. 그때 피디, 진행자, 저, 그렇게 셋이 서로를 격려하면서 감상을 공유하며 열심히 읽었어요. 이해하기 어렵거나 두꺼운 책을 읽는 요령은 함께 읽기가 좋은 것 같아요. 그게 어렵다면, 다른 사람과 나의 감상을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어요. 특히 고전은 비평이나 독후감 등 자료가 많으니까요.

그 외에도 고전을 읽으며 책에 묘사된 시대 배경, 옷차림, 분위기 등 그 시대를 읽어가는 것도 흥미로운 것 같아요. 물론 고전 소설을 읽을 때 시대적 배경을 미리 알고 읽으면 더 편하게 읽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것보다 스토리 중심으로 재미있게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그러다 흥미가 생기면 하나씩 알아가고 찾아가는 재미를 느낄 수도 있으니까요.

덧붙여서 고전에는 삶의 보편적 진리가 들어 있는데, 보물찾기처럼 그런 걸 찾는 재미도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나이가 든 뒤에 가장 맛있게 읽었던 책이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였어요. 마지막 부분에 주인공이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이 있는데,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과정이 나와요. 해가 지는 중에 그 대목을 읽다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지?’ 하며 제 인생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제가 그 책을 세 번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집중하는 부분이 달라져요. 책을 읽다보면 ‘내가 생각했던 게 여기 들어 있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네’ 하고 공감하기도 하고, ‘이 사람도 실수를 했네, 그런데 이 사람은 이걸 이렇게 받아들였네’ 하고 배우기도 해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시대를 읽는 기쁨이든 혹은 새로운 진리를 깨닫는 기쁨이든, 결국 독서 습관을 만드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책을 읽는 게 재미있다, 그래서 읽고 싶다’ 그게 핵심이 아닐까요.

사람 만나는 재미를 알고 책 읽는 즐거움을 아는 작가님에게는 방송작가라는 직업이 천직인 것 같습니다(웃음).

맞아요. 일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놀랄 때가 많아요. 평소 좋아하던 작가 분들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거나 질문을 보낼 때면 ‘내가 무슨 복이 많아서 저런 분을 모셔놓고 이야기를 듣고 있나?’ 하죠. 처음에는 그런 신기함에 빠져 지냈어요. 나중에는 책을 읽는 재미도 달라졌어요. 돌아보면 처음에는 서툰 것이 많고 실수도 많이 했지만 그런 기쁨들 때문에 잘 견뎌왔던 것 같아요.

이 말도 꼭 하고 싶은데, 제 나이에 아직 방송작가를 하는 게 흔한 일이 아니잖아요. 하루하루가 기적이라 생각하면서 일하고 있어요. 제가 라디오 프로그램 클로징 멘트로 “행복한 동행, 책 한 권 잊지 마세요.”라고 적었어요. 책은 옆에 두고 언제나 활용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친구인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떤 장르든, 쉽든 어렵든, 오늘도 사람들에게 책 한 권을 권합니다.

강의모 작가는 자신의 삶을 ‘읽으며 익어온 삶’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가능했던 건 그가 자신의 세계에서 사는 것이 좁았음을 알고 바깥을 향해 문을 열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열림’의 즐거움을 맛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까닭에 그는 내일도 또 다른 문을 열고, 그 다음날도 또 다른 문을 열어서 누군가와 공감하고, 기뻐할 것이다.

취재 고은비 기자   사진 박종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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