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다해야, 너는 왜 이렇게 재미없게 살아?”

이 말을 들은 나는 억울하고 분했지만, 어떤 반박도 할 수 없었다. 학창시절, 내 삶은 무미건조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

나는 5살 때부터 ‘*신증후군’이란 병으로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평소보다 조금만 피곤하거나 정해진 음식 외에 다른 음식을 먹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이 풍선처럼 부어올랐다. 그래서 우리 집 냉장고에는 늘 내가 먹어야 하는 약이 가득 차 있었고, 어느 집에서나 볼 수 있는 쌀밥이나 소금기가 있는 반찬은 볼 수 없었다.*신증후군 : 콩팥(신장)이 제 기능을 못하여 발생하는 질병으로, 다량의 단백뇨, 부종, 고지혈증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한 달에 한 번꼴로 몸이 심하게 아파 자주 병원에 입원했다. 초등학생이었지만 학교보단 병원에 있는 시간이 길었고, 또래 친구들보다 간호사 선생님과 더 오래 지냈다. 병원 생활이 나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었기에, 이런 삶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내가 다른 친구들과 조금 다르다는 걸 알게 된 일이 있었다. 몸은 아팠지만 운동을 좋아했던 나는 달리기에 소질을 보였고, 육상대회에 출전하게 됐다. 그러나 대회를 코앞에 두고 온몸이 부어올랐다. 그런 나를 보시곤 의사 선생님도, 부모님도 대회에 나가는 건 무리라며 반대하셨고, 결국 나는 대회 출전을 포기했다. 이때부터 이 병이 내 삶에서 어떤 것들을 빼앗아 가는지 조금씩 알게 됐다. 

유리 상자를 벗어나

몸이 퉁퉁 붓는 거 외에는 딱히 다른 친구들과 다른 게 없어 보였지만, 나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조심해야 하는 것,  안 되는 것들 투성이었다. 마치 유리 상자에 갇혀 있는 거 같았다. 친구들의 평범한 일상에 들어가려고 하면 그곳엔 언제나 투명한 벽이 있었다.

특히 하굣길에 친구들과 사 먹는 떡볶이가 그렇게 먹고 싶었다. 그러나 간식을 먹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음식을 제외하고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되니 공부도 하지 말라고 했고, 몸이 피곤하면 안 되니 운동도 하면 안 된다고 했다. 내 주변 모든 사람들은 내게 항상 ‘하지 마라, 안 된다’라고 했다. 그래도 하고 싶은 게 생기면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 허락을 받은 뒤에야 겨우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제약이 많다 보니, 힘들고 어려운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정기검진을 받았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모든 수치가 정상이다.”라며 완치 판정을 내리셨다. 물론 모든 수치가 정상이라고 해도 재발이 높은 병이라 꾸준히 검진을 받고,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했지만 유리 상자를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 같아 너무 기뻤다.

그리고 몇 년 뒤, 대학생이 됐다. 16년간 나를 진료해 주신 의사선생님께서는 “지금까지 봐온 너의 몸 상태 중에 지금이 최고로 건강하다. 네가 하고 싶은 게 있었다면, 지금 다 해봐라”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부모님께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건 해외봉사를 떠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지금껏 꾸준히 병원을 다녀야 하고, 언제 어떻게 아플지 모른다는 이유로 해외는커녕 국내 장거리 여행도 쉽게 떠나지 못했었다.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에 부모님을 설득했고, 그렇게 필리핀으로 해외봉사를 떠났다.

원주민 마을 아이따Aeta를 돌아다니면 삼삼오오 모인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 함께 동네 한 바퀴를 돌다 보면 어느새 친구가 된다.
원주민 마을 아이따Aeta를 돌아다니면 삼삼오오 모인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 함께 동네 한 바퀴를 돌다 보면 어느새 친구가 된다.

과보호 속에서 자라지 못한 마음

처음 도착한 필리핀은 온화한 기후에, 티 없이 맑은 하늘이 아름다운 나라였다. 같은 아시아 대륙이라서 그런지 비슷한 문화가 정답기도 하고, 색다른 문화가 공존한 신비한 나라였다. 그곳에서 어떤 일을 만날지 설레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필리핀에 온 지 2주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현지어도 익힐 겸, 우리가 준비하고 있던 한국어 캠프 홍보도 할 겸 2명의 봉사 단원들과 함께 필리핀의 거리로 나갔다.

홍보를 하고 난 뒤, 너무 더운 날씨에 지친 우리들은 나무 그늘 아래 앉아서 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내 옆으로 다가오는 느낌이 들어서 돌아봤는데, 수상해 보이는 한 남자가 내 옆에 서있었다. 그 남자는 내게 돈을 달라는 듯이 손을 내밀었고, 나는 “I don't have money!”(돈 없어요!)라고 이야기했다. 그 순간 그 남자는 내 볼을 꼬집었고, 나는 너무 당황스러워 소리를 지르며 도망쳤다. 한참 멀어진 후에 정신이 드니 무서움, 당황스러움, 짜증이 몰려와 울음이 터져버렸다. 센터에 도착해서도 계속 눈물이 흘렀다.

이 감정은 다음 날까지 이어졌고, 일상생활을 하는 중에도 계속 그 남자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눈물이 났다. 나는 울면서도 ‘내가 왜 이러지? 왜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는 동안 나는 여전히 그 시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 나를 보시곤 지부장님께서 이야기를 해주셨다. “필리핀에는 한국에서 온 봉사자들 말고 멕시코, 대만, 베트남에서 온 봉사자들도 있어. 그런데 만약에 멕시코에서 온 봉사 단원이 이 일을 겪었다면 그냥. ‘아! 지부장님 짜증 나요.’ 이러고 말았을 거야. 왜냐면 멕시코는 필리핀보다 훨씬 치안이 좋지 않기 때문에,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넘을 수 있는 마음이 형성됐기 때문이야.”

한동안 코로나로 건물 안에서만 지내다가 모처럼 외출한 날에 바공시깟Bagong sikat이라는 곳을 찾아 자유를 만끽했다.
한동안 코로나로 건물 안에서만 지내다가 모처럼 외출한 날에 바공시깟Bagong sikat이라는 곳을 찾아 자유를 만끽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 내가 왜 그때 일을 떨쳐버리지 못하는지 깨달았다. 치안이 좋은 한국에서, 게다가 병 때문에 온갖 보호 속에서 자란 나는 자연스럽게 약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 때문에 처음 겪는 당황스러운 일에 내 온갖 감정을 쏟아낸 것이었다. 이 일을 겪으면서 내가 한국에서 얼마나 보호를 받고, 공주처럼 살았는지 돌아봤다. 그만큼 내가 얼마나 연약한 마음을 갖고 있는지도 말이다.

비바람에도 끄떡없는 들풀로

그 일이 있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필리핀 원주민 마을로 봉사를 떠났다. 그곳은 산속에 위치해 있었고, 먹을 음식을 구하기 위해 산을 돌아다녀야 하는 곳이었다. 그렇다 보니 원래 지냈던 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시설이 열악했다. 사는 곳에는 벌레도 많았고, 원주민들이 먹는 음식만 먹을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아서 항상 주변 환경과 음식에 예민했던 나였다. 처음 그곳에 도착했을 때, ‘내가 이곳에서 지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더 이상 보호 속에서, 안전한 곳에서만 살고 싶지 않았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끄떡없는 들풀이 되고 싶었다. 이곳이 나와 맞지 않을 거란 걱정을 떨쳐버리고, ‘여긴 필리핀이야. 한국에서 살았던 것처럼 살 수 없어. 현지인들처럼 밥도 손으로 먹고, 벌레도 신경 쓰지 말자.’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 다짐은 어느새 삶이 되었다.

원주민 마을은 한번 비가 내리면 며칠간 쉬지 않고 내린다. 그래서 그 비에 나무가 다 쓰러진다. 원주민들은 비가 멈추면 “가자” 소리치며 산을 타기 시작하는데,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따라나섰다. 쓰러진 나무에서 바나나를 따고 코코넛을 따는 시간이 너무 즐거웠다. 그런 나를 보고 현지 친구들은 “다해야. 너는 한국 사람 같지가 않아~”라고 이야기했다. 어느새 내가 필리핀에 완벽하게 적응한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누구보다 즐겁게 지냈고, 한 번의 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지냈다. 언제나 ‘하지 말아야지, 가만히 있어야지’ 하면서 살았는데,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열심히 도전하며 살았던 시간이었다. 

필리핀 학생들을 초청해 캠프를 열 때면, 많은 학생들이 관심을 가졌다.
필리핀 학생들을 초청해 캠프를 열 때면, 많은 학생들이 관심을 가졌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아

원주민 마을을 다녀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뚜블라이Tubly 지역으로 키즈 캠프를 하기 위해 떠났다. 이 지역은 필리핀 중에서도 특히 낙후된 곳이었다. 산속 깊은 곳에 위치해 있고, 낡고 오래된 건물에, 인터넷도 터지지 않았다. 정말 힘들었던 것은 화장실이 없어서 그냥 자연에서 해결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키즈 캠프를 준비하다 보니, ‘이곳에 사는 아이들에게 우리가 준비한 프로그램들을 제대로 진행할 수 있을까? 준비해오지 못한 물건들은 다 어디서 구하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뚜블라이에 사는 아이들은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우리를 기다렸다. 하루하루 키즈 캠프를 기다리는 아이들을 보니 ‘상황이 어렵고 힘들지만 어떻게든 해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준비한 프로그램을 차근차근 준비해서 진행했고, 캠프에 참가한 아이들이 너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느 곳보다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우리들의 마음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필리핀 아이들은 언제나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아해 주는 그들의 순수한 마음에 푹 빠져 지냈다.
필리핀 아이들은 언제나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아해 주는 그들의 순수한 마음에 푹 빠져 지냈다.

필리핀에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면, 창문 너머로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 보인다. 그리고 그 풍경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아, 정말 행복하다.’ 무심결에 머릿속을 가득 메운 행복에 깜짝깜짝 놀랐다. 한 번도 ‘행복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이곳에서 자연스럽게 행복을 느꼈다.

여태껏 온갖 보호 속에서 자란 내가 필리핀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들풀처럼 강한 마음을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필리핀에서의 1년은 유리 상자 속에 살던 나를 꺼내주었다. 어려운 환경을 뛰어넘는 법을 배우며 성장했고, 나도 충분히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걸 배웠다. 그리고 더 이상 나를 가두는 벽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이곳에서 누구보다 건강하게 숲속을 뛰어다녔던 것처럼, 앞으로도 어디든, 지금처럼 달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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