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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샌님에서 도전가로한국인터넷진흥원 노경래 선임연구원
최지나 기자 | 승인 2021.09.14 14:37

노경래 씨를 만난 날은 가실 것 같지 않던 무더위가 가라앉은 날이었다. 한바탕 내린 소나기 덕분인 듯했다. 비가 올 때만 해도 ‘내일까지 내리면 어쩌지?’ 걱정이 앞섰는데, 비가 그친 뒤 부는 선선한 바람이 상쾌했다. 촬영 스튜디오에서 만난 노경래 씨는 그날의 날씨처럼 청량한 사람이었다. 그는 기자를 보자마자 “제 오랜 꿈을 이뤄주셔서 너무 감사해요.”라고 하며 인사를 건넸다. 투머로우의 오랜 팬으로, 자신의 인터뷰 기사가 투머로우에 실리길 오랫동안 꿈꿨다고 한다. 인터뷰가 이어진 두 시간 동안 그의 밝은 에너지가 스튜디오를 가득 채웠다.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면, 그에게도 그칠 것 같지 않던 비가 내린 시절이 있었는지 몰랐을 것이다.

노경래
2008년에 굿뉴스코 해외봉사단으로 토고에 다녀온 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전자 IT 미디어공학과를 졸업했다. ‘내가 만든 정책 혹은 기술로 대한민국의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한국인터넷진흥원에 입사하여, 보안 시스템 구축 및 정책 수립 업무를 지원하는 상황관제팀을 거쳐 현재는 AI빅데이터보안팀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오랫동안 투머로우 인터뷰를 기다리셨다고요. 기자로서 매우 반가운 소식입니다.

투머로우를 읽을 때마다 해외봉사를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저도 해외봉사를 다녀왔기 때문에 잡지에 실리는 게 오랜 꿈이었습니다(하하). 토고로 해외봉사를 다녀온 지 벌써 10년도 더 지났지만, 그곳에서 배운 것들은 현재도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 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라 과거를 밝히는 게 조금은 부끄럽지만, 이기적이고 겁쟁이였던 제가 어떻게 변했는지 꼭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시니, 해외봉사를 가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하네요.

대학 시절부터 말씀드리자면, 저는 대학 입시에 실패한 우중충한 사람이었어요(하하). 어쩔 수 없이 들어간 학교에 갈 땐 실망감이란 가방을 매었고, 머릿속에는 ‘이곳에서 시간을 허투루 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MT 등 학교 행사에는 일체 참석하지 않았어요. 저 스스로 항상 먹구름 가득한 기운을 내뿜으며 그 누구와 말도 섞지 않았죠. 그렇게 1학년을 마쳤는데, 다시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때부터 가고 싶었던 해외봉사를 알아보고 토고로 떠났습니다.

토고에서 제 별명이 ‘서울 샌님’이었는데요. 세상 물정 모르고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라며 그렇게 불렀습니다. 거기에다 겁도 많아서 무슨 일을 시키면 제 몸이 다치거나 아플까봐 아무것도 하기 싫어했어요(하하). 그러니 어땠겠어요. 항상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고 살았죠. 무슨 일을 하든 불평불만에 현지인들과는 부딪히는 게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런데도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제가 거기서 말라리아에 여덟 번이나 걸렸어요. 보통 많이 걸려야 1년에 4번 정도라는데, 저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심하게 아팠어요. 그래서 토고에서 봉사단을 관리하시는 지부장님과 사모님, 현지인들이 귀하다는 음식은 다 저에게 가져다 주었어요. 한국 음식을 먹으면 그래도 기운을 차리지 않을까 해서 된장찌개, 라면, 한국 과자 등 쉽게 구할 수 없는 음식들을 주셨고, 현지 친구들은 자기들도 먹기 힘든 닭고기, 바게트, 콜라, 사이다 등 먹을 수 있는 건 다 가져다줬어요. 그런 데 저는 ‘입맛이 없다, 못 먹겠다’는 이유로 다 거절했어요. 사모님이 삼계탕을 끓인 날, 제가 맛있게 먹고 건강을 회복하길 기대했다가 제가 입도 안 대자 많이 속상해 하셨죠. ‘먹어야 산다, 한국에 건강하게 돌아가려면 먹는 수밖에 없다’라며 저를 타이르셨지만, 저는 결국 한 숟가락도 뜨지 않았어요.

그렇게 아프고 난 뒤, 문득 ‘내가 토고에 다시 올까? 나는 이곳에서 1년만 지내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텐데 이 사람들이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태도를 보면 잘해주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 그들은 제가 해외봉사자로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늘 큰 사랑을 주었어요. 매일 음식을 가져다주고, 번갈아가며 간호해주고…. 부모님한테서나 받을 수 있는 조건 없는 사랑을 받은 걸 떠올리니 너무 미안해서 눈물이 펑펑 나더라고요. 인간관계는 언제나 ‘기브 앤 테이크’라 생각했는데, 그게 여지없이 무너진 날이었죠.

매번 토고 사람들이 만들어준 현지 음식을 처음으로 직접 만들어 본 날이다. 옥수수 가루를 물에 풀어 뭉치지 않게 계속 저어야 한다.

왠지 그때부터 변화가 시작됐을 것 같은데요.

맞아요(하하). 토고에 간 지 4개월이 넘도록 현지 음식은 입에도 안 댔는데, 그때부터 궁금해지더라고요. ‘토고 사람들은 어떤 음식을 먹을까?’ 하면서 현지 음식을 먹어보고, ‘이들은 여가 시간에 뭘 하지?’ 하면서 같이 운동도 해보고, ‘날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 싶어서 대화도 해보고요. 그렇게 지내면서 토고 사람들과 많이 친해졌는데, 결국 알게 된 건 그들이 절 엄청 좋아한다는 거였어요(하하). 그리고 제가 그동안 얼마나 폐쇄적으로 살았는지 알 수 있었죠. 언제나 내 생각에 갇혀서 ‘이건 못 할 거야, 이걸 하면 다칠 거야, 이 사람들도 분명히 속으론 계산하고 있을 거야’ 등등 모든 일에 내 생각을 그대로 믿고 고집을 부리던 모습들이 떠올랐어요.

그런 제 모습을 바꿔보고 싶어서 한번은 왕복 1,500km의 무전여행에 도전했어요. ‘서울 샌님’에서 ‘도전가’로 탈바꿈하고 싶었거든요(하하). 지부장님이 몇 번이고 물으시더라고요. 정말 괜찮겠냐고, 갑자기 왜 그러냐고요. 제 마음이 확고한 것을 보고는 모이스라는 현지 친구를 붙여주셔서 우리는 함께 여행을 떠났습니다. 

키즈 캠프를 마친 뒤, 참석한 아이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남겼다.

1,500km면 서울과 부산을 2회 왕복한 거리인데요. 힘들진 않았나요?

정말 힘들었습니다(하하). 길을 나서자마자 후회했을 만큼이요. 힘들다고 투덜거리다가 모이스랑 많이 다퉜어요. 그때마다 모이스는 제가 여행을 포기하지 않게 저를 이끌어줬어요.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어떤 날은 굶기도 하고, 마구간에서 잠을 청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차를 타기도 하고, 맛있는 식사도 대접받고요. 무전여행을 하는 동안 많은 토고 사람들을 만났는데요. 정말 따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잠시 만난 사이일 뿐인데 평생 알고 지낸 사람처럼 저를 대해주었어요. 그런 만남들이, 내가 하는 여행이 얼마나 가치 있는 여행인지 가르쳐주었죠. 그렇게 7일 간의 여정을 끝내고 나니 ‘와, 내가 이걸 해냈어! 앞으로 못 할 게 없겠다!’는 새로운 마음이 절로 생기더라고요. 새로운 일이나 불안정하다 싶은 건 아무것도 하기 싫어했는데, 그때부터 성격이 바뀌었어요.

노경래 씨는 아프리카 토고에서 새로운 길에 발을 내딛었다. 첫 번째 걸음은 새로운 음식에 대한 도전이었고, 두 번째 걸음은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는 것이었고, 세 번째는 상대방의 진심에 귀 기울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진짜 길을 나섰다. 1,500km 거리를 돌고 나서야 그는 알았다. 그 발걸음은 그들의 진심어린 사랑에 대한 고마움이었음을. 도움을 주러 간 토고였지만, 그는 그곳에서 더 큰 것을 받고 온 듯 했다.

다시 돌아온 한국에서의 대학 생활은 어땠나요?

그렇게 가기 싫던 학교였는데 즐겁게 다녔습니다. 성격도 밝아지고 적극적으로 변해서 친구도 많이 사귀었고요. 이전의 저처럼 잘 섞이지 못하는 친구들에게는 먼저 다가가 이야기하고, 그 친구들은 어떤 이유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지 마음을 헤아려보기도 하고요.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새 과대표를 하고 있더라고요(하하). 2학년을 마친 뒤에는 준비한 편입시험에 합격해서 새로운 대학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성격도 달라지고 그토록 원하던 편입도 했으니 앞으로 잘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렇지 않더라고요(하하). 취업이 안 돼서 학교를 한 학기 더 다녔습니다. 그 당시 140여 군데에 이력서를 넣었는데 다 떨어졌습니다. 취업의 문턱이 꽤나 높더군요.

취업이 안 돼 고민하는 청년들이 많은데, 노경래 씨는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나요? 

저는 토고에 계시는 지부장님에게 연락했어요. 답답한 심정을 이메일로 털어놓았습니다. ‘140군데에서 떨어지니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또다시 자기소개서를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또 떨어지면 상처만 받을 거다’라는 내용이었죠. 지부장님은 ‘인생은 항상 도전과 시련의 연속이다. 네가 토고에서 배운 도전정신으로 네 앞에 놓인 산들을 넘어봐라. 네가 가진 강인한 마음은 새로운 힘으로 널 이끌 거다’라고 해주셨어요. 그 글을 읽으며 ‘맞아. 내가 아프리카에서 1,500km 여행도 다녀왔는데 못할 게 뭐가 있을까. 내 앞에 있는 산들을 어떻게 넘을까? 어떤 것부터 다시 준비해야 할까?’ 하며 리스트를 정리했어요. 그렇게 정리를 해보니, 제가 뭘 해야 할지 조금 보이더라고요. 특히 저는 문과대학에서 공과대학으로 편입한 경우라 면접 때마다 전문성이 떨어질 거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대학 졸업 후 전문 지식을 쌓기 위해 정부 기관에서 운영하는 한국정보기술연구원 교육기관에 입교해 5개월 동안 정보보안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전에는 감정에 호소하는 자기소개서를 썼는데요. 그때부터는 이 회사에 내가 왜 필요한지, 어떤 부분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자기소개서에 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입사하고자 하는 회사의 3년 치 기사를 읽고, 홈페이지에 들어가 중장기 경영 목표, 혁신 계획을 정리했습니다. 정리하고 보니 그 회사만의 중점 사업과 미래 가치가 보이더라고요. 해외봉사를 다녀온 경험을 녹여 회사가 원하 는 인재상을 작성했더니, 항상 쓴잔을 마셔야 했던 과거와 달리 꿈에 그리던 직장에 취업할 수 있었습니다.

원하는 회사에 입사했다니 마치 제 일처럼 기쁘네요. 현재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요?

저는 현재 한국인터넷진흥원 AI빅데이터보안팀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한국인터넷진흥원에서는 사이버보안빅데이터센터를 운영하고 있는데요. 이곳에 저장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빅데이터를 분석하고, 데이터센터를 이용하는 연구원, 기업 보안 담당자, 학생들에게 분석 모델과 사례를 제공합니다. 대학이나 연구기관, 기업에서는 우 리 회사에서 제공한 보안 모델을 벤치마킹하여 침해 사고에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합니다.

저는 늘 ‘내가 만드는 정책이나 기술이 대한민국의 발전에 기여하면 좋겠다’는 꿈을 꾸었는데요. 막연하게 꿈꿨던 일들을 이곳에서 하나씩 해내고 있다는 생각에 자부심을 갖고 업무에 임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말미에 ‘토고에 다녀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고 있을 것 같냐’고 노경래 씨에게 물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은 토고를 가기 전과 다녀온 후로 나뉜다’고, ‘그 후론 삶 자체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나는 그가 마치 ‘시간 투자의 귀재’처럼 보였다. 1년을 투자해 삶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면 그것만큼 대단한 투자는 없을 테니 말이다. 앞으로도 그는 여러 시련을 맞이하고 그것을 뛰어넘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토고에서 얻은 경험들이 그에게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취재 최지나 기자 사진 박종도 기자

최지나 기자  41536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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