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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참외 농부의 특별한 일터
고은비 기자 | 승인 2021.09.13 09:12

경북 성주에 마음가짐이 남다른 농부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그의 일과를 지켜보았다. 이상우 씨의 하루는 매일 새벽 4시에 시작된다. 아내와 함께 새벽부터 참외밭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일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는 일 이야기, 아들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눈다. 기자의 눈에는 열심히 사는 중년 농부의 평범한 일상인데, 이상우 씨는 어느 것 하나 특별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가 보내고 있는 하루는, 수십 년 길을 잃고 홀로 주저앉아 있던 자신에게 찾아온 제2의 인생이라고 한다. 그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유일한 휴식 시간이라는 오후 2시, 마주앉아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면 힘들지 않습니까?

아침 8시만 되어도 비닐하우스 안이 무척 뜨거워져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힘들어도 새벽에 일어나야죠. 그래서 오후에 한 시간 반 정도 쉽니다. 지난 7월까지 참외 수확을 끝냈고, 요즘은 내년 농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토양을 만듭니다. 참외 넝쿨을 걷어낸 후 소독도 하고, 토양에 좋은 풀을 심어서 갈아엎는 작업을 하는 거지요. 수고롭지만 땅이 얼마나 좋냐에 따라 열매가 결정되기 때문에 참외를 수확하지 않는 시기에도 새벽부터 저녁까지 일하는 시간은 늘 같습니다. 다만 참외가 달려 있을 때는 출근해서 “참외들, 굿모닝!” 하고 인사하면서 일을 시작하는데, 요즘은 인사할 참외가 없으니 조금 허전하네요(웃음).

참외 농사를 시작하신 지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7년 정도 됐습니다. 그 전에는 기술자로 일했습니다. 청년 때 공장에서 악착같이 일을 배웠지요. 남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하고 두세 시간 늦게 퇴근해도 힘든 줄 몰랐습니다. 저는 어릴 때 어머니에게 버림받아 고아로 자랐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갖은 수모를 겪었지요. 그래서 ‘반드시 성공해서 나를 버린 어무이앞에 나타날 거다!’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렇게 지내다 어느 날 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오랫동안 어머니를 원망했는데, 막상 어머니를 보자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제 평생 그렇게 울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머니를 향한 원망이 사라지고, 이 세상에 나 혼자가 아닌 가족이 있다는 게 삶에 큰 위안이자 기쁨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지만 그 행복도 제겐 얼마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를 무덤에 묻고 내려오던 날, 저는 살아갈 이유를 잃었습니다. ‘이 세상에 진짜 나밖에 없구나. 나는 외톨이구나!’ 그때부터 방 안에 틀어박혀 수십 병씩 술을 마셨습니다. 술을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밥도 먹지 않고 안주도 없이 20일 동안 술만 마셨죠. 그러다 겨우 정신을 차리면 일을 했고, 그 돈으로 다시 술을 마셨습니다. 그런 생활을 반복했습니다. 나중에는 술을 그만 마시고 싶어도 끊을 수가 없더군요. 그렇게 지내고 있는데 제 소식을 들은 고향 후배가 성주로 내려와서 요양도 하고 참외 농사를 지으면 어떻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때 성주에 처음 왔고, 몇 달 뒤 후배의 참외밭을 인수해 농사일을 시작했습니다.

삶에 변화를 주고 싶어서 성주로 오신 것이군요.

그렇죠. 하지만 성주에 와서도 술을 끊지 못했습니다. 한 번 술을 마시면 며칠 동안 인사불성이 되니 마을 사람들이 금방 저를 알아봤습니다. 참외 농사를 짓는 법도 잘 모르고 매일같이 술을 마시니 참외 농사가 잘될 리 없었죠. 그래도 애를 쓴다고 쓰는데, 우리 참외밭에 있는 참외들은 크기도 작고 병든 것이 많아서 늘 값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앞에 있는 참외밭은 농사가 너무 잘되는 겁니다. 참외가 크고 색도 아주 노랗고요. 술에 취해서 봐도 그 집 참외는 보기가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 집에 놀러가 참외밭 구경을 하곤 했지요.

그 밭 주인의 성이 손 씨여서 제가 그분을 ‘손 형님’이라고 불렀습니다. 형님은 제가 갈 때마다 참외 농사법을 알려주었습니다. 호박 뿌리에 참외 뿌리를 접붙이는 법, 좋은 토양을 만드는 법 등 기초적인 것부터 자신이 오랜 시간 연구해 터득한 비법까지 하나하나 가르쳐주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대로 따라 해도 결과가 신통치 않아 ‘내가 농사 배워서 뭐 하겠노? 안 되겠다’ 하며 성주를 떠나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손 형님이 “내가 도와줄게. 한 번만 더 해봐라. 더 해봐라.” 하고 저를 잡아주었습니다. ‘한 번만 더 해보자’ 하다가 지금까지 왔네요. 그 사이에 저희 밭 참외 품질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이제는 제값 받고 팔고 있습니다(웃음). 1년 전부터는 성주의 다른 농부들과 함께 ‘보화 작목반’을 만들어 손 형님의 참외 농사법도 배우고, 병충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할 방도를 함께 연구하고 있습니다.

손 형님은 잊을 수 없는 큰 은인이네요.

농사뿐 아니라 제 삶도 새롭게 이끌어준 고마운 분입니다. 손 형님에게 참외 농사를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술을 잔뜩 마셨던 적이 있습니다. 그날 다리에 힘이 풀려 길에서 주저앉았는데 일어설 수가 없었습니다. 다리에 아무 힘이 없었습니다. 제가 알코올 중독인 건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날은 겁이 났습니다. ‘나를 보살펴줄 가족도 없는데…, 이러다 정말 비참하게 죽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때 마침 손 형님이 지나가다가 저를 보고 다가왔습니다. 제가 “형님, 나 좀 살려주이소!” 하고 붙잡고 애원했지요.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그래, 상우야. 이제 내 말 한번 들어볼래?” 하면서 손을 내밀어주었습니다. 그날 그 장면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그날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형님이 종종 저를 불러서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자신도 젊은 날 인생이 풀리지 않아 술도 많이 마시고 노름도 하며 살았는데, 아버지가 암에 걸려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도 자신을 바로잡아주려고 애쓰셨고, 그 덕분에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저도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후 하루는 술을 사러 가는데 손 형님이 저를 다급히 불렀습니다. “상우야, 빨리 와봐!” 갔더니 참외밭에 형님이 다니는 교회 목사님이 와 계셨습니다. 그날 ‘예수님이 아무것도 아닌 나 같은 사람을 위해 대신 죽어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사실이 참 좋았습니다. 또 교회에 가니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그때부터 농사일을 마치면, 교회로 갔습니다.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도 부르고 때론 청소도 함께 했습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난 어느 날, 문득 저를 돌아보니 몇 주째 술을 마시지 않고 있었습니다. 신기하게 그 후로도 술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겁니다(웃음).

삶의 밑바닥에서 그는 뒤로 물러날 곳이 없었다. 살기 위해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해보지 않은 일을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오늘이, 내일이 점점 달라져 갔다. 건강이 회복되고, 참외밭에 예쁜 참외가 맺히기 시작했다. 얼마 후에는 그의 변화를 지켜본 지인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해 함께할 가족이 생겼다.

거실 벽에 걸려 있는 가족사진만 봐도 얼마나 행복한지 느껴집니다.

아내를 처음 만나러 갈 때 가슴이 얼마나 뛰던지요. 결혼을 앞두고 이것저것 생각하다보니 제 나이가 벌써 53살이더라고요. 나이도 많고 모아둔 돈도 없는데, 저와 결혼하겠다는 아내가 신기했습니다. 전에는 명절이 되어도 찾아갈 곳이 없었는데, 이제는 매일 함께 참외밭으로 나갈 아내가 있고, “보고 싶다”는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아들도 생겼습니다. 얼마 전에도 타지에서 지내는 아들과 영상통화를 했는데 저에게 “아빠, 너무 마른 것 같아요.” 하고 걱정하더라고요. 그 한마디가 얼마나 고맙던지요.

제2의 인생,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으십니까?

제 삶을 돌아보면 진즉에 죽었어야 할 사람인데 이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감사합니다. 재미있는 건, 저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도 저를 보고 신기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행복하게 사는 것 자체가 소망이 된다고 합니다(하하).

살다 보면 과거의 저처럼 절망 속에서 외롭게 사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제 삶이 바뀐 이야기를 합니다. 찾아가서 겪고 있는 어려움을 듣고, 같이 고민하기도 하고, 참외 농사를 짓는 분이면 손 형님을 소개해주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의 삶이 조금이나마 달라지면 정말 신이 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참외 농사를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참외 농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처럼 소망 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으면, 손 형님이 저에게 손을 내밀어주었듯이 저도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주고 싶습니다.  

인터뷰를 하면서 “일하러 가기 싫은 날도 있나요?”라고 묻자, 이상우 씨가 이렇게 대답했다. “일하러 가기 싫은 날도 많아요(웃음). 특히 참외가 병들고 일이 잘 안될 때면 가기 싫지요. 그래도 일단 밭으로 가요. 신기하게, 제 마음 밑바닥에 사라지지 않는 소망이 생겼거든요. 문제가 있어도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고 같이 고민하다 보면 생각지 못한 방법을 찾고 기술이 발전되는 걸 봐요. 그래서 ‘오늘은 또 어떤 소망이 찾아올까?’라는 생각으로 집을 나섭니다.” 그는 자기 밖에서 흘러들어오는 새로운 것들에 귀를 기울이며 하루하루 새로워지고 있었다. 그가 오늘도 내일도 기쁜 마음으로 참외밭으로 나가는 이유였다.

고은비 기자  press49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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