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투머로우

상단여백
HOME People 피플
눈에 보이는 현실로 당신의 한계를 정하지 마세요35살에 메이저리거가 된 전설의 인물, 야구선수 짐 모리스
최지나 기자 | 승인 2021.09.06 10:05

사람들이 저를 만나면 꼭 물어보는 게 있습니다.

“그 영화 주인공 맞아요?”

“그런 일이 정말 있었나요?”

“실화인가요?”

이에 대해 답을 해드리겠습니다. 저는 2002년에 개봉한 영화 루키The Rookie의 실제 모델 짐 모리스라고 합니다. 그리고 영화에 나온 이야기는 다 실화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의 주제는 단 하나입니다. ‘너의 한계를 다른 사람이 정하게 두지 마라.’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짐 모리스 Jim Morris
그는 1964년 생이다.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미국 각지로 이사를 다녔으며, 그때마다 운동으로 친구를 사귀었다. 20대 초중반을 야구선수로 활동했으나 메이저리그에는 올라가지 못한 채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이후 고등학교 화학 선생님으로 재직하며 야구부 코치를 겸했는데, 제자들과 했던 약속으로 기적처럼 야구선수로 데뷔했다. 35세에 다시 야구선수가 된 그는 얼마 뒤 메이저리그에 입성했고, 그의 극적인 이야기는 디즈니사가 제작한 영화 <루키>로 개봉되었다. 미국에서 그는 ‘꿈’을 이룬 살아 있는 희망으로 불리며, 자신의 이야기를 책과 강연으로 전하는 동기부여 연설가로 활약하고 있다.

아프다는 걸 알고 있지만

저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고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나자마자 호흡 곤란 증상이 발생했고, 하루 만에 폐렴에 걸렸습니다.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저는 병원에서 죽었어야 했던 사람이랍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서 퇴원했습니다. 퇴원하던 날 의사 선생님이 제 어머니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드님은 앞으로 풀밭이나 야외에서 뛰어놀지 못할 겁니다. 혹시 뛰려고 해도, 절대로 뛰게 해선 안 됩니다.”

그런데 저는 운동을 좋아하는 학생이었습니다. 특히 야구를 좋아했죠. 어렸을 적 뛰어다니다가 혼났던 기억은 있습니다만, 그것이 저를 멈추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아프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가만히 있는 아이는 아니었습니다(하하).

아버지는 군인이셨습니다. 전출이 잦은 직업이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아버지를 따라 미국 곳곳으로 이사를 다녔습니다. 저는 새로운 학교에 갈 때마다 운동으로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운동장에서 땀을 흘리며 뛰다 보면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가까워지고, 그 환경에 빨리 적응해 갔습니다.

운동을 하면 할수록 야구 선수가 되고 싶은 꿈이 커졌습니다. 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친구가 있으나 없으나 공 던지는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에는 야구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축구팀에서 활동했습니다. 하루는 축구 코치가 제게 오시더니 “넌 야구로는 성공할 수 없다. 하루빨리 포기하고 축구에 올인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제가 18살이었습니다.

하지만 1년 뒤 저는 신인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에 지명돼 마이너리그에서 뛰는 야구 선수가 됐습니다.

영화 ‘루키The Rookie’의 한 장면. 지역 리그 결승전에 오른 짐 모리스(데니스 퀘이드 분)와 그의 제자들.

비록 선수생활을 포기했지만 제 선수 생활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신인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에 지명 받았기 때문에 저를 향한 기대는 컸습니다만, 잦은 부상으로 수술과 재활을 거듭했습니다. 그렇게 마이너리그에서 6년이란 시간을 보냈죠. 20대 중반 즈음엔 팔꿈치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했고, 더 이상 저를 불러주는 팀이 없어서 1989년을 마지막으로 야구 선수 생활을 접었습니다. 그 당시 담당 의사는 제게 더 이상 야구를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후엔 텍사스의 한 고등학교에서 야구부 코치를 겸한 화학 교사로 근무했습니다.

선수도 아니고 야구를 할 수도 없었지만 전 여전히 야구를 좋아했습니다. 코치를 시작하면서 한 가지 꿈을 품었는데요. ‘나는 야구 선수로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 학생들이 야구 선수로 성공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맡은 야구부는 실력이 최하위 팀이었습니다(하하). 매번 지는 게 익숙해진 학생들은 어떤 경기를 하든 ‘질 게 뻔한데 뭐하러 해’라는 마음으로 경기에 임했습니다. 그런 학생들을 보며 제가 처음 가르쳤던 건, 야구장 잔디를 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투덜거리던 학생들이 나중엔 야구장에 대한 애착과 책임감을 느끼더군요. 그리고 두 번째로 한 것은, 코치로서 명령하거나 욕설을 하기보다 학생들과 많이 대화를 했습니다. 그들이 억지로 하는 운동이 아니라 진심으로 야구를 좋아하길 바랐거든요. 이 두 가지를 저는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코치를 맡기 전까지 1년에 1승밖에 거두지 못했던 팀이 첫 번째 시즌에 10번의 승리를 거뒀습니다. 다음 시즌에는 63명의 학생이 야구부에 출석했습니다.

저는 자주 학생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너희에게 명령하고 한계를 정하는 삶을 살지 말고, 너희가 진짜 하고 싶은 일, 꿈을 찾아라.” 그때 한 학생이 “그럼 코치님 꿈은요?”라고 제게 묻더군요. 저는 “내 꿈은 너희가 졸업 한 후에도 야구장에서, 혹은 사회에서 성공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이 말하더군요. “우리는 코치님의 마음을 알고 있어요. 코치님은 야구를 계속 하고 싶어요.”라고요.

왼쪽) 2020년에 출간된 책 <드림메이커스>는 메이저리그 은퇴 후 20년 간의 삶을 다룬 자서전이다.
오른쪽) 짐 모리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2002년에 개봉된 영화 ‘루키 The Rookie’ 포스터.

이 시기의 제 모습을 조금 더 설명하자면, 당시 35살에, 체중은 118kg, 9번의 수술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제가 선수 시절엔 시속 88마일(141km)로 공을 던질 수 있었는데요. 삼각근의 85%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고 나서는 의사가 다시는 공을 던지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죠. 저는 학생들에게 “너희가 지역 대회에 나가서 우승하면 나도 입단할 곳을 알아보겠다.”라고 했고, 학생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며 “코치님이 우리를 가르치는 것을 보면 아직 야구를 사랑하는 걸 알 수 있어요. 우리가 우승하면 꼭 시도해보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대회에 나간 학생들이 매 경기 득점을 하고, 파죽지세로 연승을 거뒀습니다. 약속한 지 3개월 만에 지역 결선 대회에 출전했습니다. 그리고 우승을 했죠. 우승한 날, 학생들이 트로피를 들고 부모님과 포옹하고 서로를 끌어안으며 울고 웃었습니다. 그리고 제게 다가와 “이제 선생님 차례예요.”라고 말했습니다.

학생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트라이아웃(선수 선발 테스트)에 참가했습니다. 당시 제게는 8살, 4살, 1살의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테스트에 참가한 선수들이 대부분 18세에서 24세까지였기에, 사람들이 저를 정신 나간 사람 보듯 했습니다(하하). 아이 셋을 키우는 아저씨가 왔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그곳에 있는 누구도 저와 캐치볼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이 공을 던지고, 공을 치고 달리는 모습을 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땐 저도 ‘난 늙고 뚱뚱해. 분명 비웃음만 당할 거야’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모두의 차례가 끝나고, 스카우터가 제게 공을 건네며 “몸풀기로 몇 번 던질 건가요?”라고 묻더군요. 다른 사람들은 20번 정도 던지는데 저는 한 60번을 던졌습니다(하하). 트라이아웃이 끝났을 때, 전 창피한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자 운동장을 달려서 나왔습니다. 그리곤 아이들을 데리고 차에 올라탔는데, 한 스카우터가 저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무슨 일을 하고 지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처음 던진 공은 94마일(151km)이었고, 그 다음부터는 계속 98마일(157km)로 던졌다.” 그러고 나서 “당신은 지금까지 학생들에게 98마일로 공을 던지고 있었다. 당신 고소감이다.”라고 농담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약 당신에게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더라도 놀라지 마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정말 놀랐습니다. 제가 공을 너무 잘 던졌으니까요.

짐 모리스(왼쪽)가 텍사스주 알링턴 볼파크 구장에서 데니스 퀘이드(오른쪽)에게 야구공을 잡는 다양한 방법을 시연하고 있다. 데니스 퀘이드는 영화 ‘루키’에서 주인공 모리스를 연기했다. ⓒAP Photo:Fort Worth Star-Telegram, Richard W. Rodriguez

나조차도 나를 한계 안에 가뒀지만

이틀 뒤, 저는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공을 던지러 갔습니다. 스카우트 관계자들은 제가 무리 없이 공을 던질 수 있는지 확인하려 했습니다. 그때 저는 다시 98마일로 공을 던졌고, 그들은 제게 계약을 하자고 했습니다. 제가 계약할지 말지 고민하자, 함께 간 학생들이 “코치님, 코치님이 분명 저희에게 꿈이 있으면, 그 꿈을 쫓을 수 있다면 무조건 쫓으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하더군요. “야, 그거 거짓말이었어.”라고 했더니 그들이 웃고, 저도 웃기 시작했습니다(하하). 한바탕 웃고 난 뒤 저는 계약을 했고, 다시 야구 선수가 되었습니다.

텍사스에서 만난 학생들 덕분에 제 꿈은 두 번째 기회를 맞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혼자서 해보려고 수도 없이 노력했지만 기회는 35살에 찾아왔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게 학생들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저에게 “코치님은 늙었어요. 코치님은 뚱뚱해요. 코치님은 수술했잖아요. 할 수 없어요.”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 스스로도 ‘나는 할 수 없어. 불가능해’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저를 한계 속에 가두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들 덕분에 제 나이에도 할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마이너리그에서 메이저리그로

저는 템파베이 레이스 산하 더블 A팀에 입단했습니다. 더블 A팀에서 사흘을 보내고, 트리플 A팀에서 두 달을 보냈습니다. 저는 20대의 야구 선수였을 때보다 더 좋은 결과를 냈습니다. 그리고 1999년 9월 18일, 꿈에 그리던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올랐습니다. 텍사스 주의 알링턴 볼파크 구장에서 메이저리거로 첫 등판 했을 때, 정말 믿을 수 없었습니다. 단 한 번도 그렇게 큰 리그에서 뛸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제가 뛰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첫 타자를 스트라이크 아웃시켰습니다.

그날 마운드에서 내려와 펑펑 울었습니다. 오랫동안 가슴 속에 품었던 꿈이 이뤄진 날이었으니까요. 울고 있는 저에게 제자들이 찾아왔습니다. “코치님, 너무 자랑스러워요.”, “저희도 꼭 메이저리그 선수가 될게요.” 하더군요. 경기를 마치고 야구장을 나가서 보니 제 아이들은 물론 새로운 야구부 코치, 그리고 150명이 넘는 지인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9시간이나 걸리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경기를 보러 와주셨어요. 그렇게 2년을 메이저리그에서 뛰었습니다.

재발된 통증, 다시 야구를 그만뒀지만

2001년에 팔꿈치 통증이 재발하면서 공을 던지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옷을 갈아입는 것부터 중심을 잡고 서 있는 것조차도 할 수 없을 만큼 상태가 심각했죠. 선수로서 꽤 힘든 시간을 보냈고, 다시 은퇴했습니다. 통증이 심해 정밀 검사를 받았는데 ‘파킨슨병’이라고 했습니다. 그 병으로 지금까지 수술을 70회 받았습니다. 한때는 제대로 걸을 수 없어서 지팡이를 짚고 다녔죠. 그런데 현재 저는 재활에 성공했습니다. 매일 7마일(11km) 정도를 뛰며 꾸준히 건강을 회복하고 있고, 보시다시피 여러분 앞에서 강연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넌 안돼, 불가능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사방이 꽉 막힌 상자에 들어가죠. ‘난 안돼, 난 못해’ 하면서요. 여러분, 그 상자에서 나오세요. 나오기만 하면 삶의 방향이, 삶의 모양이 달라집니다.

저도 상자 안에 갇혀 있었던 때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로 정확히 판단했어요. 나이, 뚱뚱함, 다친 팔…, 당연히 안된다고 여겼습니다. 거기에다 전 부양해야 할 가족도 있었으니까요. 무모한 도전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텍사스의 고등학생들이 저를 상자에서 꺼내줬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누구도 저를 다시 가둘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지금 상자 안에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현실만으로 자신의 한계를 정해놓고 있진 않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꺼내드리겠습니다. 텍사스 학생들이 저에게 그랬던 것처럼요.   

최지나 기자  415362@naver.com

<저작권자 © 데일리투머로우,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지나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