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kg에 50원에 거래되는 폐지를 어르신들로부터 6배 가격인 300원에 매입하는 기업이 있다. 이 기업은 폐박스를 재단해 페이퍼 캔버스를 만들고, 재능 기부 작가들의 손길을 거쳐 ‘예술품’으로 재탄생한 제품을 약 3만 원에 판매한다. 수익금은 폐지 줍는 어르신들의 생계유지를 돕고 일자리를 만드는 데 사용한단다. 언젠가 멋지게 망하는 것이 목표라는 이곳. 사회적 기업 ‘러블리페이퍼’의 이야기이다. 남다른 방식의 운영 철학을 고수하는 러블리페이퍼의 기우진 대표를 만나보았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독자 분들에게 ‘러블리페이퍼’에 대해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러블리페이퍼Love Re: Paper는 사랑을 뜻하는 love와 재활용을 뜻하는 recycle의 ‘re’, 그리고 종이를 뜻하는 paper를 합친 말입니다. 어떤 분들은 ‘종이를 재활용해서 사랑을 전하는 곳’이라는 의미로 부르시고, 어떤 분들은 ‘종이를 사랑스럽게 재활용하는 곳’이라고 이야기하시지요. 저는 ‘폐지를 수집하는 어르신들과 함께 *업사이클링으로 환경을 지키는 사회적 기업’으로 소개하고 싶습니다.

사회적 기업으로 정식 인정을 받은 것은 올해로 3년째이지만, 사업 시작은 2013년부터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당시 저는 대안학교 교사였는데요, 호기심으로 ‘사회적 경제 아카데미’라는 프로그램을 이수했습니다. 그 수업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지역의 사회 문제를 찾고, 이를 비즈니스 모델로 해결하는 게 곧 사회적 기업이다’라고 할 수 있죠. 수업이 다 끝난 후 이를 실제로 시행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제 선택에 달린 것이었는데, 저도 모르게 주위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찾아보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다 폐지 줍는 어르신들을 보았고, 결혼 초에 생활비를 마련하려고 전공 서적이나 옷들을 고물상에 팔았던 날들이 떠올랐어요. 그리고 ‘폐자원으로 저 어르신들을 도울 수 있다면 의미 있는 일이겠다’라고 단순히 생각했어요. 처음엔 학교나 공공기관에서 받은 폐지를 팔아 그 수익금을 어르신들의 생계유지 지원비로 썼지요. 그러다 우연히 ‘페이퍼 캔버스’ 제작법에 대해 알게 되었고, 다섯 명의 대학생들과 함께 3개월짜리 단기 프로젝트로 지금 일을 시작하게 되었죠. 주변에서 도와주시는 분들이 점점 늘어나 프로젝트가 1년으로 연장되었고, 결국 지금의 러블리페이퍼로 자리 잡았어요. 저와 어르신 세 분 그리고 직원 네 사람, 모두 여덟 명이 사무실에서 상근하고 100여 명이 넘는 작가 분들이 함께 돕고 있어요.

지금은 생계 지원 외에도 인식 개선, 안전 및 여가 지원 등 여러 활동을 하는 것으로 아는데요, 활동 범위가 다양화된 것 같습니다.

러블리페이퍼 일을 시작하면서 어르신들을 더 가까이에서 보게 되었어요. 폐지를 어떻게 수집하시는지, 왜 하시는지, 어르신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관찰했죠. 그렇게 하면서 저희의 활동도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아요. 몇 년 전만 해도 ‘어르신들에게 물질적 지원을 최대한 많이 해드리자, 일자리를 드리자.’ 등 눈에 보이는 일을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하루는 사무실에 계신 어르신들에게 “러블리페이퍼랑 함께하면서 뭐가 가장 좋으세요?”라고 여쭈었더니, “여기 출근하는 게 꼭 소풍 가기 전날처럼 설레고 좋아.”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눔이 많아지고 물질적인 지원도 중요하지만 노인 분들이 당당하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폐지를 주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드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후 기업과 학교에서 “폐지 수집 노인 얼마나 아세요?”라는 강연을 통해 어르신들을 향한 동정의 인식을 공감의 인식으로 바꾸는 일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 자원 활용률이 2위인데요, 어르신들이 자원 순환의 약 20%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1인 당 연간 9톤의 폐지를 수집하시는데, 이를 나무로 환산하면 30년산 소나무 80그루에 해당하는 분량입니다. 폐지를 수집하는 어르신들을 안쓰럽게 바라봐야 하는 것이 아니라, 대단한 일을 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저희는 폐지 수집 노인을 ‘자원재생 활동가’라고 부릅니다.

최근에는 어르신들과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종종 하려고 합니다. 얼마 전에는 청년들이 사무실에 와서 어르신들을 젊은이들에게 유행하는 스타일의 모자, 옷, 신발로 변신시켜드리고 그 모습을 짧은 영상으로 만들어서 드렸어요. 어르신들이 무척 즐거워하시더라고요. 코로나 때문에 제한적이긴 하지만, 청년들과 만나는 시간들을 많이 만들려고 합니다. 어르신들의 일상이 재미있으면 좋겠어요.

1,2. 수거된 폐박스를 일정한 크기로 잘라 3겹으로 붙인 후, 캔버스 천을 덧대고 젯소를 발라 말리면 페이퍼 캔버스가 완성된다. 3. 재능기부 작가님을 통해 ‘예술품’으로 거듭난 폐박스(이지은,spring). 4. 누구나 손쉽게 페이퍼 캔버스를 만들어 볼 수 있는 ‘DIY키트’.
1,2. 수거된 폐박스를 일정한 크기로 잘라 3겹으로 붙인 후, 캔버스 천을 덧대고 젯소를 발라 말리면 페이퍼 캔버스가 완성된다. 3. 재능기부 작가님을 통해 ‘예술품’으로 거듭난 폐박스(이지은,spring). 4. 누구나 손쉽게 페이퍼 캔버스를 만들어 볼 수 있는 ‘DIY키트’.

어르신들과 함께 꾸려가는 회사 분위기는 어떤지 궁금하네요.

어르신들은 주로 1층에서 페이퍼 캔버스 작업을 하시고, 저는 위층에서 업무를 봅니다. 오랜 시간 어르신들을 만날 수는 없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함께 작업하고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처음에는 캔버스 만드는 법을 제가 알려드렸는데, 지금은 저보다 훨씬 잘 만드세요. 제게 타박을 주실 정도로요(하하).

어르신들이 맛있는 간식을 싸오시면 꼭 저를 불러주세요. 떡이며 빵이며 함께 먹으면서 살아오신 날들 이야기나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곤 합니다. 러블리페이퍼를 이끌어오면서 크고 작은 어려움을 만나기도 하고 실수할 때도 있는데, 어르신들이 살아오신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것 때문에 크게 잘못될 것도, 잘될 것도 없겠구나. 내가 너무 조급해하지 않아도 되는구나’를 느끼기도 합니다.

대표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7년이라는 시간 동안 적지 않은 어려움도 만났을 것 같습니다.

작은 회사다 보니 대표의 의견이 굉장히 크게 영향을 미쳐요. 제 판단에 따라 회사의 수익 모델이 바뀌는 거죠. 그래서 고민도 많았어요. 이전에 대안학교 교사와 러블리페이퍼 대표직을 겸하던 시절에는, 시간적 여유는 없고 일은 해내야 하니까 저 스스로도 쫓기고 직원들에게 좋은 소리를 못 해줄 때가 많았죠. 그럼에도 러블리페이퍼는 초창기부터 언론으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어요. 덕분에 홍보를 따로 하지 않아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주문을 받기도 했지요. 그렇게 쑥쑥 성장해 왔습니다.

그러다 지난해에는 코로나 여파로 수익이 4분의 1로 줄어들어서 재정난을 겪어야 했어요. 그때가 가장 어려운 시기였죠. 수익의 70%가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이나 학교에서 진행하는 업사이클 활동에서 발생했는데, 모든 행사가 취소되었으니까요. 어르신들에게 다른 일자리를 잡아드리고 근무 일수를 많이 줄여야만 했어요.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만큼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그만둘 수 없었어요. 어르신 몇 분은 돈 좀 못 받아도 좋으니 계속 일하겠다고 하시고, 아내도 계속 해보라고 지지해줬어요. 덕분에 8월 즈음에 비대면 활동 키트를 개발하면서 수입이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2018년 봄, 어느 좋은날 어르신들과 함께 가평으로 나들이를 떠났다.
2018년 봄, 어느 좋은날 어르신들과 함께 가평으로 나들이를 떠났다.

여러 굴곡을 겪으면서도 대표님이 러블리페이퍼를 놓을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조금 평범하지 않은 20대를 보냈어요. 주변에서 나를 지지해주지 않아도 상관하지 않고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했습니다. 20대 중반에 아내를 만나 결혼했는데, 그때도 부모님이나 장인어른은 생각하지 않고 ‘우리만 행복하면 되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친구를 따라 사업하러 중국으로 떠났는데 그곳에 살면서도 제 눈에는 저만 보였던 것 같아요. 철이 없었죠.

그후 아이가 태어나면서 많은 것들이 바뀌었어요. 한국에 돌아온 후 가족이 함께 살 집이, 생활비가 필요했어요. 처음에는 낮에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새벽까지 공부하며 제가 계획한 대로 길을 가려고 했어요. 그렇게 지내다 하루는 다리에 마비가 와서 응급실에 실려갔습니다. 그때 ‘이렇게 살 수는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뒤로는 생활비를 버는 데 더 집중했어요. 그 시기를 지나며 ‘앞으로도 내 삶이 내가 생각한 대로, 나를 중심으로 흐를 수만은 없구나. 내 삶에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과 언제나 같이 호흡하면서 살아가는 것이구나’라는 걸 알게 된 것 같아요. 그렇게 ‘나’만 있었던 공간에 아이와 가족이 들어왔고, 대안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제 공간에 학생들이 들어왔어요. 그리고 러블리페이퍼를 시작하면서부터 ‘우리’ 안에 어르신들도 들어오게 되었죠.

말씀하신 것처럼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었고, 건강에 문제가 생길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이렇게 사는 게 재미있고 즐거워요. 아내가 제 일을 지지해주는 이유도 그거 하나예요. 제가 즐거우니까요. 그리고 제가 정말 운이 좋았어요. 좋은 아내뿐 아니라 언제든 제 고민을 들어주는 분들, 필요할 때 기쁘게 손발이 되어준 사람들, 좋은 일에 물질을 아끼지 않겠다며 도와주신 분들, 그리고 저를 늘 아끼고 따라주시는 어르신들…. 정말 좋은 사람들과 만나 함께했기 때문에 이렇게 사는 게 가능한 것 같아요.

러블리페이퍼의 최종 목표는 망하는 것이라고 하셨지요.

네, 최근 한 대학교의 학생들에게 연락이 왔어요. 폐지 수집 어르신들의 문제 해결을 목표로 하는 소셜 벤처 사업을 진행하는데, 지도를 받고 싶다고요. 그래서 줌으로 미팅하고, 직접 만나서도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요. 앞으로 많은 청년들이 사회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저희보다 더 세련된 방법으로 해결 방법을 제시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러블리페이퍼가 더 이상 필요 없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기우진 대표의 이야기를 들으며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이 생각났다. 사회에서 소외된 존재로 살아가던 많은 어르신들을 보고 만나고 함께하고 그분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었을 때, 어르신들은 무엇을 느끼셨을까? 기우진 대표에게 어르신들은 어떤 존재고, 어르신들에게 기우진 대표는 어떤 존재가 되었을까.

기우진 대표, 그와 함께 일하는 100명이 넘는 작가단, 그리고 익명의 후원자들…. 그들 모두 어떤 모양으로 손을 내밀었든지 그때부터 그들의 마음속에서 어르신들은 ‘남’이 아닌 새로운 존재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길에서 만나면 그냥 반갑고, 인사를 건네고 싶은 분들로 말이다.

취재 고은비 기자   사진제공 러블리페이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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