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진심을 마주하다

‘며느리가 미우면 발뒤꿈치가 달걀 같다고 나무란다.’

‘오라는 외동딸은 오지도 않고 며느리만 온다.’

우리나라 속담에는 ‘며느리’와 관련된 것이 많은데, 대부분 서로 미워하는 관계의 대명사로 등장한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어도 며느리와 시어머니 관계는 여전히 어려운 관계 중 하나로 꼽힌다. 지금도 ‘고부’라는 단어 뒤에는 ‘갈등’이라는 단어가 자동적으로 따라다니지만, 10년간 한 지붕 아래에서 동고동락하며 ‘딸과 엄마’ 혹은 ‘친구’처럼 지낸다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있다. 그들의 일상은 어떨까? 며느리 김효미 씨의 시점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어머님과의 첫 만남

“너, 정말 다른 사람 같아. 표현도 잘하고, 편안해 보여.”

예전의 나를 아는 사람들을 만나면 내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11년 전, 나는 어딘가 모를 어두움과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사람이었다. 누구를 만나도 밝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신기했다. 내 성격이 싫었고, 사람들도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았다. 그런 내가 변하기 시작한 건 결혼하면서부터다.

학창 시절 내게 ‘가족’이라는 단어는 아프고 슬픈 단어였다. 부모님은 자주 다투셨고, 내가 고등학생 때 결국 이혼하셨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서울에서 엄마, 언니와 함께 셋이서 살았다. 나는 평생 고생하며 살아온 엄마를 어떻게든 지켜주고 싶었지만, 내가 26살이 되던 해에 엄마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엄마가 불쌍했다. 삶이, 가족이라는 이름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20대 다른 친구들은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릴 꿈에 부풀어있는 데에 반해 나는 결혼에 큰 기대가 없었다. 지금이야 어머님께 장난스럽게 말하지만, 그땐 설령 내가 결혼한다 해도 엄마 아빠처럼 서로 맞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을 무의식중에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인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결혼을 약속했다. 어머님과의 첫 만남은 시댁에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였다. 그땐 너무 긴장한 나머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소박한 집 분위기가 편안하게 다가왔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건 상견례 자리에서 어머님을 만났던 날이다. “우리 아들이 철이 좀 없습니다.” 어색함이 감도는 공기를 깨고 어머님이 처음 꺼내신 말이었다. 그러자 친정아버지도 “아이고 사돈어른, 우리 딸도 많이 부족합니다”라는 말로 답했다. 분위기가 부드러워졌고, 상견례를 잘 마칠 수 있었다. 그날, 만났던 찻집에서 밖으로 나가던 중에 어머님이 내게 다가와 허리를 감싸며 안아주셨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색해하며 엉거주춤했다. 그게 내가 처음 느낀 어머님의 따스함이었다.

3대가 함께 살게 된 이유

“너, 정말 착하구나. 대단하다.”

시부모님과 함께 산 지 올해로 10년이 되어간다. 3대가 별 탈 없이 함께 사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나에게 ‘대단하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로 내가 사는 모습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사는 게 빠듯해서 해외여행을 보내드리거나 제대로 된 선물 한번 사드리지 못하는 게 늘 마음에 걸리고, 아직까지도 아이들 돌보느라 고생하시는 시부모님께 죄송할 따름이다.

남편은 영상 관련 일을 하고 있다. 직업 특성상 결혼 직후에도 출장이 잦아 집에서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는데, 그럴 때면 어머님이 시댁에 와서 자고 가라고 권하셨다. 주말에 시댁으로 가면 어머님이 따뜻한 밥을 차려주셨고, 쉬게 해주셨다. 처음에는 쭈뼛쭈뼛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색했는데, 한 번 두 번 찾아가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편안하게 느껴졌다. 어머님은 나를 꼭 친정에 온 딸처럼 대해주셨다. 포근한 공기, 따스한 밥. 평소 가족에 대한 기대감이 전혀 없어서였을까, 나에겐 그 모든 것이 무척 크게 느껴졌다. ‘이렇게 살 수도 있는 거구나. 사랑을 받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감사했다.

그렇게 지내다 첫아이를 낳았을 때 산후조리 뒷바라지를 어머님이 직접 해주셨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레 한 지붕 아래서 같이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덧 10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흘렀다.

사랑 앞에 무장해제

“어쩜 어머님이랑 그렇게 사이가 좋아? 갈등이 없었어?”

종종 시어머님과 갈등이 있는 친구들이 나에게 전화를 한다. 그리고 어머님이랑 부딪힌 적이 한 번도 없느냐고 묻는다. 서로 다른 사람이 함께 사는데 어떻게 부딪힘이 없을 수 있을까? 어머님도 나도 감정이 앞서서 거칠게 툭툭 말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나도 어머님이 화가 나서 한 말이며 나중에 미안해하실 거라는 걸 알고, 어머님도 내가 후회할 거라는 걸 알기에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과장하지 않고, 나의 어떤 마음도 모두 털어놓을 수 있는 분이 우리 어머님이다. 내 마음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가까워질 수 있었던 건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퇴근 후 집에 도착하면 어머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나의 일상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머님이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들었고, 나도 자연스레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내게 어떤 아픔이 있었는지 이야기하게 되었다.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지 않던 나였는데, 시간이 갈수록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밀려들어오는 어머님의 사랑에 무장해제를 당한 것 같았다.

어머님은 당신의 부끄러운 실수담도 가리지 않고 해주셨고, 그러면서 나의 허물이나 부족함도 괜찮다며 끌어안아 주셨다. 나는 늘 나의 예민한 성격을 콤플렉스로 여기며 다른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진 않을까 고민했는데, 어머님 앞에선 부끄럽지 않았다. 부족한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어머님을 만나 함께 살면서 태어나 처음으로 자유롭게, 마음으로 소통하는 법을 배웠다. 처음으로 마음이 흐른다는 것을 느꼈다. 그 덕분에 회사나 사회 어느 곳에 가서도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고, 후배를 가르칠 때에도 어머님이 나를 대하듯 좀 더 넓은 품으로 이해해주려는 내 모습을 보곤 한다.

사진 촬영을 하던 날, 두 사람의 인터뷰 소식을 듣고 온 가족이 함께 나왔다. 덕분에 봄나들이를 한 날.
사진 촬영을 하던 날, 두 사람의 인터뷰 소식을 듣고 온 가족이 함께 나왔다. 덕분에 봄나들이를 한 날.

내 생애 최고의 행운 

얼마 전, 첫째 아이가 다니는 학원 선생님을 만났다. 아이가 어른들을 만나도 얼지 않고 밝게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눈다며 칭찬을 해주셨다. 아이들이 매일 만나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할머니 할아버지다 보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아이는 소심한 나의 성격을 닮아서 걱정을 했는데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덕에 ‘내 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발랄해졌다.

시어머니 이영래 씨와 눈이 마주치자 김효미 씨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어떤 생각에 울컥했는지 묻자, 쑥쓰러운 듯 “잘 모르겠어요”라고 답했다.
시어머니 이영래 씨와 눈이 마주치자 김효미 씨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어떤 생각에 울컥했는지 묻자, 쑥쓰러운 듯 “잘 모르겠어요”라고 답했다.

어른들과 함께 살며 아이들뿐 아니라 나도 많은 것을 배운다. 쉽고 간편한 걸 좋아하는 나와 달리, 어머님은 음식 하나를 만들어도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만드신다.

특히,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정성을 다해 아이를 돌보아주셨다. 첫아이를 낳고 3개월 뒤 복직해야 하는 내게 어머님이 아이를 위해 모유 수유를 권하신 적이 있다. 처음에는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어머님이 당신 몸이 지칠 때에도 마음을 다 쏟아 아이들을 돌보시는 모습을 보며 ‘부모는 때론 자식을 위해 이렇게 희생하기도 하는구나’라는 걸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

아이들이 한 해 두 해 커가고 있다. 그럴수록 나는 어머님의 지혜에 귀를 기울인다. 나는 그렇게 어머님의 발자취를 따라 아이를 키우고 있다. 나는 오늘도 어른들과 함께 지내며, 가족의 새로운 의미를 느끼면서 산다. 이 지면을 빌어, 어머님 못지않게 나를 사랑해주시는 아버님, 그리고 어머님을 꼭 닮아 나에게 한없이 따뜻한 남편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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