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투머로우

상단여백
HOME Special Issue
마음껏 소리 내 웃을 수 있는 이유는 아빠가 있기 때문입니다가족, 진심을 마주하다
최지나 기자 | 승인 2021.05.21 19:04

“엄마 재혼할 거야.”

“그래, 엄마가 좋으면 해.”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엄마는 재혼할 거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나와 언니, 그리고 여동생은 모두 엄마의 재혼을 찬성했지만, 오랫동안 여자끼리만 살아온 집에 들어오신 ‘아빠’는 편한 존재는 아니었다.

아빠는 퇴근 후 우리에게 다가와 “이 영화 재밌다는데 같이 볼래?” 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길 원하셨다. “이 치킨 맛있다고 하길래 사 왔어. 같이 먹자”라며 맛있는 음식들을 잔뜩 사 오기도 하셨다. 그리고 필요한 것이 있는지 먼저 물어봐 주시고, 갖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모자람 없이 채워 주셨다. 아빠는 항상 먼저 다가와 주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에게 너무나 잘해주시는 아빠가 나는 너무 불편했다. 그냥 조용히 TV를 보고 싶은데 먼저 말을 거는 아빠가, 이것저것 관심을 두고 물어보는 아빠가 어색하고 귀찮았다.

아빠와 불편한 한집살이가 싫었던 나는 빨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서 독립하고 싶었다. 그래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대학에 원서를 냈는데, 그때도 아빠는 “주혜야, 이 과는 어때? 집에서 가까운 이 대학은 어떠니? 주혜가 대학을 가도 가족과 함께 지내면 좋겠어”라고 하며 내가 갈 대학을 일일이 찾아봐 주고 조언해 주셨다. 아빠가 그렇게 말씀하실 때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하며 답을 피했지만, 내가 대학에 붙을 때까지 아빠는 내 옆에서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고, 결국 아빠의 바람대로 집에서 통학할 수 있는 대학교에 합격해 입학했다.

대학보단 ‘독립’에 더 관심이 많았던 나는 대학에 가서도 ‘독립’을 향한 바람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해외 봉사 프로그램을 알게 됐고, 1년이라도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집보다 환경이 훨씬 열악하고 불편한(?) 아프리카 가나로 해외 봉사를 떠났다.

가나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덥고 음식도 입에 맞지 않았다. 가장 맞지 않았던 건 바로 가나 사람들이었다. 해외 봉사 프로그램 중에는 가나 학생들을 교육하는 아카데미 프로그램이 많았는데, 아카데미를 운영하면서 나는 항상 투덜댔다.

‘아카데미는 2시에 시작인데 왜 아무도 안 오는 거야?’

‘이럴 줄 알았어.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잖아!’

매번 시간을 안 지키는 학생들을 보면서 나는 점점 지쳐서 아카데미를 할 수 없겠다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배가 아파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을 때면 어김없이 가나 친구들이 나에게 먹을 것을 권했다.

“주혜야, 네가 안 먹어서 배가 아픈 거야. 이것 좀 먹어봐.”

“안 먹어서 배가 아프다고? 아니야. 나는 한국에선 배가 아프면 안 먹었어. 그러면 나아졌어.”

“아니야. 네가 아프리카에 와서 음식을 잘 못 먹어서 아픈 거야. 이거 먹으면 배가 좀 괜찮아질 거야.”

“나 정말 안 먹어도 괜찮은데….”

내가 조금이라도 아프면 어김없이 음식을 잔뜩 싸 들고 오는 가나 친구들,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과 반대의 의견을 제시하는 가나 친구들이 나는 너무 힘들었다.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나를 그냥 가만히 나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멈추질 않았다.

그런 생각이 머리에 가득하던 어느 날, 나는 심하게 아파 며칠을 누워 있다가 일어났다. 눈을 떠보니 내 주변에는 나를 간호하느라 곁에 있다가 잠든 가나 친구와 죽, 약들이 놓여 있었다. 언제나 내 기준에 맞지 않는다며 밀어내던 친구였는데 나를 보살피느라 고생하는 모습을 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가나 사람들은 언제나 먼저 내게 다가와 밥은 잘 먹었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오늘 기분은 어떤지 물어보았다. 나는 그런 관심이 부담스럽고 불편하다고만 생각했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주는 그들은 진심으로 나를 생각하고 걱정해 주었다. 아프고 나서야 비로소 가나 사람들이 내게 주는 사랑과 관심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난 사람이 ‘아빠’였다. 나는 “식사하셨어요?”라는 말 한마디도 아빠에게 먼저 건넨 적이 없었다. 언제나 아빠가 먼저 “주혜야, 밥 먹었어?”라고 물어봐 주셨기 때문이다. ‘아빠랑 같이 사니까 너무 어색하고 불편하다’는 생각에, 나를 사랑하는 아빠의 마음을 수없이 외면해 왔다.

생각해 보면, 아빠 덕분에 우리 집은 웃음을 되찾았다. 내가 7살 때 엄마는 이혼하셨다. 그 후 엄마는 세 자매를 키우기 위해 새벽에는 우유 배달을 나가셨고, 낮에는 도시락 배달을 하셨다. 하루 종일 바쁘게 일하고 집으로 돌아오시면 몸이 고단하여 딸들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아빠가 오신 후로는 엄마의 삶이 전보다 훨씬 편안해졌다. 아빠가 퇴근하시면 온 가족이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아빠가 보여 주시는 영화를 보며 마음껏 소리 내어 웃기도 했다.

아빠를 향한 감사한 마음은 커졌지만, 이제 와서 감사하다고 표현하기가 어색했다.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만 하는 내 모습을 보고 가나 친구들이 “솔직하게 이야기해. 네가 느끼는 걸 표현하면 아버지가 분명 기뻐하실 거야.”라고 했다. 그 말에 용기를 내어 아빠에게 전화를 드렸다. “아빠, 아빠 덕분에 제가 대학도 다닐 수 있고, 멀리 가나에도 올 수 있었어요. 항상 받기만 하고 한 번도 표현한 적이 없었는데…, 아빠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내 진심을 전했다.

신기하게도, 아빠에게 이야기만 했을 뿐인데 ‘불편하다’는 감정들이 다 사라졌다. 전에는 ‘감사하긴 한데 이런 건 좀 불편하다’, ‘잘 챙겨주긴 하는데 왜 이렇게까지 하시지?’ 하며 의문도 생기고, 혼자 그 감정을 해결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이야기하는 순간 아빠를 향한 감사와 사랑만 남았다.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아빠와 함께 사는 이 집이 너무 편안하고 따뜻하다. 1년 전까지만 해도 ‘독립하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내가 지금은 “우리 가족이랑 같이 사니까 너무 좋다”는 말을 달고 산다. 언제든지 엄마가 해주신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고, 고민이 생기면 무엇이든 의논할 수 있는 아빠가 너무 좋다. 이런 가족과 함께 사는 난, 정말 복 받은 아이다.

글과 사진  강주혜

최지나 기자  415362@naver.com

<저작권자 © 데일리투머로우,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지나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