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소년원 성우제 원장

오봉산 자락에 자리한 고봉중.고등학교를 찾아갔다. 넓은 운동장을 걸어 들어가면서 주변 풍광이 너무나 아름다워 잠시 넋을 놓고 둘러보았다. 사람이 자유롭게 들어갈 수도 없고 나올 수도 없는 곳이지만, 햇볕과 바람은 마음껏 드나들며 꽃을 피우고 라일락 향기를 사방에 날려주고 있었다. 건물 2층 원장실로 올라가니 바깥 풍경처럼 밝은 얼굴로 성우제 원장이 일행을 맞아주었다. 인사가 오가고 명함을 건네고 자리에 앉자, 마치 오래전부터 잘 알고 지낸 지인처럼 금방 이야기의 물꼬가 터졌다.

Q. 입구에 고봉중고등학교라고 적힌 간판을 보았습니다. 공식 명칭입니까?

법률적으로는 서울소년원인데, 복수 명칭을 쓰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소년원생들은 일반 학생들과 동일한 학교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90년도부터 초·중등 교육법에 의해 정규 학교 과정이 실시되고 있습니다. 대외적으로 학교 명칭을 사용해 원생들이 학생의 대우를 받도록 하고 있지요.

Q. 학생들을 위해 이곳에서는 어떤 일을 합니까?

소년원은 흔히 비행청소년이라고 하는 아이들이 생활하는 곳입니다. 범죄를 저지른 청소년들에 대한 법적 처분은 크게 형사 처분과 보호 처분으로 나뉩니다. 형사 처분을 받으면 같은 나이라도 소년 교도소에 갑니다. 보호 처분 중에서도 소년원 송치 처분을 받은 아이들을 여기서 교육하고 관리합니다. 보호 처분은 국가가 아이들의 보호자 역할을 해주며, 환경 개선과 아이들의 발전적 잠재력을 키워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를 통해 이전에 익숙해져 있던 잘못된 습관들을 개선해갑니다.

보호 처분을 받은 아이들은 비록 범죄를 저질렀지만, 국가에서 용서해주고 기회를 준 것입니다. 장래에 이것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법에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 기회를 살릴 수 있도록 교육과정이 매우 중요합니다.

정규 학교처럼 교과교육 과정, 직업훈련, 인성교육도 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하기 어렵지만, 외부에서 체험활동도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사회에서 해보지 못했던 것을 실질적으로 체험해 볼 수 있습니다. 자유가 없을 뿐이지, 이곳은 다양한 교육을 받을 여건이 잘 갖춰져 있어 좋습니다.

Q. 원생들을 보면서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입니까?

현실적으로 와 닿는 느낌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아이들의 애정 결핍이 매우 심각한 수준입니다. 둘째로는, 아이들이 겪은 저마다의 과정에서 정서적상처가 너무 컸다는 사실입니다. 심리적 결핍과 상처를 보듬어주기 위해 여러 노력과 정책적인 지원을 하려고 합니다.

Q. 기억에 남는 학생이 있으신가요?

많죠. 어떤 학생을 특정하기는 어렵네요. 제가 대전 소년원 원장으로 있을 때 정신적으로 문제가 심한 아이들은 특별한 치료를 받았습니다. 2009년으로 기억하는데요, 그때 열 명 정도의 여학생들이 그 치료를 받고 있었어요. 저는 그 아이들을 보면서 몹시 안타까웠습니다. 한창 뛰어놀 나이의 발랄한 아이들이 약을 먹어야 정상 생활이 가능하다는 게 속이 상했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들 없이 제가 열 명의 여학생들을 넓은 야영장으로 가끔씩 데리고 갔습니다. 거기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초코파이도 주고, 물놀이도 하게 했는데, 아이들이 너무 좋아했습니다. 갈 때마다 아이들끼리 약간의 경쟁을 하는 게 느껴졌어요. 나와 더 가깝다는 걸 친구들에게 과시하려는 행동에서 애정 결핍이 얼마나 심한지 한눈에 알 수 있었어요. 신기한 것은, 그 시간만큼은 자기 속내를 다 이야기합니다. 내가 ‘너희들 같은 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학생들이 “우리 같은 딸 있으면 원장님이 속 썩어서 안 돼요” 하며 편안하게 말했어요. 자기 때문에 부모님이 속앓이 하시는 걸 그들도 알아요.

제가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들을 만났는데요, 아이들이 그때를 기다리고, 저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챙겨가고, 그러면서 그들이 변화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중에 한 여학생은 계속 편지를 보내왔고, 사회에 나와서는 제가 그 학생에게 어느 대학 교수님을 멘토로 연결해 주었어요. 그 학생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지금은 잘 살고 있습니다. 결혼을 상상도 못하던 학생이었는데…. 그런 아이들이 다들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이야기를 들으면 감격스럽습니다.

경기도 오봉산 자락에 위치한 서울소년원 건물과 넓은 운동장. 성우제 원장은 원생들이 여기에서 치유의 시간을 가지면서 새로운 미래를 꿈꾸도록 돕는다.
경기도 오봉산 자락에 위치한 서울소년원 건물과 넓은 운동장. 성우제 원장은 원생들이 여기에서 치유의 시간을 가지면서 새로운 미래를 꿈꾸도록 돕는다.

Q. 원장님께서 이 일을 하면서 느낀 보람은 크겠지요?

저는 1996년에 행정고시에 합격해, 바로 이 분야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벌써 25년이 되었네요. 이 일을 하면서, 한 인간에 대한 새로운 기회, 즉 구원救援을 주는 일에 내가 조력할 수 있다는 점에 늘 감사하며 지냅니다. 그리고 관리자로서 시야를 넓혀 정책적인 부분에 적용시킬 수 있는 점에서도 보람을 느낍니다.

그는 올해 2월에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학위 논문 제목은 ‘비행청소년의 가정요인이 재범에 미치는 영향 연구’였다. 비행청소년들의 가족 관계를 회복하고 가정 기능을 강화하여 재범을 방지할 수 있는 실효적 방안을 제시하고자, 꾸준히 자료를 찾고 깊이 생각한 것들을 모아 집필한 논문이었다.

Q. 비행청소년 연구를 하셨는데, 다시 범죄에 빠지는 가장 큰 요인은 무엇이었나요?

재범을 하는 가장 큰 요인은 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정에서 충분한 애정을 받지 못하는 과정에서 정서적 상처가 오랫동안 방치되었고, 억눌린 것을 해소하지 못해 비정상적으로 발산된 행동이 청소년 비행입니다. 그 근원은 가족입니다.

Q. 비행청소년에게 애정을 베풀었을 때 그대로 받아들이는 아이가 있고, 받아들이지 못해서 재범하는 아이도 있을 텐데요. 다시 어두움을 선택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요.

사람들은 모두 나름의 기대치가 있습니다. ‘소년원에서 이런 교육을 받고 나가면 다 변해야 해. 재범하지 않아야 해’라는 기대를 하지요. 외부에서도 우리를 바라볼 때 소년원이 그 정도의 역할은 해야 한다는 기대치가 작용합니다. 저희도 아이들에게 그런 기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아이들이 교육을 받고 나가면, 부모가 변해 있나요? 가정환경이 달라져 있나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은 변하지 않은 과거의 환경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어쩌면 이전보다 더 악화된 환경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아이가 소년원 출신이라는 사실을, 법적 불이익이 없는데도 평생의 낙인으로 생각합니다. 아이들도 여기 왔다간 것이 잘못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게 재범으로 이끄는 한계입니다.

Q. 아이들이 이전 상태로 돌아가지 않게 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가족 관계를 회복하고, 가정 기능을 강화할 수 있도록 부모의 마인드가 바뀌어야 합니다. 많은 부모님들은 여기서 아이가 변화한 것을 기특하게 여기고 우리에게 고마워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부모도 있습니다. ‘우리 아이는 거기 갈 아이가 아닌데 갔다.’ ‘잘못이 그렇게 크지 않은데 갔다.’ ‘거기 가서 더 나빠져서 왔다.’ 이런 생각을 하는 부모도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부모는 아이가 집으로 안 왔으면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른 기관으로 아이를 보내고 싶다는 부모도 있고, 그런 매정한 부모조차 없는 무연고無緣故 아이도 있습니다. 여기서 나가는 아이들의 90퍼센트 이상이 보호관찰을 받아요. 보호관찰관이 또 다른 지도를 하고, 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합니다. 소년원 선생님들도 6개월 동안은 추수 지도합니다. 그렇지만 보호자와 환경을 개선시키기에 한계가 있습니다.

Q. 가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원장님은 어떤 가정에서 자라셨나요?

저는 아주 시골에서 태어났습니다. 3남 3녀 중에 셋째입니다. 중학교 3학년부터 학업 때문에 객지 생활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부모님이나 가족은 그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부모님은 저를 늘 애처롭게 생각하셨습니다. 제가 집에 가면 챙겨주려고 하셨습니다. 제가 공부를 못 하진 않아서 부모님의 기대도 크셨습니다. 물질적인 것 말고, 마음으로 제게 와 닿는 사랑이 늘 크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매우 완고하신 분이고, 어떤 표현도 직접 하시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아버지의 믿음과 기대가 제가 어려울 때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게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Q.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느낀 계기가 있었습니까?

제가 아주 어렸을 때, 무릎이 안 좋아서 시골 작은 병원에 입원해 있었어요.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개구쟁이였어요. 아버지가 하루 종일 일하고 저녁엔 병원으로 오세요. 이십 리를 걸어서요. 할머니가 곁에서 병간호를 해주고 계시는데도, 아버지는 계속 저하고 같이 불편한 병실에서 주무셨어요. 아버지는 바쁘시니까 기대도 안 하고 있었는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셨어요. 시골에 일이 정말 많거든요…. 병원에 오셔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해주시고 새벽에 일찍 일하러 가셨어요. 늘 무뚝뚝하셨지만 그때 일이 제게 큰 힘이 되었어요. 한 달 동안 병원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면서 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Q. 슬하에 아들 둘을 키울 때 어떤 원칙으로 자녀교육을 하셨는지요?

저는 자녀 얘기가 나오면 미안한 마음부터 듭니다. 제가 공무원이다 보니 지방 생활을 많이 했습니다. 주말마다 집에 와서 아이들을 보니까 야단치기보다는 잘해주려고 했어요. 사실 그래도 애정 표현이 많이 부족했죠.

요즘은 다 커서 대학생이 되고 군대에 갔는데, 아들들이 나한테 고맙다고 합니다. 왜 고마우냐면 아빠가 아들을 무던히 믿고 기다려줘서 그렇답니다. 내가 아이들에게 신뢰를 줬고, 기다려준 거죠. 그게 아이들한테 고마움으로 남은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일관성을 가지고,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들을 지켜봐 준 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Q. 원장님은 모든 아이들을 돌보는 운명인 것 같습니다. 원장님이 서울소년원에 부임하시고 한 달 만에 분위기가 많이 바뀌고 아이들도 밝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렸습니다만, 이 아이들은 애정 결핍으로 인한 정서적 상처가 심한 편입니다. 그래서 처벌의 대상이 아니고 치유의 대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곳 아이들의 30퍼센트가 정신적 치료를 받았거나 약을 복용한 적이 있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정서적 상처를 치유해주는 것이 여기서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직원들에게 세 가지를 강조합니다. 정성, 배려, 소통인데요. 농부가 농사를 지을 때, 씨앗을 심고 싹이 트고 줄기가 나오고 잎이 나오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정성을 들여야 합니까? 하물며 사람을 변화시키는 과정에 얼마나 많은 정성이 드는지는 말이 필요 없겠지요. 상처가 깊고 힘들었을 아이들은 경험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을 경험하고 여기까지 왔어요. 본인 잘못도 있겠지만 어른들의 잘못이 더 큽니다.

우리가 최대한의 정성을 기울여야 하고 소통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조사 받고 심문 받으면서 모든 과정이 의례적인 것을 알아요. 진정성 있게 얘기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알고, 그에 대한 상처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소통하며 배려해야 해요. 원생들을 위해 최대한 배려해준다는 게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동안 못 받은 사랑을 받고, 존중받는다는 인식도 키워서 아이들이 이곳을 나갔으면 좋겠어요.

Q. 가족 해체가 큰 문제인데, 이혼을 고려 중인 부부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십니까?

책임감입니다. 부모로서, 남편과 아내로서 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들은 어렵게 살았지만 자식에 대한 책임감이 있었습니다. 자식에 대한 책임을 다하려고 무지막지한 고생을 감당하셨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내가 어머니 배 안에 있을 때 군대를 가셨습니다. 5년 간 복무하셨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그 당시에 아버지가 다리병신이 되더라도 살아서만 돌아오면 평생을 먹여 살리겠다고 생각하셨답니다. 아버지 군복무하실 때 시어머님 모시고 살면서 어머니는 세 마지기 농사도 지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고, 살아서만 와달라는 마음을 지우지 않으셨어요. 그게 가족의 책임과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Q. 요즘은 문제 있는 가정이 많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비행청소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제가 정말 간곡하게 부탁하고 싶은 말은 욕구를 너무 빠르게 충족하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욕구를 빠르게 충족하는 것에 길들여지면 감정 조절이 안 되고, 분노 조절도 안 됩니다. 특히 인스턴트 식품과 휴대폰은 우리 삶에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즉석 음식과 기계는 즉각적인 반응을 가능케 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인간의 일들은 그렇지 않아요. 반응이 없더라도 무던히 기다리고, 지켜봐야 합니다.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먹는 방식부터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정에서의 식사는 너무 중요합니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된장찌개를 끓이려고 재료를 다듬고 요리를 하는 동안, 아이들은 배가 고프지만 냄새를 맡으며 기다립니다. 요리가 완성되고 어머니가 부르면 그때 쏜살같이 가서 먹고 가족들과 이야기하는 그것부터 삶에서 실천되어야 해요.

제가 이것을 해본 적이 있어요. 서울 동부 보호관찰소에서 근무할 때입니다. 그 옆에 농수산물 가락시장이 있었습니다. 도매 중매인 회장님이 보호관찰 위원 활동을 하셨는데, 그분께 제가 부탁들 드렸습니다. 보호관찰 대상자 스무 명을 선정해서 매주 양질의 식자재를 잘 포장해서 보내줬으면 좋겠다고요. 그분은 아주 마음을 써서 고기, 쌀, 반찬을 만들 수 있는 야채 등으로 ‘행복 밥상’이라는 상자까지 만들어 담아서 보호관찰 대상자 가정에 직접 방문해서 주었습니다. 라면 끓여 먹지 말고 밥해서, 요리해서, 고기도 같이 구워먹도록 했습니다. 반응이 매우 좋았습니다.

그때 ‘행복 밥상’을 받은 어느 가정의 부모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동안 너무 감사합니다. 이젠 저희보다 더 어려운 가정을 도와주세요. 밥을 해먹으면서 가족이 행복했습니다.” 밥상머리 교육이라는 게 왜 있겠습니까? 요즘 가족끼리 음식을 만들어 먹는 가정이 정말 드뭅니다. 밥 먹는 시간이 다 달라요. 우리는 시골에서 아홉 식구가 같이 살아도 항상 같은 시간에 먹으며 컸습니다. 그게 큰 교육이 됩니다. 우리는 지금 먹는 방법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Q. 매우 공감 가는 이야기입니다. 원장님의 앞으로 계획이나 하시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이제 정년이 몇 년 남지 않았습니다. 남은 기간 동안 공직생활에 대해 정리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청소년들을 위해 일해 왔으니까 앞으로도 그들에게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을 계속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난 번 투머로우를 읽는 원생들의 설문조사 결과를 보았는데요.

아이들의 답변이 매우 고무적이었습니다. 잡지 내용에서 힐링을 받고, 마음이 편해져서 싸움을 안 하게 되었다든지, 자기도 봉사활동을 하고 싶고, 먹는 음식도 함부로 버리지 않게 되었다는 다양한 소감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투머로우를 기다리는 것이 진심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유익한 잡지를 발행하는 투머로우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를 전합니다.

취재진이 인터뷰 사진을 촬영하는 동안 원생들은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다. 너무나 해맑고 자유로운 10대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성우제 원장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생각하는 분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취재 이미선 자유기고가  사진 송명자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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