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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사랑의 빚을 갚으러 갔습니다
최지나 기자 | 승인 2021.05.11 02:09

통역 장교로 군 복무를 마친 이은성 씨는 취업 대신, 아프리카 케냐로 목적지를 정했다. 해외봉사를 했던 케냐로 다시 돌아가 당시 받았던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해외봉사 다녀온 지 8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이은성 씨에게 그 빚의 기억은 조금도 바래지 않았다. 다소 무모해 보이는 케냐로 가는 길, 그는 자신의 바람대로 그 빚을 다 갚았을까?

이은성
2007년 케냐 굿뉴스코 봉사단으로 활동한 그는 이듬해 한국에 돌아와서도 국제NGO 단체인 국제청소년연합 총학생회 회장을 하면서 다양한 국제행사 및 봉사활동을 이어갔다. 경희대학교 국제학과 졸업 후, 통역 장교로 군 생활을 했고 케냐 대학교로 유학을 가서 금융투자 석사를 취득했다. 그리고 5년 간 케냐에서 적정 기술 사업을 하였다. 최근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현대경제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Q. 서른 살에 제대하셨어요. 취업을 놓고 조급해진 마음도 있었을 것 같은데, 케냐 행을 선택하는 데에 고민은 없었나요?

케냐로 해외봉사를 다녀오고 나서 제 머릿속에는 ‘꼭 다시 케냐로 돌아갈 거야’라는 꿈이 항상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역하자마자 취업보다는 다시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죠. 그때 제 눈에 들어온 것이 교육부 국립국제교육원에서 운영하는 국비유학생 사업이었습니다. 국비유학생 석·박사 과정에 지원했고, 지역 연구 분야에서 선발되어 케냐로 다시 갈 수 있는 길을 찾았습니다. 학교를 1년 후부터 다닌다는 선택을 할 수 있어서, 한국에서 직장을 다니며 유학 준비를 하려고 했죠.

그런데 우연히 케냐에서 사업을 하신 분을 만났어요. 그분은 대화 중에 케냐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과 인식을 이야기했습니다. 케냐는 제가 다시 돌아가고 싶을 만큼 좋은 추억이 많은 그리운 곳인데, 그분에게 그곳이 고통스러운 곳이었습니다. 그게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정말 좋은 곳인데 왜 이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실까? 이분에게 그곳에 대한 관점을 다시 심어줄 순 없을까?’ 생각했고, 저도 모르게 “제가 그 사업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석사 과정을 시작하기 전에 케냐로 떠났습니다.

1. 케냐 정부기관 세미나에서 한국농업기술 현지적용사례 및 자연순환농법 발표하고 있는 이은성 씨.
2. 미생물 비료 제조시설에서 제품을 포장하고 있는 현지인들의 모습.

Q. 누군가의 인식을 바꿔주기 위해 사업을 도왔다는 것이 평범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 사업 문제는 잘 해결됐나요?

그곳에서 압류당한 공장 장비와 원료를 다시 찾고, 소송이 얽혀 있는 문제와 회계적인 문제들을 하나하나 풀어갔습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케냐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그들의 도움도 받다 보니, 투자를 받고 사업도 어느새 정상화되면서 활기를 찾았습니다. 이제 케냐는 그분에게 새로운 ‘기회의 땅’이 되었습니다.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사업 상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저도 많이 배웠고요. 그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겨서 그분과 함께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Q. 어떤 사업이었나요?

유기농 비료 사업이었습니다. 제가 해외봉사를 마치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올 때, ‘케냐 사람들에게 직업을 선물해 주고 싶다’라는 꿈을 가지고 왔습니다. 케냐 사람들은 대개 농사를 지으며 사는데, 대부분 자급자족하는 정도로 농사를 짓습니다. 그래서 먹고사는 게 팍팍합니다. 게다가 농업이 발전되지 않아 기후와 토양에만 의지하다 보니 수확량도 많지 않죠. 어렵게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을 갖게 해준다면 자녀들 교육도 하고, 생활도 어느 정도 꾸려갈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 환경을 알기에 ‘유기농 비료 사업이 케냐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겠다’고 확신했고, 미생물 비료공장을 세워 현지 사람들을 고용하고, 전국을 돌며 농부들을 만났습니다. 케냐에서는 퇴비를 사용하여 농사짓는 게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 미생물과 퇴비를 사용하여 친환경으로 농사짓는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비료를 유통하기 위해서 이곳저곳 많이 뛰어다녔습니다. 노력 끝에 나중에는 정부 및 화훼·농산물 수출업체들과 협력하여 친환경 농산물을 수출하는 프로젝트도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2007년 케냐 현지 학교에서의 교육캠프 뒤, 참석한 학생들과 함께.

Q. 그곳에서 얼마나 바쁘게 지냈을지 상상이 됩니다. 원래는 케냐에 유학 가려고 하지 않았나요?  석사 과정은 마치셨나요?

그럼요. 제가 금융투자를 전공했는데, 사업에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사업을 하기 위해선 자본이 어떻게 융통되는지부터 알아야 하는데, 기본적인 지식부터 차근차근 배울 수 있었습니다. 또한 케냐에서 공부하다 보니, 현지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금융 프로그램, 비료 사업과 관련된 정부 운영 프로그램 등등 활용 가능한 프로그램에 직접 참여하고, 그 효과를 직접 경험했습니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몸은 피곤했으나 행복했다고 말하는 이은성 씨에게 케냐에서 무엇이 가장 행복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직장이 생겨 행복해하는 그곳 사람들을 보는 것과 비료를 사용한 뒤 농작물 생산량이 늘어나 행복해하는 농부들을 보는 것이었다고 답했다. 그의 행복엔 언제나 케냐 사람들이 있었다.

미국 앨라배마 주에 위치한 미물자사령부 본부에서 한국 육군 군수사령관의 수행 통역을 맡은 이은성 씨.

Q. 이은성 씨에게 케냐는 ‘해외봉사를 했던 곳’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삶은 케냐를 다녀오기 전과 후로 나뉩니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바뀌어서 삶 자체가 변했으니까요. 아프리카로 해외봉사를 다녀온 사람들이 ‘작은 것에 감사를 느끼게 됐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한국에선 흔하디흔한 계란 하나도 케냐에서는 많은 사람의 배려와 양보로 맛볼 수 있으니까요.

특히 그곳에서 무전여행을 했던 추억이 참 오래도록 남아 있습니다. 엠부, 움팡가노, 호마베이, 카지아도 등의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그 지역 사람들에게 영어, 한글, 컴퓨터 등의 아카데미를 진행했습니다. 수도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다양한 이유로 교육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거든요.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현지인들과 함께 먹고, 자고, 생활했습니다. 현지인처럼 살다 보니 그들이 느끼는 삶의 어려움과 고단함도 같이 느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 어려운 삶 속에서도 언제나 제게 사랑을 주었습니다.

엠부에 있었을 때, 케냐 티를 재배하는 곳에서 일하는 한 부부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하루에 100실링을 버는데, 한국 돈으로 천 원 정도입니다. 종일 고되게 일해서 번 돈으로 콜라와 계란 하나를 사와서 제게 건네는데, 정말 고맙고 미안했습니다. 또 다른 도시에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빠와 엄마, 딸이 함께 사는 집에서 지냈습니다. 그 집 마당에는 큰 대야가 하나 있었습니다. 매일 멀리 가서 물을 길어와 그 대야를 채우고, 그 물로 온 가족이 씻고, 설거지하고 빨래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만큼 물이 굉장히 귀한 동네였습니다. 그 가족은 매일 새벽에 물을 길어오면 제가 가장 먼저 씻게 해주었습니다. 부족한 환경 속에서도 언제나 저를 먼저 배려하는 그들의 넉넉한 씀씀이에, 저 자신이 부끄러울 때가 많았습니다.

케냐 회계대학원에서 금융 투자로 석사학위를 받고 졸업하던 날, 함께 공부한 친구들과.

그러던 어느 날, 제가 빨래를 하다가 그만 그 대야를 깼습니다. 얼마나 당황스럽고, 죄송했는지 모릅니다. 한국 돈으로 오백 원이면 살 수 있는데, 그 돈이 없어서 울면서 기도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3일 뒤에 우연히 고무로 만든 대야를 제가 선물로 받았고 저는 곧바로 그 가족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습니다. 정말 갖고 싶은 것을 어떤 선물을 받았다 해도 그보다 더 기쁠 순 없었을 겁니다.

케냐를 생각하면, 그들이 준 사랑이 벅차다 못해 넘쳐 흘러내린 기억이 너무나 많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줄 수 있다는 걸 그곳에서 처음 배웠습니다. 그런 사랑에 젖어 살다 보니, 다시 그 나라에 돌아가 그 사랑의 빚을 꼭 갚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케냐 사람들로부터 받은 사랑을 하나씩, 하나씩 풀어놓는 이은성 씨를 보며 사랑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느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사랑은 전혀 흐려지지 않고 이은성 씨가 살아갈 삶의 방향을 분명히 제시했다. 어둠을 밝힐 양초 하나를 살 돈은 없었지만, 어둠 속에서 나눈 이야기와 웃음은 이은성 씨가 다시 케냐로 돌아가도록 만든 빛이었다.

Q. 케냐에서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언제였나요?

2019년 7월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제가 군 복무 중에 결혼해서 아내와 아이를 둔 가장이었는데요, 저를 따라 낯선 나라에 간 가족들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저야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니까 고생스러워도 보람을 느끼고 행복하지만, 가족들은 처음 가본 아프리카에서 적응하느라 애를 많이 썼거든요.

그렇게 아프리카에서 학위도 받고 사업도 하면서 5년을 보냈을 무렵, 다시 새로운 계획을 가지고 한국으로 왔습니다.

Q. 또 다른 결정을 하셨네요. 현재는 한국에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한국으로 오기 전에, 케냐에 있는 코트라 현지 무역관에서 전문위원으로 잠깐 일했습니다. 한국의 좋은 기술을 아프리카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중점적으로 했는데, 한국의 기업에도 도움이 되고 아프리카에도 유용하게 사용될 것을 기대하며 재미있게 일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공적개발원조ODA 분야를 찾아 지원했고, 현재는 현대경제연구원에서 기업이나 공공기관에 ODA 연수, 수출 및 무역 교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Q. 직장인으로서 사는 요즘의 삶은 사업할 때와 비교해 어떻게 다른가요?

제가 사업을 했던 경험이 오히려 현재 일에 도움이 됩니다. 사업을 해봤기 때문에 교육을 받으러 오시는 분들의 입장에 공감할 수 있고, 진행되는 교육이 얼마나 실질적인 도움이 될지 알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교육받는 분들과 대화하다 보면 그분들의 간절함이 제게도 전달되어서 꼭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깊게 고민하며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습니다.

살아오면서 ‘빚지고는 못 살아’, ‘빚지고는 살지 말자’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인터뷰를 하는 동안 ‘빚진 자’로 사는 것이 좋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것이 ‘사랑의 빚’이라면 말이다. ‘사랑의 빚’은 갚을수록 더 주지 못해 아쉽고, 상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거나 생각하면서 자신도 행복해진다. 그리고 갚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받은 사랑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하며 살도록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은성 씨가 지금도 ‘저 사람에게 이것을 해준다면 행복해질 텐데…’ 고민하며, 더 주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최지나 기자  41536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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