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사는 분이 요즘 아프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걱정이 되어 전화를 했더니 생각보다 건강이 많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혼자 아프다 죽으면 누가 알겠어요? 연락 좀 하시지….”

“사람이 염치가 있지, 어떻게 얘기를 또 해요?”

도대체 염치가 뭐길래, 그분은 어려운 상황에도 민폐가 될까 봐 주변에 알리지 않고 있는 걸까? 우리의 사고와 행동의 기준이 되는 염치廉恥는 사전적으로 ‘체면을 차리어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뻔뻔하게 행동하는 인간을 염치없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내 생명이 위급할 때에도 염치를 지킬 수 있을까? 역사상 보면, 중국 주나라에 패망 당하고 수치스러워 수양산에 들어가서 굶어죽은 은나라의 백이와 숙제가 그랬다. 그 형제는 지금도 충절과 염치의 아이콘으로 남아 있으며, 후대의 공자, 맹자, 순자 같은 유학자들은 염치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덕목이라고 가르쳤다.

남에게 신세를 지고도 고마움을 모르면 몰염치하다고 하는데, 고맙다고 하면서 계속 도와달라고 한다면 염치 있는 것인가? 또 가까운 사람을 꾸준히 도와주다가 어느 날 지쳐서 불평과 원망이 생기면 그 사람은 몰염치한 것일까?

염치라는 말에 ‘반복’이라는 변수를 붙이면 신세를 지는 일에도, 후의厚意를 베푸는 일에도 금세 한계가 드러난다. 몸이 아픈 지인에게 ‘힘들 때 연락 좀 하시지?’라고 말은 했으나, 내가 그런 배려를 결코 오래 못할 것을 잘 안다.

문자도文字圖는 유교적 도덕관을 강조한다. 위 그림은 오른쪽이 염廉, 왼쪽은 치恥 글자를 회화적으로 표현했다.
문자도文字圖는 유교적 도덕관을 강조한다. 위 그림은 오른쪽이 염廉, 왼쪽은 치恥 글자를 회화적으로 표현했다.

애당초 염치라는 말은 개인주의적 사회에 필요한 규범이다. 즉, 타인과의 관계에서 쓰이는 단어다. 남남일 때 우리는 거리를 두고 경계를 짓는다. ‘넌 안 돼! 여기까지만 입장 가능’의 뜻이 들어 있다. 그러니까 모래알 같은 사람들의 관계를 묶어주는 끈이 염치이다. ‘염치 있는’ 행복은, 식탁보 깔고 격식있게 먹는 정찬과 같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남을 배려하고 폐를 안 끼치려는 ‘염치 있는’ 수준만 되어도 세상 살기는 지금보다 훨씬 즐겁고 좋아질 것이다.

그런데 마음의 방향을 돌리면 같은 세상에서 우리는 염치를 초월한 사회를 발견할 수 있다. 그곳은 규범과 법을 넘어선 사랑이 중심이 된 사회다. 사랑할 때 너와 나의 구분이 무너지고 남이 아닌 관계가 된다.

잘 알려진 성경 속 탕자 이야 기에서, 아버지와 둘째 아들이 바로 염치를 넘어선 관계이다. 탕자 이야기엔 무엇보다 사랑이 깔려있고, 줘도 줘도 아깝지 않은 아버지의 무한 재산이 존재한다. 유한 세계에서 너와 나는 각각의 생명체이기에, 내가 가진 것이 모두 너를 위해 쓰여야 한다면 아까운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인간은 몸이 있어서 물질에 천착하기도 하지만, 그 몸 안에 마음이 있어서 무형의 행복을 인지할 능력도 있다. 따라서 내가 가진 소유를 나누는 데엔 한계가 있어도 마음을 나누어주는 것은 가능하다. 또한 마음엔 사랑을 알아보는 감각이 살아 있어서, 사랑이 전달될 때 몸의 아픔도, 배고픔도, 외로움도 이기고 일어설 물리적 힘이 생긴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을 마음으로 받아본 사람은 몰염치를 떠난다. 뻔뻔한 사람에게 규범을 들이대는 것보다 사랑을 느끼게 해주면 그는 다시 몰염치의 영역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사랑은 그래서 위대하다. 그 사랑을 알아볼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서 결국엔 인간도 위대하다. 인간은 AI 기계가 아니며, 진리에 가까이 있을 때 가슴이 두근거리며 반응하게끔 되어 있다. 마구잡이로 살지 않게 하는 힘을 가진 사랑과 그 사랑을 알아보는 인간이 공존하는 세계. 맨눈으로는 안 보이지만 마음의 눈을 열면 보이는 세계다. 그래서 우리에게 내재된 마음의 구조와 여러 기능의 작동법을 알아서 실제 삶에 적용해보는 배움의 과정이 필요하다.

염치가 필요 없는, 그런 세계에서 우리가 모두 살면 좋겠다.

글=조현주 편집인ㆍ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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