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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다섯 시, 그가 눈을 뜨는 이유서른 살 김보혜 씨가 사는 법
고은비 기자 | 승인 2021.04.01 15:06

김보혜 씨의 아침은 조금 이르게 시작된다. 두 달 전부터 새벽 5시에 일어나 출근 전까지 공부를 한다. 올해 새로운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는 2년 전 적막한 방안에 앉아 썼던 일기를 이따금 읽어 보는데, 요즘 잠을 줄여가며 무엇인가에 몰두하고 즐거워하는 자신의 모습이 그때와 너무 달라 신기하다고 한다.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따스한 봄볕이 내리쬐던 날, 인터뷰를 하려고 작은 벤치에 마주앉은 그는 자주 밝은 웃음보를 터트리고 가벼운 농담으로 상대를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유쾌한 그에게 담긴 사연이 무엇일지 더욱 궁금해졌다. 

김보혜
대학시절, 굿뉴스코 해외봉사단으로 1년간 볼리비아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고, 봉사하는 기쁨을 마음껏 느끼고 지냈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10년이 지난 지금, 그는 행복했던 그 시절을 다시 떠올리며, 온두라스 대사관에서 근무하고 있다.

Q. 현재 온두라스 대사관에서 일하고 있다고요.

온두라스는 중남미에 있는 나라로, 니카라과와 과테말라 사이에 있어요. 저는 대사님의 일정 관리와 통·번역 및 정부 NGO 등 여러 기관에 연락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어요. 대사관에서 일을 시작한 지 1년 2개월이 지났는데요, 최근에 후배 직원도 들어오고, 작지만 큰 꿈도 생겨서 즐겁게 일하고 있습니다.

Q. 2년 전 어려웠다던 시절이 상상이 잘 가지 않는데요. 

제 고향이 대구에요. 스페인어를 전공했고, 대학을 졸업한 뒤 서울의 한 회사에 취직했어요. 처음에는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몰라요. 꿈에 그리던 자취를 시작했고, 쉬는 날에는 보고 싶은 뮤지컬도 실컷 보고, 콘서트에 푹 빠져 살았어요. 그런 즐거운 날들이 계속될 줄 알았죠.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지 못한 문제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하더라고요. 업무적인 부분에 어려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인간관계가 가장 힘들었어요. 가깝다고 여겼던 사람에게 한 번 두 번 상처를 받으니까 나중에는 누구도 믿지 못하겠더라고요. 대화를 하다가도 ‘내가 이 말을 하면 나중에 누군가 뒤에서 날 험담하진 않을까’라는 생각에 머뭇거리곤 했어요.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가면서 점점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졌어요. 그렇게 열광하던 가수의 콘서트에 가서도 전혀 즐겁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잘 사는 것 같은데 나만 이런 어려움을 겪는 걸까?’ ‘내가 나약해서 이런 걸까?’ 이런 생각에 빠지면, 회사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대구로 다시 돌아가야 할까?’ 수없이 고민도 했지만 부모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참고 또 참았죠.

Q. 그때 돌파구로 이직을 택한 건가요?

어디든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어요. 매일 취업 포털 사이트만 보고 있었죠.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전화가 왔어요.

“보혜야, 잘 지내?”

고등학생 때부터 저를 잘 알고 계시는 선생님이었어요. 몇 년 전까지 대구에 계시다 서울로 전직하셨는데, 제가 서울에서 취직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끔 안부 전화를 주셨거든요. 그런데 그날은 갑작스러운 제안을 하셨어요. 온두라스 대사관에서 직원을 뽑고 있는데 지원해 보면 어떻겠느냐고요.

“제가요? 제가 왜요?”

“아는 분이 주변에 스페인어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냐고 물어보더라고. 온두라스 대사관에서 일할 직원을 찾고 있는 것 같던데, 계속 네 생각이 났어. 보혜야, 온두라스가 최빈국 중 하나래. 내가 살아보니까 누군가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줄 수 있는 삶이 행복한 삶이더라. 한번 고민해 봐.”

이직을 고민하고 있었던 건 맞지만 전혀 생각지 않던 분야라 선뜻 답을 하지 못했어요. “네…. 생각해볼게요.” 하고 전화를 끊었어요. 그런데 머릿속에서 그 말이 잊히지 않았어요. 사실, 제가 대학생 때 중남미 국가인 볼리비아로 해외 봉사를 다녀온 후, 잠시 국제 개발 협력 분야 일을 꿈꿨던 적이 있거든요. 그 시절을 잊고 살았는데 갑자기 생각이 난 거죠.

Q. 잊었던 꿈이 다시 생각난 거네요. 

‘그때 내가 왜 그 일을 하고 싶어했지?’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여러 생각이 이어졌는데, 볼리비아에서 행복했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지금은 성격이 많이 달라졌지 만, 제가 원래 소심해서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지 못했거든요. 볼리비아에서도 혼자 이어폰을 끼고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을 때가 많았죠. 그때 ‘록산나’라는 현지인 아주머니가 제게 다가왔어요.

“네가 많이 어려웠겠구나. 네가 표정이 좋지 않아서 사람들이 다가가지 못했던 거지 다들 너를 정말 좋아해. 내가 볼리비아에서 엄마가 되어줄게, 보혜야.”

아주머니가 저를 늘 ‘이하(딸)’라고 불렀어요. 그때 처음으로 마음을 열었고, 여러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며 봉사활동을 즐겁게 했어요. 여러 사람들과 대화하며 스페인어도 많이 배웠고, 한 방송국의 프로그램에 출연해 우리의 활동에 대해 소개하기도 했어요. 나중엔 사람들 앞에 서서 한국어 가르치는 걸 즐거워할 만큼 성격이 쾌활해졌어요. 해외 봉사를 다녀온 후엔 한참 동안 ‘내가 볼리비아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어요.

사랑으로 나를 대해주셨던 현지의 가족들. 사진 맨 오른쪽이 ‘록산나’.
아래) 볼리비아의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한국어 아카데미를 홍보했다.

그래서 국제 개발 협력에 관심을 가졌던 거예요. 그땐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는 게 행복해서 그런 방향의 삶을 진지하게 꿈꿨지요. 이젠 세월이 꽤 흘렀잖아요. 스스로 “나에게 여전히 그런 마음이 있나?”라는 질문을 많이 던졌어요. 솔직히 제 자신을 들여다보면,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보다 나를 위하고, 돈 많이 벌고 노는 걸 좋아하더라구요. 망설여졌어요. 하지만 생각해보니, 나를 위해 살던 그때가 정작 삶이 엉망이었어요. 변화가 필요했기에, 어쩌면 그곳으로 가면 삶이 달라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새로운 일에 도전했죠. 온두라스 대사관 직원 채용에 지원했고. 최종 면접을 거쳐 합격했어요.

Q. 전에 다녔던 회사와 어떤 점이 달랐나요?

전에 다녔던 회사에 비해 직원수가 적기 때문에 일이 많아졌어요(하하). 그래서 처음에는 힘들기도 했지만 마음은 훨씬 편했어요. 제가 대사관에 들어가자 제게 전화를 주셨던 선생님이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축하해 주셨어요. 저는 무슨 일이 있으면 선생님께 먼저 전화를 해요. 신기한 건, 좋은 일보다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전화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야기를 한참 나누다 보면 엉킨 문제가 자연스레 풀렸어요. 생각해보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긴 점도 제겐 큰 변화예요. 선생님께 정말 감사해요. 무엇보다 큰 변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온두라스를 생각하는 마음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예요. 

Q. 언제 그런 변화를 느끼는지요.

일을 시작했을 땐 온두라스에 대해 잘 알지 못했어요. 그런데 대사관에서 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온두라스의 여러 소식을 듣고, 알게 되더라고요. 지금은 무척 가까운 나라처럼 느껴져요. 지난해 온두라스에 정말 많은 어려움이 있었어요.

코로나 치료제가 턱없이 부족해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맞아야 했고, 무기한 격리가 이어지면서 경제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어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초대형 허리케인이 중미를 여러 차례 강타해 도시가 물에 잠겨 주민들이 집을 잃고 거리로 나와야 했어요.

한번은 대사님이 한국의 어느 교장 선생님과 면담하는 자리에 함께 가서 통역했어요. 대사님이 “코로나 이후 온두라스 아이들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결국 1년을 고스란히 잃어버렸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데, 현지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어요.

어느 순간부턴 온두라스가 진심으로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한국의 NGO(비정부기구) 단체나 다른 기관에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전화할 때면 무척 긴장됐어요. ‘어떻게 말하면 온두라스를 한 번 더 생각해주실까?’ 간절한 마음으로 연락했던 것 같아요. 제가 볼리비아를 사랑하는데, 온두라스가 볼리비아만큼이나 제 마음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아요.

Q. 그래서 올해 국제 개발 협력 분야를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걸까요.

맞아요.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제 마음에 힘을 실어준 계기가 있었어요. 한번은 업무상 어느 국제 개발 협력 NGO의 국장님을 뵌 적이 있었어요. 그때 그분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현지 사람들에게 도움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느껴졌어요. ‘순수하게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정말 멋지고 감동적이었어요. 그 자리에 함께 있는 것 자체가 기쁠 정도였죠. 사실, 전에 국제 개발 협력 공부를 포기했던 이유가 제 짧은 경험을 토대로 ‘순수한 목적으로 일하는 곳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거든요. 그런데 제 오해였어요.

지난해, 우리나라 국제개발NGO의 후원으로 산소호흡기, 수술 가운 등의 방역물품을 온두라스 현지 의료기관에 전달했다. 사진 왼쪽이 비르힐리오 파레데스 트라페로 주한 온두라스 대사이다.

Q. 대학원 졸업 후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해보고 싶나요.

저는 중남미 특성에 맞는 지원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현재 중남미의 개발도상국 등 경제적으로 어려운 국가에 지원되는 자원이 적지 않는데, 그런 자원들이 정말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해지려면 현지 상황을 잘 알고 관리 감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중남미 지역 전문가가 되어 그 일을 해보고 싶어요.

인터뷰에 즐겁게 응답하던 그의 목소리가 잠시 먹먹해진 순간이 있었다. 바로 볼리비아에서 웅크리고 지내던 자신에게 다가와준 록산나 아주머니에 대해 이야기할 때였다. “이 이야기를 여러 번 했는데 할 때마다 아직도 눈물이 나요. 고마워서 눈물이 나요.” 그 말에 기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볼리비아에 다녀온 지 10년이 흘렀지만 그의 마음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따스함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수많은 다른 마음들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위로 떠오른 마음을 따라 우리 감정이, 생각이 움직인다. 보혜 씨의 마음이 슬픔으로 채워져 있을 때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지만, 따뜻한 사랑에 마음을 열었을 때 밝고 활기찬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떤 계기로 마음속 깊이 들어 있던, 다른 사람을 위해 살고 싶은 마음이 위로 떠올라 그의 삶을 이끌어가는 것을 보았다.

인터뷰를 마치고 기자는 생각했다. ‘우리는 스스로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혼자가 아니라 함께 살며, 나를 향해 내미는 따뜻한 손을 잡고 일어서기도 하고 내미는 손을 잡고 함께 걷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고은비 기자  press49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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