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들은 손주뻘 학생들에게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돼야지”라며 덕담을 아끼지 않으신다. 나도 그 말씀을 많이 듣고 자랐다. 이젠 두 딸을 두고 있는데, 격려어린 그 덕담을 선뜻 대물림하지 못하고 있다. 그 말을 따라 걸어보았기 때문일까? 누구든 학창 시절에 ‘열심히’를 다짐해도, 공부머리가 없거나 재미를 느끼지 못해 학업을 포기하고 가정 형편상 그만둘 때도 있다. 어쩌다 ‘열공’의 문턱을 넘었더라도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는 성적이 성공을 보장해주고, 성공의 옆자리에 행복이 있다고 자연스럽게 배워왔다. 하지만 그것이 희망사항임을 시간이 흘러서야 깨닫는다. 자타가 인정하는 성공을 이뤘고 평판도 좋은 분들을 이따금 만나면 “그래서 행복하시냐”고 물어본다. 그들 중 대다수는 “반드시 그런 건 아니다”라고 답한다.

대학생들에게서 이런 이야기도 자주 듣는다.

“어려서부터 샘이 많아 공부, 미술, 체육, 뭐든지 열심히 했어요. 성공한 사람이 되려고 ‘잘해야 한다’는 강박증도 있고요.”

“뭐든 열심히 하면 좋은 것 아닌가요? 그래서 잘하려고 노력했는데 항상 혼자 바쁘고 나만의 세계에 살아서 허전해요.”

우리는 최고의 학자, 최고의 부자, 최고의 선수, 최고의 배우가 되면 행복할 거라 믿고 그 위치에 서길 기대한다. 열심히 해서 성공하면 ‘행복’이란 미래의 대가가 뒤따른다는 사실에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공부를 잘하면, 명문 대학에 가면, 좋은 직장에 입사하면 성취감과 우월감을 느낀다. 반대 상황이 되면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고 항변하면서도 자괴감에 빠진다. 내가 남보다 뛰어나야 좋은 자리를 선점하고, 그로 인해 더 행복해진다는 전제가 삶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공에는 행복과 불행을 규정지을 힘이 본래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성공하려고 죽자 살자 달려든다. 행복의 링크를 성공에다 잘못 걸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세계 최고도 행복하지 않을 수 있고, 세계 최하도 행복할 수 있다.

무엇이 되어야 행복해진다면 그것이 진짜 행복일까? 인간이 행복해지는 것은 무언가를 채워서 가능하지 않으며, 행복하려고 애쓰는 것 자체가 행복이 없음을 우회적으로 반증한다. 진정한 행복은 노력해서 얻어지지 않고, 유전자처럼 이미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때 우리 마음이 행복으로 채워지며, 행복한 마음에서는 언제나 행복이 흘러나온다.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반열에 오르려는 노력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꼭 기억하길 바란다. 트리나 폴러스의 책 <꽃들에게 희망을>에 보면, 애벌레들이 “저 꼭대기엔 틀림없이 훌륭한 것이 있을 거야”라고 말하며 기둥을 향해 올라간다. 서로 밀고 채이고 짓밟으며 결국엔 힘센 놈이 먼저 도착한다. 하지만 그가 거기서 한 말은 “젠장, 꼭대기에 아무것도 없잖아”였다. 밑에서 볼 때만 좋게 보였던 것이다. 정상 차지도 잠시,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애벌레에게 밀려 힘센 놈은 추락사한다.

높이 오르려면 기어오르는 방법 말고, 고치를 통과해 나비가 되는 길로 가야 한다. 애벌레의 상태를 포기하고 날기를 소원할 때, 애벌레라는 겉모습은 죽고 나비라는 진짜 모습이 드러난다. 지금 애벌레 같아도, 마음에서 날개가 펴질 때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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