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잡지협회 회장 정광영

최근 코로나19가 몰고 온 경제 위기로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희망도 잃고 있다. 이런 가슴 아픈 뉴스를 접할 때면 그 슬픔에 공감하면서도 ‘절망, 여기가 마지막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종이 잡지’ 또한 타격을 크게 입은 분야 중 하나이다. 1997년 IMF 사태 때 해외에 잡지 수출을 시작해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는 (사)한국잡지협회 정광영 회장은 지금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눈이 펄펄 내리던 1월의 어느 날, 여의도에 위치한 잡지협회 건물에서 그분을 만났다. 출판사 건축세계(주)의 대표이기도 한 그는 사진에서 보았을 땐 근엄한 표정을 가진 풍채 좋은 경영인의 모습이었는데, 실제로 만나니 느낌이 사뭇 달랐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진 박종도 기자
사진 박종도 기자

복서 지망생, 을지로로 가다

그는 경기도 안성의 시골 마을에서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좋아하는 운동을 하며 논밭에서 친구들과 뛰어 놀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엔 부모님과 함께 농사일을 하려 했던 그가 어느 날 TV에서 홍수환 선수의 경기를 본 후 복서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당시 인기 있었던 스포츠가 복싱이었어요. 홍수환 선수가 파나마의 카라스키야 선수와 대결해 네 번 다운된 뒤 다시 일어났고, KO로 이겨 세계 챔피언이 되었죠. 그 경기를 보고 서울로 올라가서 나도 복싱으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보따리 하나 들고 서울로 온 그에게 형수는 일할 곳을 소개시켜주었다. 가서 보니 을지로에 있는 조그마한 출판사였다. 그곳에서 여러 서점으로 책을 배달한 일이 잡지 업계의 출발점이었다. 아침에 출근하면 양손에 책 보따리를 들 고 버스를 타고 다니며 배달을 했고, 저녁에는 체육관에서 복싱 연습을 했다. “그렇게 2년을 살았어요. 열정 하나로 시작한 생활이지만, 계속 그렇게 살 수는 없었죠. 진로를 결정해야 했어요. 결국 1979년에 신인왕전에 출전해 준결승전에서 진 뒤 복싱 선수의 꿈을 접었어요. 대신 출판업을 붙잡았죠.”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며 책 배달 일을 하던 그는, 몇 년 뒤 다니던 출판사에서 잡지를 창간하면서 영업, 광고, 제작, 취재까지 잡지와 관련해서 안 해 본 일이 없을 만큼 여러 일들을 경험한다. 그 가운데 그가 가장 재미있게 했던 일은 사람들을 직접 만나 영업하고 광고를 받는 일이었다. “특히 광고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거잖아요. 광고 효과가 얼마나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광고주를 설득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광고주가 ‘오케이, 1년 계약합시다.’ 할 때 기분이 최고로 좋았죠.”

당시 잡지의 존속 여부는 광고 수주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그는 광고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광고로 10명까지는 먹여 살릴 수 있겠다는 계산이 나와, 출판사에서 직장생활을 한 지 16년 만에 직원 네 명과 함께 월간 <건축세계>를 창간했다.

주저앉아 있을 수 없어서, 낯선 길을 택했다

<건축세계>의 초창기 멤버는 편집장 1명, 기자 2명, 경리 1명, 그리고 정광영 대표, 그렇게 다섯 명이었다. 지방 거래처 영업, 광고 영업, 제작까지 모두 정 대표가 직접 뛰어다니며 진행했다. “창간 이후 정말 열심히 했죠. 2년째 되던 해에 손익분기점을 넘어 자리를 잡는 것 같았어요.”

이제 막 숨을 고르려던 그때, IMF가 터졌다. 건설업계에 일이 줄어들면서 건축 회사들이 폐업하거나 통폐합되었고, 건축을 다루는 잡지도 자연히 폐업 위기에 놓였다.

“아무리 고민하며 활로를 찾아도 길이 보이지 않았어요.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냥 주저앉을 수는 없잖아요. 그때 번뜩 생각난 게 해외 수출이었어요. ‘국내 시장에서 적자를 계속 감수하다가 폐간을 맞느냐, 아니면 어렵고 예측할 수 없지만 해외 시장에 도전하느냐?’ 고민하다가 후자를 택했지요.”

세계 최대 규모의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정광영 회장은 1998년부터 21년 동안 해마다 10월이면 그곳으로 향한다.
세계 최대 규모의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정광영 회장은 1998년부터 21년 동안 해마다 10월이면 그곳으로 향한다.

잡지를 수출한다는 건, 가본 사람이 없는 아주 낯선 길이었다. 잡지를 수출하겠다는 그에게 사람들은 미쳤다고 했다. 그 또한 결정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시 큰아이가 초등학생이어서 가장으로서 느끼는 책임감이 컸고, 잡지도 이제 막 자리를 잡으려고 하던 때여서 다른 잡지사들에 비해 여유가 없었다. 살아남으려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해외 판로를 개척하지 못하면 끝이기에, 수출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 뒤에는 어떤 것에도 주저하지 않고 덤벼들었다.

“1998년부터 한영판으로 잡지를 만들었어요. 다행히 저희 잡지는 사진과 도면이 많고 글이 많지 않았는데, 그래도 번역료만 150만 원에서 200만 원이 들었어요. 건축 잡지로는 국내 최초의 시도였죠.”

한영판 잡지를 들고 처음 간 곳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이었다. 직원을 데리고 갈 재정적 여유가 없어 혼자 가서 전시장을 답사하고, 부스를 설치하고, 아르바이트로 통역해줄 사람을 구했다.

“독일 도서전은 전 세계 출판 관계자들이 모이는 행사로서, 출판 문화가 뒤떨어진 나라의 출판 관계자들에게 한국의 전문 잡지는 상당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40년을 버티는 힘이 되어

그후 그는 미국, 사우디, 아랍에미리트, 인도, 홍콩, 필리핀, 대만, 중국, 프랑스 등 도서전이 열리는 곳은 어디든지 가서 부스를 마련해 책을 팔았다. 그렇게 3~4년 쫓아다니자 실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중국 북경 도서전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4강에 들어 한국이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그의 사업도 함께 상승세를 탔다.

“잡지 수출의 길이 열린 거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은 해마다 가고 있어요. 그 외에도 해외 출장을 자주 가요. 혼자 세계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생긴 에피소드도 많았어요. 공항에서 깜빡 잠이 들어 비행기를 놓친 적도 있고, 들어보지도 못했던 나라에 가기도 했지요.”

IMF 시절에 그냥 주저앉을 수 없어서 택했다는 해외 수출, 그게 아니었다면 잡지인으로서 40년 인생도 없었을 거라고 정 회장은 말한다. 작은 사무실에서 시작한 그의 회사는 현재 7층짜리 사옥으로 자리를 옮겼고, 대만‧싱가포르‧터키‧베트남을 비롯해 30여 개국에 건축 관련 책들을 수출하고 있다.

잡지의 위기, 여전히 희망은 있다

2월이면 정광영 회장의 4년 임기가 끝난다. 한국잡지협회를 위해 일하는 건, 40년 간 잡지인으로 살고 20년 간 협회 회원으로 활동했던 그에게 마지막 꿈 같은 것이었다. 그는 재임하는 동안 잡지협회의 진정한 역할을 생각하고, 필요한 사업들을 기획하고 추진했다. 무엇보다 ‘잡지의 위기’를 어떻게 타개해 나갈 것인지 고민했다.

"전자기기의 발달로 인한 인쇄 매체인 잡지 산업의 위기 상황은 꽤 오래되었습니다. 지난해부터는 코로나19로 언택트 사회가 도래해 광고 수주나 콘텐츠 제작이 어려워지면서 사업 운영이 더 힘든 상황이고요. 하지만 잡지 산업은 여전히 미래 가치와 성장 가능성이 있습니다. ‘잡지’라는 매체만이 가진 매력과 장점이 있기에, 환경의 변화에 발맞추어 잡지도 변한다면 혁신의 기회가 되겠죠. 무엇보다 형식을 불문하고 독자들이 잡지를 산 돈이 전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도록 깊고 세밀하고 좋은 콘텐츠가 실린 잡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잡지를 만드는 사람들이 위기 상황을 인식하고 기존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고요.”

그는 전문성 있는 콘텐츠 잡지라면 월간 <건축세계>가 그러했듯, 수출을 통해 어려움을 타개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이야기한다. 한국잡지협회에서는 잡지 수출을 지원하는 번역 지원, 해외 전시회 참가 지원 사업을 시행 중이다.

1997년, 정광영 회장에게 잡지를 해외로 수출하는 것은 미지의 세계였다. 하지만 선택권이 없어 그 길을 택했고, 거기에서 좋은 길을 찾았다. 그의 행보를 보며 위기에 놓여 있던 많은 잡지사들이 수출을 시작했다. 그리고 2020년, 지금도 그는 어려움을 겪는 잡지사들에게 ‘움직이면 길이 있다’고 말한다.

인터뷰 말미에 기자가 협회장 은퇴 후의 계획에 대해 묻자, 그는 웃으며 답했다. “이제 욕심은 없어요. IMF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아이가 결혼해서 손자가 둘이에요. 5년 후에는 좀 쉬려고 해요. 열심히 달려왔으니까 이제는 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쉬는 것만큼 힘든 게 없어요. 마음이 변해 또 일하려고 할지도 모르죠.”

‘위기를 기회로 만든 경영인’이라 불리는 정광영 회장은 도전적이고 용감한 사람이기 전에 가족을 위해 주저앉을 수 없었던 아버지였다. 기자는 그의 삶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아무리 어려워도 ‘절망’이라는 길만 있는 것은 아니구나. IMF 때 그가 그랬듯, 어떤 상황에서도 누군가는 일어나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구나.’ 살면서 어려운 순간이 찾아올 때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이대로 머물 것인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것인가?’ 내가 아는 세계에서 답을 찾을 수 없다면, 익숙하고 편한 자신의 틀을 깨고 나와 새로운 길을 찾아보자. 길을 찾으면, 부담스럽고 아주 낯설어도 발을 내디뎌보자. 절망이 희망으로 변하고, 새로운 길을 걸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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