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희 <복자에게>

소설 <복자에게>는 제주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판사 ‘이영초롱’이 다시 제주도로 돌아가면서 시작된다. 그곳에는 어릴 적 단짝이었다가 오해로 멀어진 친구 복자가 있었다. 소설 같은 재회로 두 사람은 다시 화해할 수 있었을까.

1999년, 초등학생 이영초롱은 부모님의 사업 실패로 서울에서 고모가 사는 제주도로 전학을 간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곳으로 간 영초롱은 어려서부터 ‘실패’의 쓰라림을 체득한다. ‘내가 여기서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던 영초롱. 그때 마음을 열고 먼저 손을 내민 친구가 복자였다.

“나는 복자가 옆에 있는 것이 좋았다. 전학생이 되면 외톨이가 되거나 다른 아이들이 나를 괴롭혀 아마도 죽어버리리라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상황이었기에 더더욱. 복자와 수다를 떨고 있으면, 그렇게 서로의 말이 함께 얽히기 시작하면 안도감을 느끼곤 했다.”

두 사람은 제주도의 아름다운 어느 섬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복자 엄마의 친구인 이선 고모가 운영하는 섬의 휴게점에 수시로 들락날락하며 한구석에 죽치고 앉아 온종일 만화를 읽고, 이선 고모에게 노래도 불러준다. 하지만 그 즐거움은 얼마 가지 못한다. 영초롱의 말실수로 이선 고모의 비밀이 알려지고, 마을 사람들이 이선 고모를 욕하고 따돌리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이혼해 할머니와 살고 있던 복자는 이선 고모를 친엄마처럼 아꼈기 때문에, 영초롱에게 크게 실망하고 두 사람의 사이는 순식간에 깨진다.

영초롱은 중학생이 되면서 다시 서울로 올라가고, 둘은 한동안 연락을 끊은 채 지낸다. 시간이 제법 흘러 영초롱은 사법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해 판사가 된다. 그리고 어느 날 제주도로 발령을 받는다. 제주도로 돌아온 영초롱은 어릴 적에 헤어졌던 복자와 다시 마주한다. 서로 떨어져 있었던 시간 동안 영초롱과 복자 두 사람에게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이영초롱은 사법시험에 합격한 그 해에 아버지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임종 직전, 아버지에게 영초롱은 이렇게 말한다. “아빠 미안해. 내가 아빠를 미워했어. 아빠가 실패해서 아빠를 미워했어. 그런데 그러면 나는 아빠가 아니라 실패를 미워한 셈이라는 생각이 들어.”

지독히도 아버지를, 실패를 미워했던 영초롱은 절대 부모님처럼 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공부에 전념해 결국 판사가 되지만, 현실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원고든 피고든 정작 억울한 사람은 법을 알지 못해서 혹은 변호사를 사지 못해서 재판에서 지는 현실, 뻔히 알면서도 판사로서 그들의 손을 들어줄 수 없는 현실에 화가 났다. 그럴 때마다 그들 삶의 비극과 고통이 자신에게 옮겨오는 것처럼 마음이 무거워졌다. 판사 생활 초기에 자부와 자긍으로 가득 찼던 그의 마음엔 어느덧 분노만 남고, 병원에서 처방해 준 약 없이는 잠들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결정적으로 법정에서 어느 변호사에게 한 욕설이 크게 문제가 되어 영초롱은 징계위원회에 회부되고, 제주도 성산지법으로 발령을 받는다.

복자는 제주도에 있는 한 의료원의 간호사가 되고, 결혼한다. 그런데 의료원의 열악하고 잘못된 근무 환경 까닭에 아이를 유산하고, 남편과 별거한 채 홀로 지낸다. 같은 의료원에서 일한 간호사들 가운데 30명에 달하는 간호사가 유산하고, 출산한 경우 아이 열 명 가운데 네 명은 선천성 심장 질환을 앓고 있었다. 간호사들은 유산과 기형아 출산의 원인이 근무 환경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의료원 측이 완강히 부인해, 복자는 의료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서 홀로 외롭고 긴 싸움을 하고 있었다.

제주도에서 재회한 두 사람은 과거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가끔 만나 밥을 먹기도 하고 다정히 이야기도 나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복자의 소송 사건을 영초롱이 맡게 된다. 영초롱은 친구의 일인 만큼 잘해보려고 하는데 복자는 영초롱에게 단호히 말한다. “우리는 재판에서 이겨야 해. (중략) 그러니까 빠져줘. 내 평생의 부탁이야.” 복자는 재판에서 지면 영초롱을 원망하게 될 것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이를 알지 못한 영초롱은 “너는 지금 내 인생에서 침해하지 말아야 할 것을 침해한 거야.” 하며 화를 낸다. 결국 둘의 관계는 다시 틀어지고, 연락을 끊은 채 각자의 삶을 산다. 그렇게 시간은 다시 흐른다.

해피엔딩으로 쉬이 넘어가지 못하는 두 사람의 관계는 우리 삶과 닮아 있다.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지만 인생은 원하는 대로만 흐르지 않는다. 소중한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오해나 다툼이 생기기도 하고, 공들였던 일이 실패로 끝나기도 하고, 차가운 현실 앞에서 신뢰나 꿈을 잃기도 한다. 슬픈 사실은, 사람들과의 틀어진 관계를, 잃어버린 희망이나 신뢰를 회복하고자 하는 마음의 여유나 시간적 여유도 없어 끊어진 채로 살아갈 때가 많다는 것이다. <복자에게>는 우리 삶의 이런 단면들을 보여준다.

주인공 이영초롱은 실패한 아버지를 오랫동안 미워했고, 어릴 적 친구였지만 관계가 틀어진 복자와도 연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변해버린 마음은 결코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누군가를 버린 사람은 그냥 버린 사람으로만 남는다’고 믿는다. 영초롱은 이처럼 단절된 채로 살아야만 하는 걸까. 2020년, 단절과 죽음이 가져다주는 고통과 아픔이 깊게 드리운 팬데믹 시대에 영초롱은 새로운 길을 발견한다.

어둠이 깊게 드리운 팬데믹 시대가 일깨워준 사실

복자가 제기한 소송 사건을 마지막으로 이영초롱은 법관의 옷을 벗고, 사법 연구원이 되어 프랑스 파리로 떠난다. 그리고 얼마 뒤 코로나19가 터진다. 죽음 앞에서 속수무책인 사람들, 셧다운 상태가 된 파리, 막혀버린 하늘길, 영초롱은 말 그대로 고립무원의 신세가 된다. 그때 영초롱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복자와의 관계를 비롯해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10여 년 만에 “복자야 안녕?”이라는 말을 시작으로 복자에게 편지를 쓴다.

“우리는 저녁이 되면 발코니에서 서서 좀 멀찍이 대화를 한다. 저녁 여덟시는 파리의 노을이 남아 있을 시간이고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의료진들에게 보내는 파리지앵들의 느린 박수가 계속되는 시간이다. 맞은편에는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할머니가 사는데 늘 이런 말이 쓰인 종이를 들고 나오지. ‘얘들아, 나는 1944년 파리 공습의 생존자란다.’ 그러면 박수가 그 발코니 쪽으로 쏟아진다. 텅 빈 골목에서 그 박수 소리는 마치 물결처럼 어디든 갈 수 있을 듯이 흐르지. 할머니가 쓴 생존자, 라는 단어는 어느 날에는 아주 거룩하고 어느 날에는 거리에 핀 수선화만큼이나 싱그러워. 그는 이런 봉쇄의 나날들에 발코니에서 작은 기쁨을 누리고 있어. 생존자일 수 있는 시간을. (중략) 보낼 수 있다면 복자야, 나는 너에게도 이 박수를 보내고 싶다. 넘치도록….”

팬데믹은 ‘살아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우리에게 그것은 언제든지 잃을 수도 있는 것임을 일깨워주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단순하고 솔직해진다. 영초롱 또한 그랬다. 복자를 향해 가졌던 자기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 것에 대한 섭섭함, 풀지 못한 과거에 대한 씁쓸함…. 마음에 안개처럼 뿌옇게 끼어 있던 그런 것들이 다 걷히고 그의 마음에 선명하게 남은 것은, 자신에게 복자라는 친구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복자가 살아 있고 자신이 살아 있어서 서로 마주보고 대화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영초롱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살아 있는 친구 복자에게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소설 말미에 영초롱은 볼테르의 ‘관용론’을 언급한다.

“관용론은 꽤 지루한 책이었지만 제주에서 서울에서 그리고 여기에서 반복해 읽었다. 그건 장 칼라스 사건에 대한 볼테르의 이런 물음 때문이었다.”

프랑스 남부 툴루즈에 살던 상인 장 칼라스의 아들이 개신교도는 변호사가 될 수 없음을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런데 가톨릭교도들은 칼라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려고 하는 아들을 살해했다고 법의 이름으로 아버지를 처형한다.

“볼테르가 말하는 종교적 맹목과 그 참상에 대한 비판은 이미 알고 있는 논지였다. 내게 놀라웠던 건 볼테르의 마지막 물음이었다.”

볼테르는 장 칼라스 사건을 이야기하며 이렇게 물었다.

“이렇듯 가장 거룩한 신앙심도 지나치면 범죄를 낳는다. 해서 어떤 이들은 자비나 관용, 그리고 신앙의 자유란 사실상 기만이라고 냉소하지만, 그러나 진정으로 반문하건대 자비나 관용, 신앙의 자유 자체가 과연 그 같은 재앙을 초래한 적 있었던가?”

볼테르의 물음은 이렇게 대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살다 보면 일들이 말도 안 되게 꼬일 때가 있다. 그런데 친구나 가족, 정의나 꿈 자체가 불행을 만든 적이 있었던가?”

복자와 영초롱은 여러 문제로 인해 관계가 어그러지지만 친구 자체는 소중한 존재였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족이 모두 힘들어졌지만 아버지 자체는 소중한 존재였다. 뒤틀린 사회에서 판결을 다 정의롭고 떳떳하게 하진 못하지만 판사 자체는 소중한 존재였다.

그런데 뒤틀린 일들이 소중한 존재조차 부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제주도로 원치 않는 전학을 가면서 영초롱의 마음에 ‘아버지’보다 ‘실패’가 더 크고 깊게 새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잘 사는 것, 잘 하는 것이 한 사람의 존재보다 중요한 행복의 기준이 된다면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불행 혹은 미움 등과 동행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젊고 멋진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파리 공습에서 살아남은 할머니에게도 진심으로 박수를 보낼 수 있다면 삶은 많이 달라질 것이다. 영초롱에게 친구 복자가 그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문제보다 소중했다면, 문제 앞에서 조용히 등을 돌리지 않고 어떻게든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을 것이다. 실패보다 아버지가 소중했다면 ‘그래도 아버지가 좋다’고 하며 행복한 아버지와 딸 이야기로 인생을 채웠을 것이다. 판사로 일하며 실의에 빠진 자신 같은 사람에게 ‘그래도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라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위로를 건넬 수 있었을 것이다.

팬데믹 시대에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이영초롱은 이제 소중한 친구 복자에게 편지를 써내려간다. 그렇게 소설 <복자에게>는 막을 닫는다.

글쓴이 김교환

투머로우 캠퍼스리포터로 활동하며 글쓰기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현재는 글쓰기뿐만 아니라 울산에서 청소년들의 꿈을 키워주기 위해 드림빌더 봉사단에서 꿈 설계 프로젝트, 진로강연 등을 하며 다양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2019 한국문학 미래가 될 젊은 작가’로 뽑혔던 김금희 작가의 두번째 장편 소설이다. 아름다운 제주도를 배경으로 소설이 펼쳐지지만 작가는 그 속에 있는 인간의 보편적 불행과 슬픔을 단단한 시선과 위트 있는 문체로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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